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사고와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평소 건강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는 회사 게시판에 부고장이 뜨거나, 문자메시지를 받으면 한동안 당혹스럽고 멍해진다. 죽음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들, 특히 자식들에게 잔소리가 늘어가는 것도 실은 이런 조바심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길고 짧음의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기정사실이다. 그 옛날 천하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중국 진시황도, IT기술로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스티븐 잡스도, 내노라하는 재벌총수들도  결국은 죽음과의 대겨(?)에서 이기지 못했다.

 

3년 전에는 아버지가 전립선암 3기판정을 받으셨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간곡히 말씀드린 후 사촌동생이 근무하는 서울성모병원을 연결하여 수술을 받으셨다. 이후 광주 전남대 화순병원에서 3개월동안 성실하게 방사선 치료를 받은 후 완치되었다는 검사결과를 통보 받았다. 지금은 수술하시기 이전의 건강상태를 회복하셔서 고향 진도에서 건강하게 생활하신다. 

 

지난주에는 아내가 자식 셋을 태우고서 회사 근처에서 나와 만나 일을 보러 가기로 하여 운전을 하던 중에 공항대로 2차선에서 타이밍벨트가 끊어지는 아찔한 사건이 발생했다.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는 4차선 중 2차선상에서 스르르 차가 운행을 멈추어 버리는 황당한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예견이나 했겠는가? 아내의 기지로 아슬아슬하게 큰 사고는 면했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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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난2006년 11월 유방암투병 끝에 그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막내 쌍둥이 자식을 두고 먼저간 전 아내의 일이 생각난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암환자라는 판명을 받고, 그것도 말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았던 의사의 판정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었고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은 암울하고 두려운 단어이다. 비껴가게 할 수만 있다면 억만금의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리 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정말 공평하게도 인간에게 죽음을 연장시키는 그 어떤 거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가 5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주변에서 누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누가 아프다는 소식, 특히 누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만약 내 앞에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친지 중 한 분이 12년째 암투병 중인데 이제 영원한 이별을 할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이미 7여년 전에 먼저간 아내의 암투병을 지켜본 나로서는 환자와 그 가족들이 받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암환자들은 처음 암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분노 내지는 분노와 거부(내게 왜 암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난을?), 공포(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 체념(내가 거부한다고 내 몸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수용(낫게 만드는 방법은? 암 전이를 지연시키는 방법은? 좋은 약은?) 단계를 밟아간다고 한다.

 

말기가 되면 고통이 극에 달한다.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면서 신체 기능들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환자는 고통을 행동으로 표출하면서 곁에서 간병하는 가족들도 힘들어진다. 말기가 되면 거동이 불편해지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까지 온다. 항암제를 투여하는 환자들은 뼈가 무디어져 넘어지면 뼈가 부러지고 흉이 아물지 않는다. 환자의 안전을 우려해서 기저귀를 채우게 되는데 환자가 순순히 응해주면 되는데 이를 거부하면(아마도 기저귀를 차게 되면 죽음에 가까이 가 있다는 공포감과 함께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다) 힘들어진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환자를 일으켜 세우고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까지 이동하는 일은 큰 고역이고 자칫 잘못하면 허리를 다치게 된다. 간병하다가 가족들이  허리를 다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이다.

 

환자는 죽음의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감정조절이 되지 않고 그대로 표출이 되는데 그럴수록 진정제와 몰핀 투여량과 횟수는 늘어간다.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되면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되고(암세포가 기억력을 컨트롤하는 뇌를 압박) 치매현상까지 나타난다. 가족들에게도 못할말과 화를 잘 내는데(환자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가족들은 그런 변화 모습에 '힘들게 간병하는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을 하며 상처를 받는데 이때는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정떼기를 하는구나' 생각하며 자연스레 받아주면 된다.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 '사람은 죽을 때 그 사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형성이 인격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하다. 미래의 죽음 앞에 선 나는 어떤 모습일까? 평정심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삶을 열정과 도전의 자세로 살겠다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지금의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새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하나

"이리 와서 누워봐요. 내가 머드팩 해줄께"
"남자 무슨 머드팩??? 싫어"

"내가 오이팩 해줄까?"
"에이, 나 시간없어~~"

오늘 거울을 보니
거울 속 내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머리카락 또한 부쩍 희어지고 많이 빠진 것 같다,
'아내가 머드팩, 오이팩 해준다고 할 때 그때가 행복했지'


# 두~울

하루 네번씩, 1회에 덱사라는 진통제를 7개씩 복용한다.
한끼 식사랑보다 더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으며
하루 하루를 버틴다.

