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10월 집사람이 국립암센타에서 유방암 말기 투병 중일 때
식사량이 공기밥 한 그릇 이라면 복용해야 할 약은 그의 1.5배였다.
대부분 통증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마약성분이 함유된 진통제들로 일반 약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약들이다. 그 약 중에 덱사라는게 있는데 처음에는 하루에 네번씩
두 알부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8개로 늘어났다. 8개를 목으로 넘기려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집사람 곁에서 먹는 음식보다 더 많은 덱사를 입안에 넣고 고통스럽게 삼키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항암제를 맞으며 이렇게 고통스런 약을 처방받아 먹는 것 이외에 달리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참고 기다리며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항암제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인터넷을 뒤지며 암에 관한 정보를 애타게 찿았다.

한때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에 모든 희망을 걸며 열광하며 올인했다. 집사람이
국립암센터에 입원해 있었던 당시 항암치료에 지쳐 자포자기하고 희망의 끈을
놓으려는 병실 환자들에게 "조금만 버티자. 황박사님이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항암제와 줄기세포 기술을 개발하여 반드시 우리를 살려 주실거야"라고 격려하고
식사를 포기한 환자들에게도 밥을 먹어야 기운도 내어 암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며
억지로 밥을 먹게 만들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분명 방법은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20일 네째 동생이 광주광역시 첨단지구에서 나이트틀럽을 오픈하는
것을 지켜보신 아버지가 3일전 전화통화에서 나에게 조심스레 한마디 건낸다.
"그날같은 이 경사스런 자리에 꼭 있어야 했던 한 사람이 빠져 서운했다.
동규엄마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경사스런 자리에서 동규엄마 얼굴이 자꾸 떠올라 아쉽고 서운했다"
아버지가 이미 1년 반 전에 하늘나라에 간 집사람을 거론한 것은 그동안
집사람이 우리 집안에 끼친 영향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장모님까지 한마디 거드신다.
"동규엄마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지만 죽은 년만
불쌍하지"

"빚만 남겨놓고 가서 미안해! 동규는 컸으니 지 앞길 혼자 헤쳐나갈 수 있지만
우리 쌍둥이들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쌍둥이들 끝까지 잘 부탁해!"
"쌍둥이들은 걱정말고 하늘나라에 먼저 가서 잘 살어. 내가 쌍둥이들은 잘 키워
사회의 리더로 내보내고 당신 뒤를 따라 하늘나라에 갈테니깐..."
눈을 감기 3일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유언을 하고 쌍둥이들을 부탁하며 집사람은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남겨 놓은 빚을 정리하느라 지금껏 2년간 한달 한달을 먹고 싶은 것 참고,
입고 싶은 것 아끼며,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니며,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자린고비 생활을 하며 악착같이 살고 있다. 휴일이면 회사 사람들은 관광지며
콘도를 여행하며 외식도 한다지만 나는 집과 교회만 왔다갔다 하며 참고 버틴다.

살아있으니 행복할 거라고? 빚에 허덕이며, 남겨진 세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산 자의 고통을 아는지? 몇년 지나면 빚도 갚고 빠듯한 생활도 차츰 펴지겠지!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 보지도 못하고, 이제는 곁에 하소연할 사람도 없어 나홀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그리움도 외로움도 혼자 삭히고 참아내야 하는 정녕 산 자의
고통을 아는가?

2008.5.28.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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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은 우리 결혼 20주년기념일입니다.
88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 23일 여의도 가든예식장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의 이상향의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 너무 행복했습니다. 마치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행복했고
세상이 온통 장밋빛이었습니다. 결혼과 함께 구입한 고강동 아파트에, 철산동
사원아파트까지 결혼하자마자 아파트도 2채나 생기고 마침 불어닥친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으며 부모님 공경할 줄
알고, 재치 넘치고, 리더십이 강한 평생 동반자를 만나니 지난 30년간의 어려움과
외로움, 고난을 하늘이 이제야 한꺼번에 보상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1989년은 우리 부부에게 최고의 해였던 것 같습니다. 큰아들 동규가
결혼 이듬해인 1989년 2월에 태어났고, 나는 대리로 승진했고, 당신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출발하여 계약직을 거쳐 꿈에 그리던 업무직
직능전환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업무직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1993년 기획실 과장으로 승진했고, 일주일만에 현재 직장으로 전직을 했습니다.
생각했던 일들이 너무도 잘 풀려 잠시 우쭐대기도 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이 영원히 함께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계획성있고, 절제된 삶에서 스스로 지키고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임을 큰형님을 위해 차린 완구가게의 실패, 이후 경제적인
고통을 겪으며 당신이 병을 얻고, 당신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면서 깨달았습니다.

