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아침도 새벽운동을 나가겠다고 작심하고 휴대폰
알람을 새벽 5시 20분에 맞추어 놓았다. 매번 환절기때마다 코감기를 달고 살고
신종플루 때문에도 건강관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생전에 아내는 나에게
'남자가 환절기마다 감기를 달고 산다'고 핀잔을 놓곤 했다. 이제는 나 혼자이니
내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지.

요즘 거의 매일 밤 1시, 어떨 때에는 두시 넘어서 잠자리에 드니 아침 기상시간도
늦고, 잠이 드는 시간도 늦어져 잠을 설치는 경우도 잦다. 사내근로복지기금칼럼을
작성하여 카페에 블로그에 올리고 업무와 관련된 HR, 기업복지, 각 기업동향 자료를
검색하다보면 밤에는 시간이 지나가는줄 모르게 지나가 버린다.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 조용한 적막을 깨는 안방 벽시계의 시계추가 왔다갔다하는
소리와 쌍둥이들 잠꼬대소리, 이빨을 가는 소리, 어쩌다 고약한 잠버릇 때문에 잠을
설치게 되는 일이 많다. 여름에는 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 다음날
근무시간에 업무 효과가 오르지를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5시 20분에 알람소리에 눈을 떴지만 평소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서 5분만 더 눈을
붙이고 일어나리라 하며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꺼버리고 도로 잠이 들어버린다.
이후 깊은 잠이 들었다 운동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퍼득 눈을 떠보니 시간이
어느새 6시 40분들어가고 있다. 나갈까~말까~ 오늘은 늦었는데 그냥 자고 내일부터
나갈까?

이러한 갈등을 잠재우는 것은 내 의지이다.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쌍둥이들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에 배게도 다시 받쳐주고 나서 나는 정발산공원으로 향한다.
장모님도 아직 안일어나셨다. 어제보다는 내려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마주친다.
정상에 있는 헬쓰장에서 운동하는 시간도 5분을 줄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6시 35분.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며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이틀째 새벽운동을 이어간 내자신이 대견하다. 오늘도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이야기 하나

토요일마다 장보는 날인데 내가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에서 주관한 신종플루관련
긴급 예측시나리오를 만드느라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일요일에
시장을 보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 청아공원에 있는 아내 납골당에도 들르고...
장모님은 가실때마다 집사람이 그리운 모양인지 연신 눈물을 닥으신다. 아내
생전에는 그리도 둘이서 토시락거리며 다투더니....
쌍둥이 녀석들이 먹고 싶은 것을 막 카트기에 담는다. 복숭아 두박스, 재윤이는
귤을 보더니 지난주 백마초등학교 영재캠프에서 귤 한개를 얻어먹었는데 귤을 먹고
싶어 병이 났다고 엄살을 떤다. 귤이 한줄로 깔리고 10,500원이기에 크게 선심을
쓰며 "그래라. 귤을 먹고 싶어 병이 났다니 귤도 한박스 사거라"
슬슬 지갑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일단 가지고 있는 돈으로 244,760원 계산을
치르고 떠날려니 장모님과 쌍둥이들이 쌀과 찹쌀을 들고 온다.
"어~~ 돈이 없는데???" 가지고 온 것을 모두 계산하니 4만원이다. 지갑을 모두 털어
2만원과 복숭아 천중도 한박스를 반납하여 19,900원으로 나머지 계산을 치르고 겨우
빠져 나왔다.