깊은 밤, 병상 옆에서 쪽 잠을 자는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시도하다가 나에게 들킨다.
그러면 나는 막 나무란다.
"화장실 가려면 나를 깨우라고 했잖아~~
그러다 넘어지면 다리 부러진단말야.
항암제를 맞느라 가득이나 약한 다리인데~~"

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퇴근후 국립암센터 유방암 병동으로 달려가
병실에 누워있는 아내 곁에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며,
그날 집과 학교에서 쌍둥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긴장을 풀지 못하고 쪽잠을 자던 그때가 행복했지'


# 세~엣

하루종일 우울한 병실에 누워있을 아내를 생각하서
기분전환을 시켜주기 위해 강의 때 써먹던
유머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6인실 병실 안이 잠시나마 웃음이 넘쳐났다.
내가 퇴근하고 가면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 없는냐고
병실내 환자들이 은근히 기대를 했다.
대부분 아줌들이라 찐~한 Y담을 더 좋아했다.

지금은 모두들 퇴근하고 텅빈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아 밀린 업무를 하고 있다.
이제는 혼자라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병상에 있던 아내를 위해 매일 인터넷을 뒤지며
유머를 찿던 그때가 행복했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하나

지난 토요일 농협하나로마트를 갔다. 실내가 더워서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본닛을 열고 오일을 점검하고 나서 본닛을 닫으려니 닫는 방법을 까먹었다. 어떻게 닫지? 본닛을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흔들어보고 앞으로 밀어보고 살짝 쳐보고, 본닛을 열 때 전면부 옆으로 살짝 밀었던 부분을 다시 밀어보아도 한번 열려진 본닛은 꿈쩍할 생각을 않는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니 점점 초조해진다. 지금쯤 장모님과 큰애가 시장을 다 보았을텐데... 창피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아하~ 그렇지! 차량안내서를 보면 되겠구나~' 차에 들어가 실내 사물함을 열어 재빨리 차량설명서를 꺼내 읽어본다. 제길~ 여는 방법은 나와있는데 닫는 설명은 없다. 어떡하지??? 등에서는 식은 땀이 계속 흐른다. 다시 밖으로 나와 무심코 본닛을 손으로 잡고 밑으로 살짝 내려보니 헉~~ 그동안 꿈쩍도 않던 본닛이 그냥 밑으로 스스르 내려온다. 그동안 늘 타고나니던 차량 본닛 하나도 닫을 줄 몰라 헤매는 나는 바보다!

# 둘

"쌍둥이엄마가 남겨놓은 그 많은 빚을 떠안고 갚아나가면서 쌍둥이엄마 전혀 원망하지 않고, 장모님 모시면서 애들 키우며 열심히 사는 당신은 정말 바보다"

아내가 내가 미워서 그렇게 많은 빚을 남겼겠나? 우리 가족 잘 살아보려고 주식에 손댔다 그렇게 된 것을... 또 미워하고 원망해본들 무엇하리~ 좋았던 감정만 간직하고 살아가야지! 나는 바보다!


# 셋

"바보같이 착한 당신을 놓고 가려니 내 마음이 놓이지를 않네"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아니 그 여인이 워낙 똑소리나게 해버리는 바람에 맡기고 나는 그냥 뒤만 따라 다녔다. 물건을 고를 줄도, 물건을 살때 흥정을 할 줄도 몰랐다. 그 여인은 하늘나라로 가기 전 남편과 시장을 가면 남편더러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라고 시키고 멀찌감치 뒤에서 지켜보았다. 아직도 나는 물건 흥정에 서투르다. 점원이 부르는데서 고작해야 1~2천원밖에 깎지를 못하겠다. 어휴~ 나는 바보다!