당신만을,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만 이기적으로 살았다면 지금의 경제적인 고통이나
이별하는 아픔은 아마 겪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사는 것이 아닌
가족들 특히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들을 챙기며 함께 살려고 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기에 내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신의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막내처남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당신의 지난시절 힘들게 내렸던 결정과 마음 씀씀이가 이해가 됩니다. 당신은
어쩌면 내가 품고 살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가족 당신과
행복했던 지난 시간만을 기억하며 다시는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사랑하는
가족을 나보다 절대 먼저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할겁니다. 사랑하는 당신이 유방암으로
투병할 때 경제적으로 힘이 되어주지 못했을 때의 무기력함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가족이 아파하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이를 깨물고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무기력한 가장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보내고나서 가족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끼고 그것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일확천금이나 과욕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열심히 산
덕에 빚도 계속 줄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전에 좋아했던 장미 두송이를 당신에게 바칩니다.
20주년이니 20송이를 바치고 싶지만 한푼이라도 더 아껴 하루라도 우리 가족이 발을
편히 뻗고 살 수 있는 집을 장만하는 것이 시급하고 당신이 더 기뻐할 것 같아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동규와 쌍둥이인 재명이와 재윤이 세 자식 훌륭히 키우고 장모님 잘
모시겠다는 당신과의 약속 내 잘 지켜낼 것입니다.

2008.4.23.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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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추석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집사람과 나는 수산시장을 다니며 추석 제수용품을 미리 준비하느라
바빴다. 점심때 잠시 짬을 내어 노량진 수산시장을 함께 다녀오곤 했다. 추석이 닥치면
건어물이 비싸다고 미리 사다가 손질하여 말려두거나 손질하여 냉동시켜 두었다가
아이스박스에 담아 추석때 시골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추석 전날이 할아버지 제사이다보니
장손 며느리인 집사람은 결혼후부터 유방암으로 입원해있던 작년을 빼고는 줄곧 매년
도맡아서 하곤 했다. 매년 추석때 집으로 내려갈 때는 내 차는 제수용품으로 가득 차곤
했으며 덕분에 할아버지 제사상과 추석 차례상은 항상 풍성했다.

이렇듯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하던 집사람은 병이 들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게 될
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후에는 나를 많이 훈련시켰던 것 같다. 그동안 집사람이 집안
모든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는 그저 운전하고 짐을 나르는 역할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시장 가자고 하면 차를 운전하고, 사놓은 물건 나르고, 물건 고르는 것과
가격 흥정하는 것은 모두 집사람 몫이었다. 시장에서도, 할인점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집사람은 가격 흥정을 잘해 가격을 많이 깍아서 나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보내곤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큰 금액을 후려쳐서 결국 서로 양보하는 선에서 가격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나는 아무리해도 부르는 물건값에서 단돈 몇천원도 깎지를 못해 그냥 달라는대로
주거나 겨우 덤이나 하나 얻어오는데 집사람은 예전에 완구가게를 운영해본 경험으로
흥정을 잘했다. 상인들은 흥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장사하세요?" 하고 묻곤 헸는데
그때마다 집사람은 미소를 띄며 "네, 조그만 가게를요..." 말하면 상인들은 "어쩐지..." 라며
다음에는 꼭 자기 가게를 단골로 삼으라고 기분좋게 덤까지 얹어주곤 했다. 이렇게 단골로
삼은 거래처를 회사 직원들이나 친구 등 여러사람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유방암판정을 받은 이후  집사람은 나에게 이것저것 주문하며 일을 시키며 결과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은행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면 송금수수료가 적게 든다고 미리 은행에
신청하여 만들어두고 사용하라고 하고 가족과 친척들 생일과 제사날, 은행 입금계좌,
연락처(집, 회사. 핸드폰)을 깨알같이 적어서 알려주었다. 수산시장에 가서는 생선을
고를 때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느 때 가야 싸게 사는지도 알려 주었다. 이마트나
하나로마트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맛있는 과일이나, 신선한 야채 고르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우유나 식품도 유통일자를 보도록 하고 대충 골랐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꼭 깊숙히 속에 있는 것과 비교해보고 하루라도 유통일자가 길고 이왕이면 덤이
붙은 것으로 골라 사도록 했다. 평소 옥션으로 싸게 사먹던 과일농장이나 옥수수집
연락처, 입금계좌도 모두 깨알같이 적어 남겨놓고 갔다.