# 이야기 둘

일요일 저녁 식사를 하러 일산칼국수집을 갔다. 장모님이 닭칼국수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 내지는 두번씩은 꼭 들른다. 노인분들은 여름철에는 기력이
있어야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기에 장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외식을 하게 된다.
1인분이 6000원이라 우리 식구가 다섯명이니 한번 외식을 하려고해도 최하
30,000원이 있어야 한다. 다른 식당들은 장사가 안된다지만 일산닭칼국수집은
식사를 하려면 식사시간에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어제도 줄을 50미터쯤 서서
25분 만에 자리를 잡았다. 칼국수가 나왔는데 두녀석이 한마디씩 한다.
"할머니! 칼국수 양이 많이 전보다 줄은 것 같아요"
"부족하니?"
"네"
결국 장모님과 내가 닭고기와 칼국수를 쌍둥이들에게 덜어주고서도 부족한지
먹고 나서도 계속 입맛을 다신다. 요즘 녀석들이 한창 크는 시기라 식사량이나
간식량이 애비보다도 많다.
"다음에는 아빠가 너희들은 사리를 1인분씩 더 시켜주마"
"아빠! 사리가 뭐예요"
"국수면을 말하는거다"
"역시 아빠는 샌스가 넘쳐요"
"...."
쌍둥이들 키우려면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
 
쌍둥이아빠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때론 살면서 나 때문에 고생하시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함을 잊고 살곤 한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에 닥쳐보아야
그제야 머리를 숙이고 겸손해지는 아주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그러나 마음은 있지만 현실을 핑계대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산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 함께 고생한 배우자, 마음은 있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를 꺼리고 머뭇거린다. 사정이 좋았을 때도 그런데 요즘같이 힘들고
지갑까지 가벼워진 시기에는 더더욱 실천으로 옮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제는 장모님께 회사 매장에서 건강신발을 팔기에 눈 딱 감고 56,000원을 들여 구입해서
선물로 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신다. 1988년 결혼하고부터 지금껏 22년째 함께 모시고
사는데 큰애며 쌍둥이들 키우고 뒷바라지, 아내의 유방암투병시 뒷바라지 등 우리집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은경이가 살아있을 때 이런 편하고 좋은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네가 사주네...고맙네"
 
이마도 집사람이 생전에 장모님께 신고 다니기에 편한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사주겠다고, 해주겠다고 한 유리한 약속은
잘 잊지 않는다. 내가 해주어야 하는 불리한 일은 잘 잊어버리는 반면 내가 받아야
하는 유리한 일은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치수도 딱 맞고 마음에 쏙 드는 신발을 보니
몹시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집사람과의 그런 약속이 있었던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사드릴껄...하는 미안함이 앞선다.
집사람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내가 대신 지켰으니, 아마도 집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장모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내 발길을 신발 파는 매장으로
가도록 했나 보다. 살다보면 이렇게 몇푼 들지 않은 일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
56,000원 내가 덜 쓰면 되지... 택시를 탈 것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탈 것 걸어다니면 되고,
우리 식구 한끼 외식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정말 가정의 행복은 거창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주변에서 얼마든지 찿을 수
있고 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내 의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실천의 문제이고
행동의 문제이다. 그저 눈 딱 감고 실천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이것 저것 재기
시작하면 하기 어려운 법! 내가 먼저 양보하고, 다가가는 것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해 12월말 쌍둥이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내가 큰애에게 방학동안에
보여줄 좋은 영화가 있으면 예매하여 쌍둥이들과 함께 보라고 했더니 어제
내가 한 말이 생각났는지 나에게 다가와 "아빠가 방학전에 말씀하신 영화를
내일 봐도 되요?"라며 묻는다.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예전에 할아버지가 영화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여
동양극장에를 갔는데 입장료가 비싸서 보지를 못하셨데요. 그 이후 영화를
보지 못하셨다는데 할머니도 함께 모시고 가서 보면 안될까요?"
아차! 내가 왜 그걸 깜박했을까? 예전에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 장모님이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을 내가 들었는데 내가 모시고 가서 보여드릴
생각을 여지껏 왜 못했을까? 장인어른은 군대를 가지 않아서 평생을 취직을 하지
못하고 실업자로 사시는 바람에 내내 장모님에게 용돈을 타 썼다고 한다.
 