# 넷

"차장님! 이자가 입금이 안되었네요. 지금이라도 매달 얼마씩이라도 원금을 갚아주시면 안될까요?"
"이자는 오늘 입금시킬께요. 원금은 개인회생이 끝나면 매달 얼마씩이라도 꼭 그렇게 할께요"
생전에 아내는 마당발이어서 직장에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아내는 그 후배들을 끔찍히도 잘 챙겼다. 아내는 나에게 후배들에게 빌린 돈은 꼭 갚아달라고 유언을 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아내가 하늘나라에 간 뒤 나는 아내의 채무에 대해 상속포기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아내와 했던 약속에 따라 아내가 후배들에게 빌린 돈은 개인회생이 끝나도 원금만이라도 갚아주려 한다. 나는 바보다!

# 다섯

"차장님! 저희 사내근로복지기금 결산이 잘 되었나 검토해 주세요"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하여 내일 오전에 연락드릴께요"
보내준 자료를 출력해서 집에 돌아와서는 쌍둥이들 숙제며 준비믈을 다 봐주고 재우고 나서 밤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검토하여 그 다음날 오전에 결과를 알려준다. 대부분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끝내지만 일부는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것을 괜찮다고 전화를 끊는다. 주위에서는 내 생활도 어려운데 그 정도는 돈을 받고 컨설팅을 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내근로복지기금 이 일이 좋아 그냥 도와주고 싶다. 나는 바보다!

# 여섯

사랑하는 여인이 내 곁을 떠났다. 너무 힘들어해서 잡을 수가 없었다. 잡았으면 나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 여인이 그랬다. 당신은 바보라고....

바보는.....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이라고....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1년동안 위암으로 투병중이던 배우 장진영씨가 사망했다고 한다.
기사를 읽고 장진영씨가 해맑게 웃고있는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난다.
그동안 그 힘든 투병생활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아쉬움과 남겨진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며 온다.
 
아내도 1년 6개월 유방암 투병생활을 하면서 잘 견디어주었지만 끝내 온몸으로
전이된 암세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쌍둥이들 얼굴을 떠올리며 시간만 나면
'나는 꼭 완치된다'고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하곤 했다. 하루에도 네번씩 꼬박꼬박
어떨 때에는 한끼 먹는 식사량보다도 더 많은 콩알만한 덱사라는 진통제를 한입에
입으로 털어넣으면서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오마야관을 심는 수술을 할 때에도 그 힘든 고통을 감내하며 그래도 이런
수술을 받을 수 있어 행운이라고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웃던 아내였다. 2006년 당시
TV뉴스에서 황우석 교수만 나오면 구세주처럼 황박사님이 줄기세포를 만들어 암을
치료해줄 항암제며 치료제를 만들어 암환자들을 고쳐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했었다.

그동안 장진영씨 곁에서 희망을 잃지말고 투병을 하도록 도와주고 함께해준 연인의
헌신적인 고생도 보람도 없이 하늘나라로 가버린 이 또한 맺어지지 못할 인연이었나
보다. 얼마나 힘들까? 사랑하는 연인을 데려간 하늘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꼬!

그래도 장진영씨는 암을 훌훌 털고 일어나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왕성히 연기활동을 하기를 바랬는데,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니 나도 3년전
아내와 투병생활을 할 때 추억이 떠오르며 이제는 자꾸 옅어져 가는 아내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지며 마음이 울적해진다. 쌍둥이들 잘 키워달라고 했는데...