쌍둥이자식들 옷도 항상 계절이 닥치기 전에 미리 사두곤 했다. 여름옷은 겨울에, 겨울 옷은
여름에 세일할 때 사면 싸다고 집으로 오는 전단지의 세일행사를 꼼꼼히 살피곤 했다.
혼자서 세 자식을 키우며 홀로서기를 했던 지난 10개월을 생각해보니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집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곤 했다.

집사람없이 처음 맞이하는 올 추석은 남은 자식 셋을 데리고 시골을 내려가야 한다.
항상 집사람이 타던 조수석은 생전 그토록 예뻐했던 막내 재윤이 자리가 되었다. 그 먼
귀성길 집사람은 과자며 음료, 과일을 미리 준비해서 내가 배고프거나 심심치않게 먹으며
내려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가 내 간식거리를 챙겨줄꺼나?

항상 집사람이 손수 준비해서 차렸던 할아버지 제사상과 추석 차례상인데, 이제는
거꾸로 본인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그 상을 받아야 한다니 인생사가
어찌 이다지도 얄궂은지....

아마도 먼저 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께 많은 이쁨을 받고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고 간 집사람의 부탁대로 나도 위축되지 않고
삶을 열심히 살리라 다짐해 본다. 나의 열정의 이면에는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집사람의
삶의 흔적이 많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김승훈 200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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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요즘 삼성전자의 사회공헌노력과 조업원들에 대한 과감한 복지투자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해 불법비자금 파동으로 단단히 홍역을 치른 후 변화된 모습니다.

지난 2월 사회에 양속한 8,000억원의 사회환원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회장의 막내딸 윤형씨가 보유했던 삼성 계열사 지분과 이 회장 및 이 회장의 장남 재용씨의
삼성전자 지분 등을 삼성이건희장학재단에 이전했다고 밝힘으로서 정리가 끝났음을 알렸습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기사는 다름아닌 삼성전자 화성사업소 '삼성어린이집" 개소식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임직원들의 자녀보육문제 해소를 위해 연차적으로 삼성전자 주요 사업장에
보육시설 건립을 추진중인데 이번에 경기도 화성사업장에 ‘삼성어린이집’을 개원하였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6개월간 68억원을 들여 지은 ‘삼성어린이집’은 대지면적 1,300여평,
건축면적 540여평, 지상 3층 규모로서 16개의 보육실, 양호실, 식당, 놀이터 등을 갖췄고
300명의 아동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은 “임직원들의 가정복지 증진과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며
“향후 지속적인 보육시설 확충과 관리를 통해 임직원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는데
삼성이 일류회사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지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3년간 늦둥이 쌍둥이자식들을 회사 보육시설에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고 회사에 대해 너무 고맙게 생각합니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친구가 쌍둥이들을 2003년 취학전 1년간 유치원에서 가르치면서 쌍둥이들을
지켜본 뒤 "쌍둥이들이 정말 밝게 자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회사 보육시설은 소수 인원을 보육교사가 체계적으로 하나하나 관리를 하니,
(보육교사 1명이 10명을 관리함) 자녀들 교육과 생활에 정성이 깃들 수 밖에 없고
부모 또한 마음놓고 업무에 전념할 수가 있습니다.
최근 저출산과 맞물려 가장 시급한 기업복지시설이 바로 회사내 보육시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기업들도 양적인 성장에서, 질적인 성장으로 변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조에는 종업원들이 일과 가정 사이에서 원만히 공존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기업복지정책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비둘기 암컷은 수컷한테 그렇게 헌신적이래. 그런데 일찍 죽는단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었는데 주기만 하니까 허기 때문에 속병이 든 거지.
사람도 그래. 내가 주는 만큼 사실은 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 한쪽에서 계속 받기만 하는 건 상대를 죽이는 짓이야."