오늘 농협하나로마트를 다녀오면서 넌즈시 극장 사건을 꺼내니 49년전 그당시
서운했던 일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생생히 말씀하신다.
"은경이(집사람 집에서 부르는 이름)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고 규 외할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자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화가 와서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 함께 신당동 집 근처 동양극장을 갔는데 영화입장료가 비쌌는지
다시 명보극장을 가자고 하더라고... 명보극장은 시내에 있어 더 비싼데 이상하다
싶어 따라갔더니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명보극장(건물)만 보여주더라고... 얼마나
얄미웠는지 그날밤 집에 들어와 대판 부부싸움을 했지. 당신이 평생 돈을 벌지
못했던 분이라 돈이 없으면 간장에 밥을 비벼먹고 살았으면 살았지 절대로 남에게
손을 벌리지는 않던 분이어서 없으면 안쓴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지"
 
농협하나로마트를 다녀오는 길에 일산 장항동 CGV를 들러 큰애에게 '워낭소리'를
5장 예매시켰다. 앞으로 두시간 후 영화관을 가는데 장모님은 오후 내내 기분이 들떠
계시는 것 같다.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 진즉 영화관을 함께 가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지갑이 가난하다고 꿈과 마음도 가난해지면 안되는데, 그저 조금만 시간과 마음을
쓰면 모든 가족이 행복한데... 영화 워낭소리가 슬프다는데 장모님이 장인어른과
집사람을 생각하며 얼마나 또 많이 우실꼬?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쌍둥이 중 형인 재명이가 아침 일찍 친구들과 찜질방을 가기로
했다며 집을 나가서 하룻동안 찜질방, pc방을 전전하며 신나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3주전부터 친구들과 찜질방을 가기로 했다고 나에게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기에 저희들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판단에 허락을 했는데 내 의도와는 영 딴판으로 일이
진행되어 버렸다.

재명이가 나가면서 나와 약속했던 사항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첫째, 저녁 6시까지는 귀가를 한다.
둘째, 중간에 두번 집으로 전화를 한다.
셋째, 함께 가는 친구들 연락처를 남겨 놓는다.
넷째, 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재명이에게 전화 한 통화도 없지, 적어 놓고 간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도 다들 안갔다고 하지, 함께 찜질방을 간 것으로 추측되는 녀석들은
공교롭게도 집전화번호만 적혀있고 휴대폰은 없지...

날은 저물어 가는데 재명이는 귀가하지도 않고, 전화 한 통화도 없으니
장모님은 걱정이 되어 애들끼리 찜질방을 가게 허락을 했다고 무책임한
아빠라고 하루 종일 닥달하시며 빨리 집 주변 PC방을 찿아가서 재명이를
찿아서 데려오라고 성화시고...

저녁 7시 30분이 넘어서 그제서야 어슬렁거리며 들어온 재명이를 불러
심하게 질책을 했다. 재명이는 논리적이어서 무작정 매를 때리기 보다는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설득력이 크기 때문이다. 왜 아빠가
화가 났고 재명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을 했다.

첫째, 저녁 6시까지 들어오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
둘째, 나가서 중간에 두번 집으로 전화를 하기로 했는데 지키지 않은 점,
셋째, 지난 12월달에 회사 선배의 결혼식장에서 어른들이 주신 용돈 3만원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써버린 점,
넷째,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서도 끝까지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pc방을 가지 않았다고 우기다가 잠바에 짙게 밴 담배연기 냄새를 추궁하자
그제서야 갔다고 실토를 함)
다섯째, 가지 않기로 한 PC방을 가서 게임을 한 점이었다.

무엇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PC방을 가놓고서도 가지 않았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아주 실망스럽고 앞으로는
재명이 말을 아빠가 신뢰할 수 없게 되었으며 벌로써 앞으로 2주간 집에 있는
컴퓨터를 하지 못하도록 접근금지명령을 내렸다.

이제는 쌍둥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드나,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로 거짓말도
할 줄 알고 아빠를 속이고 피씨방도 가서 게임도 하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려고 하니 혹시라도 잘못 되지는 않을지 무척 신경이 쓰인다.