고 장진영씨의 명복을 빕니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다음카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운영자님이 전체메일로 회원들에게
보내온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 : 어느 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 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 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 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 거는 하자는 데로 다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있는데 지나가던 트럭에(큰거 말고 중간 크기요)
받힐뻔 한 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하고도 26살 때 쯤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 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할 때
집 장만해 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를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하는데...
그래서 네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하시더라구요.
늙은이 가봐야 짐만 되고 눈치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거 해드리면 안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하시면 바로 들고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말라고 몇번 말씀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못 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
저도...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쓰고
모아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 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 달 전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 때쯤 들어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올께'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 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아버님 아들 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시면서 돈버셨더라구요.

그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안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 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좋은지 아버님 찾으로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몇일전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 웃으실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하다며 손 꼭 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 일 하지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낸 후 세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 먹는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하실까봐 케이블TV도 신청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오늘 야구 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드리는데 보기보다 정말 왜소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처럼 생각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 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 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다시 그렇게 일 안하셔도되요...
저 허리띠 쫄라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끝.


카페지기님이 함께 보내준 "그대를 위한 시"란 창작국악곡을 들으며 이 글을 읽는
내내 나도 장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눈물이 핑 고였다. 부모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끊을 수 없는 천륜관계이지만 배우자의 부모는 결혼이라는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인위적인 관계이기에 아무래도 천륜보다는 불편할 수가 있다. 장모님도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활발하시고 할 말 다 하시고 사셨는데 집사람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많이 힘들어 하시며 사위인 내 눈치를 많이 살피시는 것 같다.

집사람이 간 2년 사이에 부쩍 늙으신 것 같다. 맛있는 것도 사드시고 병원도 다니시라고
매주 이십만원씩 드리는 용돈도 미안하신지 아껴 쓰시고 모아서 큰애와 쌍둥이들
간식이며 옷도 사고 학교 준비물도 챙겨 주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 지는 햇수로 21년째...
장모님!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이전처럼 당당하고 편하게 사세요!
제가 잘못한 일 있으시면 예전처럼 자식처럼 나무라시고 섭섭한 있으시면
혼자 마음 속으로 담아두지 마시고 바로 말씀하시면 제가 바로 고칠께요.
큰애와 쌍둥이들도 잘못하거나 장모님께 서운하게 하면 바로 지적해 주시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저에게 살짝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끝까지 편히 모실께요.
집사람도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내 곁을 떠나면서 장모님이 마음에 걸리는지 나에게
'우리 엄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하며 눈물지었다. 집사람 부탁 아니었어도
장모님은 제가 끝까지 모시려고 했습니다. 한참 커가는 자식 셋과 함께 살려니 집도
좁고 불편하시겠지만 제 집에서 편히 사세요.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에게는 장모님이 어머니 이상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신 탓에 어려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내가 장손이면서 막내삼촌과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막내삼촌에게 쌍둥이처럼 같은 옷을 입혔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둘째 작은아버지께 초등학교 2학년 10살때 처음 들었다.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외할아버지가 당시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는데
어머니는 '설교장댁 셋째딸'로 불리셨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몰래 행랑채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지만 과거 결혼사진은 모두 치워버린 탓인지
사진을 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사진을 내가 입수한 것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본 사진 속 어머니는 참 낯설었고 어머니란 단어는 많은 기간
홀로서기에 익숙했고 살기에 힘든 탓인지 그리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단어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탓으로 이응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단어가 '어머니'였다. 중학교때인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새어머니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여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부른 것이 아니고 말더듬 때문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정말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또한 초등학교 6학년 3월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로 나가 자취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었다.

그런데 결혼하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생겨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1년은 바로 집 옆에서 그 이후는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
생소하고 어색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장모님이 휠씬 나에게는 정감있고 좋았다.
집사람과 장모님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장모님이 훨씬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장모님이라 계속 불렀다. 중풍과 고혈압으로
17년째 투병중이시던 장인어른은 결혼후 2년 7개월동안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평소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이다"라고 말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주조장을 하던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장모님이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장인어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어른은 결혼당시
고대법대에 재학중이었는데 6.25전란중 군대를 가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느라
졸업후에도 반듯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겁이 많고 입대시기를 놓쳐 나이가 들다보니
군대를 가면 힘들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았다.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을 넣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돈을 쥐어주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미군부대
PX관리원 자리가 나왔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둘째 동생을 취직시켜 주었고 은혜를 꼭
갚겠다던 둘째동생은 그것을 기반으로 백조관광이란 회사를 차려 갑부가 되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수씨가 회사를 인수하여 시댁과는 일체 내왕을
끊어버렸다.