'은희경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 있는 글이다..

며칠전 장모님이 쌍둥이녀석들을 챙겨주면서 엄마와 아빠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빠들은 별 생각없이 애들이 잠자는 모습을 보며 잘 자는구나 하며
그냥 잠자리에 들지만, 엄마들은 애들이 낮에 밖에서 놀다가 혹시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는지, 모기에 물리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애들 몸을 살펴보고 필요하면
약도 발라준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단순하다보니 직장이라는 한가지 일에 집중하게
되고 자녀들 일이나 가정사에는 관심이 덜하고 세심하지 못하다. 모두 주부들
몫이다. 그렇지만 주부들은 하루종일 열심히 일을 하고서도 퇴근후 집에 돌아온
남편들로부터 좋은 소리나 따뜻한 말도 듣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맞벌이부부 생활을
하였기에 애들 숙제며, 집안 청소를 많이 도와준다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도 별수없는
남자였기에 편함과 권위의식에 익숙해 살았고 집사람에게 더 잘 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자책감과 후회감이 든다.

가정은 부부가 같이 꾸려나가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내의 일방적인 몫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남편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아내들에게 무관심하고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아내이고 서로 좋아서 배우자로 선택했는데
왜 처음 만나 교제하고, 청혼할 때, 신혼일 때의 그 사랑했던 마음을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직장이나 사회에서 보는 젊은이들과 비교하는 마음에서일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않은 사실은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밖에서 늘씬한 몸매나 근육질을 과시하는 그들도
언제가 나이가 들면 지금의 배우자처럼 몸무게도 늘어 펑퍼짐하게 변하고, 얼굴도
세파에 찌들어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도 희어지고 빠진다. 어쩌면 지금의 배우자의
모습은 힘들게 살아온 자신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 고마움을 잊고 산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마워할지 모르고 막 대하고 때로는 상처를 준다.
처음 배우자를 만났을 때 예쁘고 청순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한푼이라도 절약하느라 몸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놀러 가고 싶은 데도 참으며 이제껏 살아온 사람이다.
배우자가 있었기에 그동안 마음편히 직장생활도 하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오늘은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보자.
"당신 때문에 우리 가족이 그동안 너무나 행복했소.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오!
그리고 사랑하오!"라고...

김승훈 2007.8.22.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무실 직원이 장인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오늘 식사를 하면서 불현듯 내뱉는 말이 내 폐부를 찌른다.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장인어른을 보고 있으니 지난 시절에 맏사위로서
잘못한 일과 서운하게 해드린 일만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평소 잘 다투셨습니다. 장모님은 다투시면 항상 저희 집으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잠시후에 장인어른이 꼭 오십니다. 그럴 적마다
장인어른에게 서운하게 해드린 일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직 정정하게 활동하실 예순일곱의 연세인데 약 한달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폐암수술을 하였으나 수술후 경과가 좋지않아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주 금요일부터 뇌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아내와의 사랑과 만남이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백년해로까지는
갈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18년 7개월도 채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막을 내릴 줄 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생전에 집사람 고집에는 늘상 지고 살았는데,
눈을 부릅뜨기라도 하거나 언성이 높아지려고하면 그냥 꼬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집안 청소며 화장실 청소, 이부자리 펴고 개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쌍둥이자식들 숙제봐주기 등 심부름이나 청소는 알아서 척척 해주며 살았는데
막상 너무도 일찍 내 곁을 훌쩍 떠나고 나니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이내 후회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알았으면
더 기쁘게 해줄껄!
하자고 했던일 다 들어주고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줄껄!
내몸이 부서저라 일해서 금전적인 고통을 덜어줄껄!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은 모두 내탓이다.
아내를 먼저 보낸 것은 모두 내탓이다.
이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아내와의 사랑을 어이하랴!

