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사랑하는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습니다.
발인하는 13일 월요일 아침 6시 40분,
하늘도 우리 가족의 아픔을 느낀듯
거짓말처럼 10분간 비가 내리며 대지를 적셨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 23일 저와 결혼하여
꼬박 18년 6개월 18일을 같이했던 제 생애 최고의 길벗이자
제 인생 여정의 멋진 반려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규, 명, 윤을 저에게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훌훌 먼저 떠나갔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집안에서는 장손며느리로서,
세 아이의 어미로서,
직장(KBS)에서는 사원으로서,
KBS노동조합에서는 여성중앙위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바쁜 삶을 살다 갔습니다.
눈을 감기 3일 전만해도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 명, 윤이가 눈에 밟혀
1년만 더 살아서 쌍둥이자식들을 키워놀고 가고 싶다고
어미로서의 간절한 애정도 보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이 너무 많았기에
하늘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불러 데려간 것으로
혼자 위안삼는 것으로 아픔을 달래봅니다.
삶은 투쟁입니다.
2005년 5월 8일,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유방암 말기와 6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고도 흔들리지 않고
그동안 암과 당당히 싸워 삶을 1년 더 연장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장학생이 아니면
대학을 진학할 수 없었기에 대학 진학에 실패 후
1978년 6월 KBS 시청료 징수부서에 일당 아르바이트요원으로 들어가
일용직을 거쳐 업무직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정규직으로까지 신분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직장에서는 비일반직 여성 사원들의 대모로서
초대 여성협회 부회장으로서,
비일반직 사원들의 모임체인 지원협회의 간부로,
노동조합 대의원과 여성중앙위원까지 맡으며
어렵고 힘든 비일반직, 여성사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국립암센터에서 유방암 투병 중에서도
유방암을 앓고 있는 병상 환자들에게
유방암에 관한 자료와 새로운 신약 개발 정보를 검색하여
출력, 복사해 나누어주며 용기를 잃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자고
그러면 신약이 개발되어 모두 살아날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시 간호사나 의사에게 찍히면 불이익을 받는다며
불편함도 그대로 감수하며 생활하는 환자들을 대신하여
'환자는 고객이다'며 불편 부당함은 과감히 따지기도 하며
고충과 애로사항은 개선을 건의하는 등 환자들의 가려운 곳을
곧잘 대변함으로써 병동 내무반장, 환자 대표라는 닉네임도 얻었습니다.
아내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평소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약속 장소에도 정한 시간보다 항상 미리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현재의 인력 구조조정 시대를 미리 예견하였던지
1993년 2월 당시 미원 기획실 관리과장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보다 고용이 안정된 현재의 직장으로 전직할 것을
권유한 것도 아내였습니다.
평소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
향후에는 지식사회가 도래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앞으로는 공부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1997년 저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흔쾌히 학비를 마련해 주었던 아내였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는 미리 수산물시장이며 농협을 들러
틈틈히 과일이며 생선을 구입하여 미리 보내주거나
가지고 내려가 시골에서는 별 준비없이도 명절이나 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큰애 동규를 가졌을 때 군소리없이 만삭의 몸으로
셋째 동생 일구의 대학입시 뒷바라지며,
입시원서까지 사다주며 대학을 합격시켰습니다.
네 시동생 모두를 두루 챙기는 큰 형수이기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스스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겼습니다.
일을 사랑하고 삶을 소중히 생각했고
주어진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자 했던 점은
저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둘도 없는 동지였습니다.
그런 선이 굵었던 아내였기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고나니
아내의 빈자리가 더 커보입니다.
당신이 했던 일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 부부는 수년전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해두었습니다.
장기를 기증하려고 해도,
암에 걸려 더 이상 기증할 장기가 아무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아내였습니다.
가족과 자식들에게 짐이되기 싫다며
화장한 후 뿌려달라는 처음 유언을 설득하여
자식들이 어리니 저식들이 모두 결혼할 때까지만
청아공원에 안치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아내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청아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소서....
2006.11.14.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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