장인어른이 직장이 없어 장모님이 쌀가게를 운영하시며 40킬로그램이 넘는 쌀을
머리에 이고 용산 보광동 비탈길을 배달하며 가계를 꾸리며 사남매를 키우셨는데 병으로
남편을, 가장 든든하게 믿었던 딸자식을 유방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큰처남은
이혼하고 연락을 끊고 사는 등 굴곡많은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시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셨겠는가? 집사람도 나에게 유언으로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하고
장모님께는 "엄마! 나를 생각해서 김서방과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장모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장모님 성격을 그대로 빼어닮아 사람 잘 챙겨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고 카리스마가 강해 살림을 놓고 장모님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나는 아예 살림을 모두 장모님께 맡기고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사위인
내가 일주일에 10만원씩 드리는 용돈조차도도 모두 쌍둥이들 간식에 모두 쓰실 정도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시고 빈틈이 없으셔서 일을 두고 쉬지도 못하신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이사 이후 짐 정리도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일을 두고 쉬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집안 청소며 주방가구 정리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집사람 사진을 보며 "힘들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하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직장에,
일에 전념하는지 모른다. 이번 이사 때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다음 이사 때는 꼭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고 침대도 장만해 드려야겠다.

장모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아침 어느 지인이 나에게 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홀로계신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걱정입니다. 이번달부터 병원에 계시는데
한달에 병원비만 300만원이 넘게 들어갑니다. 간병비만 하루 6만원정도
듭니다. 더구나 일요일은 일당을 두배로 계산해주어야 합니다. 위로 형이
몇분 계시지만 저도 지난달부터 40만원 정도 용돈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금새 훌훌 털고 나으실 병은 아닌것 같고 이렇게 몇년간 뒷바라지를 해야
될 것 같은데 큰일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왠지 씁쓸해진다. 홀로계신 어머니 병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칠 병원비 부담을 더 걱정하는 것 같다.
긴 병에 효자없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 몸이 편찮다고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에게 금전적인 부담이 지워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전전긍긍한다.

2년전, 어느 선배님이 어머님이 장기간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그
뒷바라지를 하는데 금전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며 불평하며 나를 만나면 자주
하소연하는 것을 보았다. 매달 어머니 병원비가 250만원정도 드는데 자신이
매달 150만원 정도를 부담하고 있는데 힘들다며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자식들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듣기에 민망한 말까지 하곤 했다.

그 선배는 부모님이 뒷바라지를 해준 덕에 좋은 대학 졸업하고 일류 직장에
입사하여 여지껏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당시 서울에 48평짜지 아파트를
소유하며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으면서 겨우 1년반 남짓 병환 중인 어머니의
간병비가 부담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부모가 아닌 자신이나 자식이 아프면 마찬가지로 저토록 불평과 죽는 소리를 할까?

나는 내 형편 때문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자식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하다. 집사람이 유방암투병중일 때도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다. 큰 며느리가 암투병중일 때 동생의 사업실패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도와주고 싶어도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아버지
마음이 어떠했으랴! 그 심정은 아마 내가 집이라도 있었으면 모두 팔아서라도
집사람을 살리고 싶었던 마음 이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작년 추석때 돈이 없어
틀니도 하지 못해 고기를 제대로 씹지 못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틀니를 해드리지
못하는 죄인된 심정에서 마음 속으로 많이 울었다.

부모는 이렇듯 자식을 아끼고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지 못해 노심초사
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비해 자식들은 행여나 부모가 자신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노심초사의 마음이 어찌 이리도
내용으로는 서로가 극과 극일까?
 