2008.1.28.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울제2교육관에서
당신의 졸업증서를 받아와
이제야 당신 영정 앞에 바칩니다.

당신이 생전에 그토록 받고자 했던 대학졸업장!
풍족하지 못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을 포기할 수 없어
1981년도에 진학한 한국방송통신대학!
영광의 대학 졸업장을 받는데
무려 26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지난 1978년 고등학교를 졸업후 아르바이트로 취직하여
그대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마지막이자 평생 직장이 되어버린
KBS에서도 사람이 만든 성차별과 학력차별 때문에
수없이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온 당신입니다.

학점을 모두 받고서도
결혼과 큰 애 출산 때문에,
직장에서 나와 놀고있던 오빠 완구가게 마련해주고 운영하느라,
지난 1990년 개봉동 물난리때 가게가 침수되어
모든 희망을 잃고 이사하고,
1997년에는 쌍둥이자식을 낳고 키우느라
이 땅의 뭇 여인네들 처럼
당신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라
기한내에 졸업시험을 치르지 못해
제적처리가 되었고
졸업을 포기해야 했지요.
그리고 내가 신경을 쓸까봐
여지껏 나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애를 태운 당신입니다.

그러나 학점을 모두 이수하였으나
졸업시험만 치르지 못한 수료생들의 사정을
딱히 여긴 교육당국의 배려로 졸업논문으로 대체되어
다시 졸업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병 중인 지난해 3월에 듣고
당신은 이제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들떠서 나에게 전화를 주었지요.

작년 5월 유방암 말기 투병 중인
아픈 몸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졸업논문을 만들었습니다.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되어
10일 간격으로 지독한 항암제를 맞아가며
떨리는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쳐내려 갔습니다.
밀려드는 통증은 진통제를 먹어가며
암세포가 시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눈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논문작성에 매달렸지요.
한페이지를 작성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암세포도 당신의 뜨거운 열정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결코 희망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당신이었습니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런지...

작년 8월, 드디어 졸업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기뻐 눈물을 흘리며
"내가 졸업식 때까지 살 수 있을까?"하기에
나는 단호히 말했지요.
"그럼! 어떻게 받게되는 졸업장인데
당연히 살아서 당당하게 받아야지!"

그렇게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을 불사르며 고생한 노력으로 취득한
대학 졸업증서를 주인공인 당신 대신
오늘에야 제가 받아 당신 영정 앞에 바칩니다.

학위번호 : 방송대2006학056xx 최혜숙

김승훈

2007.4.5.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내가 자주 가는 국악카페를 들렀다가 카페를 들렀다가 구음시나위에 발길이 머물렀다.
소리에 박병천, 대금에 박환영, 아쟁은 이태백님이다.

박병천님은 지난달 11월 20일 타계하였으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비록 박병천님은 갔지만 그분이 남긴 많은 작품은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 이시간에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박병천님은 중요무형문화제 진도씻김굿의 굿음악 예능보유자였다. 박병천님의 소리에
대해서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박병천님은 시골 외갓집 마을 출신으로 어릴적 시골 마을에서 죽은 사람의 혼백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할 때 자주 뵈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오고가지 말아라. 이시간도 다 늙는다'
'엊그저께 곱던 얼굴, 오늘보니 다 늙었네'
'엊그저께 검던 머리, 이제보니 다 희어졌네. 세월아~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애절한 대금과 아쟁소리와 함께 박병천님의 恨을 토해해는 구음소리가 어울려 내 가슴
속을 파고 들며 마치 온 몸을 헤집는 것처럼 한 여인을 향한 사모와 그리움, 아쉬움의
마음을 다시 요동치게 한다.

꼬부랑 할아버지와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백년을 해로하자고 약속했던 여인!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나와 세 자식, 그것도 눈에 밟혀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잘 부탁한다던 어린 쌍둥이 자식을 나에게 덩그러니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훌쩍 가버린 여인!