회사에서는 예산과 결산, 밀린 업무로 눈코 뜰새없이 바빠 내 일 처리하기도
힘든 시기인데 쌍둥이들까지 내 신경을 쓰이게 하네. 엄마가 없어 아빠 혼자서
1인 다역을 하고 사는 싱글대디 아빠를 조금만 생각해 준다면, 눈치있는
녀석들이라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신경이나 쓰이지 않게 해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모양이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다음카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운영자님이 전체메일로 회원들에게
보내온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 : 어느 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 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 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 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 거는 하자는 데로 다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있는데 지나가던 트럭에(큰거 말고 중간 크기요)
받힐뻔 한 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하고도 26살 때 쯤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 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할 때
집 장만해 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를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하는데...
그래서 네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하시더라구요.
늙은이 가봐야 짐만 되고 눈치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거 해드리면 안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하시면 바로 들고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말라고 몇번 말씀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못 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
저도...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쓰고
모아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 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 달 전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 때쯤 들어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올께'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 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아버님 아들 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시면서 돈버셨더라구요.

그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안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 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좋은지 아버님 찾으로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몇일전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 웃으실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하다며 손 꼭 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 일 하지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낸 후 세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 먹는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하실까봐 케이블TV도 신청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오늘 야구 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드리는데 보기보다 정말 왜소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처럼 생각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 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 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다시 그렇게 일 안하셔도되요...
저 허리띠 쫄라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끝.


카페지기님이 함께 보내준 "그대를 위한 시"란 창작국악곡을 들으며 이 글을 읽는
내내 나도 장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눈물이 핑 고였다. 부모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끊을 수 없는 천륜관계이지만 배우자의 부모는 결혼이라는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
인위적인 관계이기에 아무래도 천륜보다는 불편할 수가 있다. 장모님도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활발하시고 할 말 다 하시고 사셨는데 집사람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이후 많이 힘들어 하시며 사위인 내 눈치를 많이 살피시는 것 같다.

집사람이 간 2년 사이에 부쩍 늙으신 것 같다. 맛있는 것도 사드시고 병원도 다니시라고
매주 이십만원씩 드리는 용돈도 미안하신지 아껴 쓰시고 모아서 큰애와 쌍둥이들
간식이며 옷도 사고 학교 준비물도 챙겨 주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 지는 햇수로 21년째...
장모님!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이전처럼 당당하고 편하게 사세요!
제가 잘못한 일 있으시면 예전처럼 자식처럼 나무라시고 섭섭한 있으시면
혼자 마음 속으로 담아두지 마시고 바로 말씀하시면 제가 바로 고칠께요.
큰애와 쌍둥이들도 잘못하거나 장모님께 서운하게 하면 바로 지적해 주시고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저에게 살짝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끝까지 편히 모실께요.
집사람도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내 곁을 떠나면서 장모님이 마음에 걸리는지 나에게
'우리 엄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해!' 하며 눈물지었다. 집사람 부탁 아니었어도
장모님은 제가 끝까지 모시려고 했습니다. 한참 커가는 자식 셋과 함께 살려니 집도
좁고 불편하시겠지만 제 집에서 편히 사세요.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주 토요일, 가족들을 데리고 이마트에 일주일 시장을 보러 갔다.
회사가 주5일제 근무이다보니 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일주일분 시장을
보고 일주일을 버틴다. 요즘은 쌍둥이들이 크는 시기인지 먹는 식사량이
나보다 더 많아 쌀이며 부식, 음식이 푹푹 줄어든다. 일주일분 시장을 보아도
예전같으면 일주일을 넉넉히 버텼는데 요즘은 일주일도 가지 못해 금요일이면
슈퍼에서 부족한 것을 사게 된다. 덩달아 식비나 식재료비 지출이 몰라보게 늘어
장난이 아닐 정도로 부담으로 늘어간다. 하긴 집에 나와 큰애, 한참 크는
쌍둥이들 남자만 넷이니 냉장고 안이 일주일 동안 온전히 남아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겠지...