부모님은 돌아가시면 다시는 돌아오시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도 머지않아
부모님이 섰던 그 위치에 서게 됨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이 올바로
서야, 내가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부모를 극진히 모셔야 자식들이
이를 보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나는 부모님께 불효를 저지르면서 자식들에게는
어찌 효도를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퇴근하기 전에 지방 캠퍼스에 있는 큰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한 것을 등기로 보내면서 목소리나 듣고 싶었다.

중학교때 애비와 어미와 무던히 싸우며 인터넷과 컴퓨터가 좋다고 정보고등학교로
진학한 큰애인데, 대학은 취업을 생각해서인지 생소한 소방행정학과를 진학했다.

한참 공부를 해야할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어미가 유방암말기 판정을 받고 3학년 때에도
집사람 간병하느라 큰애 뒷바라지를 많이 해주지 못했는데, 걱정하지 말라며
그래도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여 작년 9월에 지 어미 눈 감기 전에 수시에 합격하여
합격증을 보여주어 자식 수험생활에 짐이 될까봐 병상에서 노심초사하던 지어미가
편히 눈을 감게 해주었던 녀석이었다. 지금은 지방의 대학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학교 생할을 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비 곁을 떠나 보내려니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
그래도 집사람이 떠나고 없던 지난 겨울에는 큰애가 옆에서 말동무도 해주고,
동생들 방학숙제도 챙기며 내 짐을 덜어주려 애썼고,
집사람이 생전에 했던 그대로 매일 밤이면 너무 늦게 일하지 말라고
빨리 주무시라고 채근하며 내 주변을 얼씬거리며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날씨가 추워지다보니 하루 세끼 따뜻한 밥으로 잘 챙겨먹고 다니는지,
옷은 춥지않게 잘 챙겨입고 다니는지, 집에서는 아침 잠이 많아 꼭 깨워야 일어나는
녀석인데 아침이면 늦지않게 일어나 수업시간에 지각하지 않고 다니는지,
학교생활은 잘 적응하며 다니는지, 외골수인 성격에 친구들과는 잘 사귀고 지내는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니 나도 별수 없는 대한민국의 애비인가 보다.

지난 9월 초만해도 한살 위 이종사촌 형인 민규와 같은 방을 쓰고 있어
멀리 보내놓았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었는데 민규가 군입대 때문에 먼저 휴학을
하고 서울 집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기숙사 방에서 혼자서 지내려니 적적할텐데...

예전에 내가 중고등학교 때 자취하며 학교를 다닐 때는 직접 연탄불 갈고,
쌀을 씻어 연탄불 위에 솥을 얹어 밥을 해서 먹고 다니고,
반찬거리도 재료를 사서 만들어 먹고 김치도 직접 담구어 먹고
냉장고도 없이 애를 먹던 예전에 비하면 콘도같은 독립적인 기숙사에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냉난방 되고,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호강스런
생활이지만 품 밖의 자식이라고 찬바람이 부니 걱정이 앞선다.

엊그제 콘도사 직원들과 식사를 하고 밤늦게까지 과음을 하고 들어온 날,
쌍둥이 녀석이 큰애에게 아빠가 요즘 술 많이 드신다고 일렀던 모양이다.
나에게 술을 줄이고 건강 챙기라고 전화가 오고,
쌍둥이에게 "너희는 자꾸 아빠 힘들게 하지 말라"하며 타일렀다는 말을 들으니
떠나있는 큰애가 더 애틋해진다. 이게 다 자식을 둔 대한민국 애비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겠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여보! 지금부터 딱 1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쌍둥이들 아직 정신 못차리는 3학년이니, 4학년까지 1년만 더 키워놓으면 그때부터는
자기네들이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고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테니.... 그러면 나도 조금은
마음을 놓고 갈 수가 있을텐데..."

집사람이 생전에 그토록 더 갖고 싶어했던 1년하고도 두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틀후면
2007년 한 해가 또 지나간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1년, 우리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던
1년이라는 시간을 나는 어찌 보냈는가?