젊은 나를 첫눈에 단박에 나를 사로잡게 만들었던 맑고 고운 눈과, 목소리를 가졌던 여인!
가냘픈 여인의 몸에서 발산된다고 믿기에도 어려운 넘치는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삶을
후회없이 살다 간 여인!
가진 사랑을 가족에게 300프로 진하게 쏟고 갔던 내가 사랑했던 아내였던 여인!

내 곁을 떠난지 1년 하고도 한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아직도 부르면 대답하며 곧장 내 곁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직장이 같아 다른 부부들보다 붙어있는 시간이 두배로 많아서 였던가,
집에서도 보고, 직장에서도 보고,  출퇴근도 항상 함께 하며 오손도손 함께 사는 모습을
하늘이 시샘해서였던가....
2007.12.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당신이 하늘나라로 가기전에 같이 근무했던 부서원 박상섭부장과
윤경인씨가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여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 당신 상 중에 너무 도움을 많이 주어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건만 시간이 없다고 차일피일 미루다 1년 하고도 20일이 지난
어제야 겨우 마련된 자리여서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나갔습니다.

여의도 별관 뒤에 가서 식사를 마치고 인근 커피숍에 가서 담소를 나누는데,
봉투를 하나 내밀더이다. 작년 당신 발인할 때 같이 참석했던 부서 동료들
네명(박상섭, 윤경인, 신석용, 신승원)이 남겨진 쌍둥이들을 보고 쌍둥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자고 뜻을 모아 1주기때 전해주자고 그동안 1년간
통장에 넣어둔 돈이라며 나에게 봉투를 하나 내밀더이다.

식사도 내가 계산하려는데 했는데 극구 말려 내지 못했지, 커피값도
윤경인씨가 얼른 치렀지 결국 입만 달고 다닌 셈이어서 바늘방석인데
봉투까지 받으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더이다. 아마 당신이 있었다면
계산서를 빼았어서라도 계산했을텐데...

당신이 회사를 떠났는데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또
봉투까지 받으니 당신의 그림자가 이토록 컸고 짙은 줄 미처
몰랐었습니다. 박상섭부장이 빚정리는 대충 되었느냐고, 용기 잃지
말고 잘 살라고 하며 쌍둥이자식들 안부도 묻기에 잘 자라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봉투 속에는 네명의 직원 이름과 함께
1,020,219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보통 직원들 경조사 때에도 5만원을 하기가 부담스러운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선뜻 내놓은 당신이 근무했던 부서의 동료들이
눈물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부서 일이나, 체육행사, 직원들 애경사에
팔 걷어부치고 앞장서서 일하던 당신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고,
당신하고 일 할 때가 정말 좋았고 그립다고 하더이다.

당신의 육신은 비록 나를 떠났지만 당신이 뿌린 열정과 사랑의 씨앗은
아직도 1년이 지났는데도 내 가슴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나와 우리 자식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2007.12.6.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호수공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산  대하마트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트 앞에는 장두감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장두감은 대봉이라고도 합니다.
장두감을 보자마자 사랑했던 아내가 생각납니다.

매년 늦가을이면 당신은 순천이 시골집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장두감 두박스와 단감 두박스를 주문하곤 했지요.
내가 과일 중에 유독 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겨울내내 두고 익으면 하나씩 꺼내 먹으라고
결혼하면서부터 작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을 줄곧
장두감을 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장인 내가 잘 먹고 건강해야 한다고
한사코 말리는 데도 당신의 황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에 먹는 대봉감은 정말 달고 맛있습니다.
함께 먹자고 해도, 당신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사코 마다했지요. 같이 먹으면 줄어드니 나에게만
주려는 그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중 유방암투병하면서 그제야 대봉감을 받아먹는
당신을 보며 지난 18년 동안 우겨서라도 지금처럼
당신과 함께 먹지 못한 나를 많이도 자책했습니다.

작년에는 당신이 생각나서 대봉감을 일체 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트 앞을 지나오면서 당신 생각이 나서
대봉감 한박스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에게 주지 못했던 장두감을 이제는 익으면 우리
쌍둥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들,
당신에게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을
큰애, 쌍둥이자식 세자식들에게 쏟아 주렵니다.
2007.1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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