과일이며, 야채, 음료수, 우유, 간식거리인 고구마도 카트에 담고 시간이 흐르면서
카트기에 쇼핑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하자 슬슬 걱정이 되어 지갑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카드는 아예 없지, 오직 현찰 밖에는 거래수단이 없는데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20만원에 비상금 5만원을 보태도 25만원이 전부인데...

시장을 보는 사이에도 내 머릿 속은  온통 가격계산에 골몰해 있다. 그때 코너를
도는데 처음보는 고기가 눈에 띈다. 닭다리보다는 훨 크고 먹음직스럽게
노릿노릿하게 구워진 고기가 눈에 보이기에 남자 점원에게 이게 무슨 고기냐고
물으니 칠면조의 다리라고 한다.

칠면조라면 옛날 초등학교인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구두쇠 스크루지 이야기가
생각난다. 돈 밖에 모르는 구두쇠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꿈에 먼저 죽은 수전노 친구가 나타나 나쁜 짓을 하다 지옥에 떨어져 고생하는
장면과 자네를 데리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하여 꿈에서 깨어 개과천선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스토리로 기억이 되는데 그날 크리스마스 이브에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사무실 직원들 집으로 선물로 사서 보냈다는 고기가 칠면조이고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나 각종 축제때 단골 메뉴로 쓰이고 있다. 가격을 보니
9900원으로 양에 비해 생각보다 별로 비싸보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우리도 집에서 온 가족이 칠면조 고기로 한끼를 때워볼까 생각하고
카트기에 담았는데, 결국 계산대에서 비상금까지 다 털리고 이마트를 빠져
나왔다. 그날 저녁은 칠면조 고기로 장모님과 나, 그리고 세 자식 모두가 행복한
저녁 식사를 했다. 칠멵 고기가 쫄깃하고 질기기도 않고 담백하여 온 가족
모두에게 인기가 높아 그날 저녁은 추억에 남을 9900원의 행복한 식사가 되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람은 성격이 비슷하면 싸우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더 싸우고 싸우면
수습이 힘들다. 집사람 생전에 집사람과 장모님은 성격이 비슷했다.
카리스마가 강했고, 리더십도 있었고 남에게 잘 베풀고, 고집고 쎄고,
혈액형도 O형으로 한마디로 호방한 남자 성격이었다.

반면 나는 A형으로 적극적인 리더형보다는 참모형에 가까웠다. 집사람과
내가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일찌감치 승패는 결정되었고 내가 거의 져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사람과 장모님이 다투면 항상 크게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 중간에 끼인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꽤나 불편했다. 집사람 편을
들자니 장모님이 걸리고, 장모님 편을 들자니 집사람의 불같은 성격에 가만히
있을리는 없고 그러다보니 느는 것은 눈치라고 대충 눈치를 보며 해결이 될
때까지 관망하는 편이었다. 그러면 집사람에게 가장인 남편이 적극적으로
중간에 화해시킬 생각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고, 무책임하고
무심하다고 야단맞고.... 내 의견을 들어주고 존중해 주어야 화해고 뭐고
이루어지는데 무조건 본인 말이 옳다고 우기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의견충돌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집안살림의 주도권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혼 때부터 맞벌이를 했고 신혼초 1년 4개월을 빼고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계속 살았기 때문에 퇴근하고 만나 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장을
보아왔고 장모님은 그 재료로 반찬을 만드시곤 했는데, 매번 사오는 식재료로
반찬을 만드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장모님도 며칠 냉장고에 묵히다보면
그만 유통기한을 넘겨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면 집사람은 "왜 비싼 돈을 주고 사온 식재료를 냉장고에서 묵혀 먹지도
못하게 만드느냐? 엄마는 살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요?", 그러면 장모님은
"네 자식 키우는 것도 힘든데 그럼 살림은 네가 해라!"하시며 방으로 훽 들어가
버리신다. 회사에서 종일 일에 시달리다 집으로 돌아온 집사람이나 종일 당시
어린 큰애를 키우느라 장모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터라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감정싸움으로 발전하곤 했다. 더 진전되면 "아들 밥상은 앉아서 받고,
딸 밥상은 서서 받는다던데 그 말이 딱 맞는 말이네. 어이구 박복한 내 신세~~"
하며 신세 한탄을 하면 "아니 엄마는 내가 뭘 구박했다고 그러는 거요?"하며
더 감정대립의 골이 깊어지곤 했다.