다행히 그 1년동안 별다른 동요없이 명이와 윤이가 잘 이겨내 주었다.
명이와 윤이는 흔들림없이 학업에 열심이다. 명이는 이번 2학기 시험에서
한 문제만 더 맞았어도 반에서 1등을 했을텐데 아쉽다고 할 정도로 공부도 잘 따라가고
있다. 하늘은 가족 중에 한사람을 데려간 대신 가족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었고
이전부다 더 아끼고 단단하게 결속시켜 주었다.

그러나 "사내근로복지기금 회계실무" 책자를 발간하기로 했던 계획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홀로서기를 하는 내내 가정과 회사 일,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와 커뮤니티 관리를 병행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한 해이기도 했다.

1년 중 대부분은 회사 근무시간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명이와 윤이를 챙겼다.
아마도 이런 나의 시간배려와 장모님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명이와 윤이가 학교와
학원의 학습진도를 잘 따라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회사 일도 내가 야근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업무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날 끝내지 못한 일은 집으로 가져와 밤 늦도록
해가며 처리했고, 부족한 시간 속에서도 커뮤니티에 많은 칼럼과 글을 올렸다.

싱글대디는 아빠를 대신할 사람이나 대타가 없다. 예전에는 내가 회사 일이나 커뮤니티,
강의 관계로 사람을 만나도 집사람이 있어 빈자리가 없었으나 이제는 금새 표시가 생긴다.
TWO WAY의 선택권에서 ONESIDE WAY라는 절대권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고독을 느꼈지만 고독하다고 누구에게 말하지 못했던 기간이기도 했다.
부부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쇼핑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한 이불 속에서 손을 꼬옥 잡고 잠을 잘 수 있는 이들은 정녕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화상대가 있다. 힘들고 외롭고, 아프고, 고민거리를 서로 전할 상대가 있기에 남에게
털어버리면 그 상처나 고통, 아픔은 절반으로 줄어들거나 그냥 세월 속으로 쉽게 묻어
보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대화상대를 잃은 나는 그래서 외로움과 아픔을 글로 대신 써야
했다. 글이 유일한 고민이나 스트레스의 해소통로가 되었던 셈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28일 기말고사를 치렀던 재명이와 재윤이 성적이 나왔다.
재명이는 97점으로 반에서 2등, 전교에서는 3등이라고 하고,
재윤이는 91점이라고 한다.

지난 1학기말 평균 점수가 89.5점이었는데 많이 올랐다.
특히 재명이는 꾸준히 혼자서도 예습복습을 잘 한 탓에 예상대로
성적이 잘 나왔다. 한개만 더 맞았으면 반에서 1등을 했을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재명이를 보며 희망을 가져본다.

남들처럼 여기저기 비싼 과외를 시킬 형편도 못된다.
집사람 유방암투병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쌍둥이자식들 다니던 학원을
2년 6개월동안 끊었다. 그랬더니 작년 11월에 재명이와 재윤이가 나에게 와서
"아빠 학원을 보내주시면 안되요? 수업 따라가기가 힘들어요"

자식이 공부하겠다고 학원 보내달라는데
"안돼"하고 매정하게 뿌리칠 부모가 어디 있으랴?

부족한 가계부를 더 쥐어짜며 45만원씩을 학원비로 지출하고 있다.
그나마 형제가 다닌다고 10%인 5만원을 감액해 주어 보탬이 된다.

어제는 재윤이가 많이 속상해 있다.
재명이 성적이 좋다보니 재명이에게 칭찬이 집중되니
91점이면 잘했는데 "저는 왜 칭찬을 안해주세요?"
울먹울먹하며 서운해 한다.

"그래 우리  재윤이도 잘했다.
하늘에서 엄마도 재명이와 재윤이 지켜보고 있을거야!
이번 시험 잘 치렀다고 그리고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을거야.
아빠는 우리 재명이와 재윤이가 있어 정말 든든하다
아빠는 앞으로 재명 재윤이가 우리나라 큰 사람으로 커가는
모습을 쭈욱 지켜볼거야.
그리고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줄꺼야!"

산자는 살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안으며 더 강하게 살려고 한다.
가족이, 자식이 나에게는 살아야 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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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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