이론상으로는 어느 한쪽이 참으면 되련만 서로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비슷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하도 답답하여 내가 집사람에게 한마디 하곤 했다.
"자기가 조금만 참으로 될 것을 장모님을 기어이 이겨야 되겠는가? 그러다
나중에 장모님 먼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하려고...살아계실 때 맘 편히
사시도록 잘 해드립시다."

집사람을 보낸 후 장모님은 그래도 그때 딸자식과 기싸움을 하며 아웅다웅
다투며 지내던 그때가 그리우신 모양이다. 그러게 사람들은 곧 후회할, 아픔을
남길 말과 행동을 왜 하는걸까? 집사람과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나는 집사람을
먼저 보낸후 살림 일체를 장모님께 맡겨 버렸다. 시장도 함께 가고, 필요한 것은
같이 함께 상의해서 골라 구입한다. 혹시 빠진 것이나 애들 필요한 것은 사시라고
매주 별도로 10만원씩 용돈을 드리며 살림은 전적으로 맡겨버린다.

노인분에게는 일을 맡겨주는 것이 치매를 예방하고 육체나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노인분들에게는 치매예방을 위해 고스톱을
치라고 일부러 권유하기도 한다. 보다 일찍 역할분담에 충실했던들,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던들 집사람이 이렇게 일찍 허무함을 남긴체 먼저
가지는 않았을 것을...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일요일 쌍둥이중 형인 재명이가 팬티를 갈아입는데 여지껏 장모님 앞에서
잘 갈아입었는데 이제부터는 화장실에서 갈아입겠다고 슬쩍 방을 나선다.
장모님은 그러는 재명이 행동이 싫으신 모양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녀석에게
드디어 사춘기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자라면서 그런 시기가 있었지... 식구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 창피해
골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갈아입은 팬티도 누가 볼새라 세탁물 속 깊숙이
숨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일기도 누가 볼까봐 나만이 아는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비밀이 많아졌고,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내 하고 싶은대로 해보고
싶은 그런 시기가 나도 있었지...

어제 저녁에 재명이에게 취침시간이 되었다고 인터넷을 그만하고 자라고 했더니
친구와 싸이월드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게 한다고 서럽게 울며 30분간을 혼자
짜증부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이제는 두 녀석들이 고집을 피우면 여간해서는
꺾지를 않는다. 장모님도 이제는 녀석들 고집을 어찌 해볼 재간이 없으신 듯 모든
것을 나에게 떠밀어 버린다. 내가 조금이라도 퇴근이 늦으면 녀석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 하신다.

한참 어미에게 응석을 부리며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시기인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도 저만한 나이일 때 어머니 품이 참 그리웠지... 동생들이 새어머니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모습과 새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젖을 먹는 동생들 모습이
너무도 부럽고 질투까지 느껴졌었지. 동생들이 잘못하여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을 때는 어머니가 달려들어 온 몸으로 막으며 얼른 동생들을 감싸고 피신시키는
모습에서 "저런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고 그늘이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도 재명이가 학교에 일찍 가야 하는데 6시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6시
30분에 너무 늦게 깨웠다고 장모님께 계속 짜증을 부리며 징징거리며 눈물을
짜기에 내가 버럭 화를 내며 야단쳤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못하고 녀석이 쨘해
보인다. 이내 달래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재명이와 재윤이를 불러놓고 어제
치른 시험결과를 놓고 칭찬을 해주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우리 재명, 재윤이가 수학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아빠는 참 기쁘다.
수학과 영어는 지금 5학년 때가 중요하니 계속 기초를 잘 다져 놓도록 해라".

칭찬을 하니 금새 녀석들 기분이 좋아지며 얼굴이 밝게 펴진다. 어려서 받은 상처와
자라면서 받은 고통과 역경이 이렇게 나를 성숙시키고 상처를 보듬고 한단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주었나 보다.
 
그래, 이 애비도 자라면서 속상한 때도 많았고 마음의 상처가 많이 받았지...
너희도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야 하니 얼마나 힘들고 마음아프고 외롭겠니?
상처 많은 우리 가족 서로 아픈 상처 건드리지 말고 서로 부둥켜안고 감싸며 사랑으로
부족함과 외로움을 채워가며 살자꾸나~~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에게는 장모님이 어머니 이상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신 탓에 어려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내가 장손이면서 막내삼촌과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막내삼촌에게 쌍둥이처럼 같은 옷을 입혔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둘째 작은아버지께 초등학교 2학년 10살때 처음 들었다.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외할아버지가 당시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는데
어머니는 '설교장댁 셋째딸'로 불리셨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몰래 행랑채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지만 과거 결혼사진은 모두 치워버린 탓인지
사진을 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사진을 내가 입수한 것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본 사진 속 어머니는 참 낯설었고 어머니란 단어는 많은 기간
홀로서기에 익숙했고 살기에 힘든 탓인지 그리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단어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탓으로 이응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단어가 '어머니'였다. 중학교때인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새어머니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여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부른 것이 아니고 말더듬 때문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정말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또한 초등학교 6학년 3월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로 나가 자취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었다.

그런데 결혼하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생겨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1년은 바로 집 옆에서 그 이후는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
생소하고 어색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장모님이 휠씬 나에게는 정감있고 좋았다.
집사람과 장모님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장모님이 훨씬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장모님이라 계속 불렀다. 중풍과 고혈압으로
17년째 투병중이시던 장인어른은 결혼후 2년 7개월동안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평소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이다"라고 말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주조장을 하던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장모님이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장인어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어른은 결혼당시
고대법대에 재학중이었는데 6.25전란중 군대를 가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느라
졸업후에도 반듯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겁이 많고 입대시기를 놓쳐 나이가 들다보니
군대를 가면 힘들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았다.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을 넣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돈을 쥐어주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미군부대
PX관리원 자리가 나왔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둘째 동생을 취직시켜 주었고 은혜를 꼭
갚겠다던 둘째동생은 그것을 기반으로 백조관광이란 회사를 차려 갑부가 되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수씨가 회사를 인수하여 시댁과는 일체 내왕을
끊어버렸다.

장인어른이 직장이 없어 장모님이 쌀가게를 운영하시며 40킬로그램이 넘는 쌀을
머리에 이고 용산 보광동 비탈길을 배달하며 가계를 꾸리며 사남매를 키우셨는데 병으로
남편을, 가장 든든하게 믿었던 딸자식을 유방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큰처남은
이혼하고 연락을 끊고 사는 등 굴곡많은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시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셨겠는가? 집사람도 나에게 유언으로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하고
장모님께는 "엄마! 나를 생각해서 김서방과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장모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장모님 성격을 그대로 빼어닮아 사람 잘 챙겨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고 카리스마가 강해 살림을 놓고 장모님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나는 아예 살림을 모두 장모님께 맡기고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사위인
내가 일주일에 10만원씩 드리는 용돈조차도도 모두 쌍둥이들 간식에 모두 쓰실 정도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시고 빈틈이 없으셔서 일을 두고 쉬지도 못하신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이사 이후 짐 정리도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일을 두고 쉬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집안 청소며 주방가구 정리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집사람 사진을 보며 "힘들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하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직장에,
일에 전념하는지 모른다. 이번 이사 때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다음 이사 때는 꼭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고 침대도 장만해 드려야겠다.

장모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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