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사의 급여일이다. 아파트 월세며, 법원 개인회생금액, 집사람이 남겨놓은 빚을
입금하다보면 급여만으로는 부족해 항상 마이너스이다. 그래서 제2, 제3의 소득원을
만들지 않으면 나는 생활 자체가 어렵다. 남겨진 세 자식과 연로하신 장모님을 내가
책임져야 하기에 하루 하루가 나에게는 진검승부의 나날이고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터에
나서는 심정이다.

다음은 링크나우 내책쓰기클럽에서 알게된 지식노마드 김중현대표가 내책쓰기 클럽에
올린 글 중 일부이다.

' 책을 쓰는 사람은 내용부터 쓰고 컨셉과 제목을 다듬지만 독자가 책을 고를 때는
껍데기부터 보고 마음에 들어야 안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그러니 컨셉이 중요하고
그것을 잘 표현하는 제목이 중요합니다. 제가 국내 저자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은 이
컨셉이 기술적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저자분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하고
사람들과 나눈 얘기 속에 시장에서 통할 만한 컨셉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거꾸로 해서 시장에서 통할 만한 컨셉을 찾아서 거꾸로 맞춤 주문을 하면 글이 완성도
있게 나오기 어렵고 엉성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저자가 가진
핵심적인 컨텐트가 무엇인지를 찾는 작업부터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시장에서 가장
잘 통할만한게 무엇인지 필터링을 하는 순서를 거쳐 기획 아이디어를 정하고 글의 구성을
짭니다.'
 
내가 쓰는 글의 컨셉은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집사람이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에게 여러가지 해결방안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현실도피적인 방법 말고 시시각각 조여오는 압박 속에서도 현재 위치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집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고, 집사람 사후 법원에 상속포기신청을 하여 인가를
받았지만 직장에서 얼굴을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동료들과 주변 친척들에게 상속포기
인가서류를 들이밀며 매정하게 갚을 수 없다고 그들을 등지고 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남겨진 부채는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고 그래도 부부였기에 도의적으로 내가 힘 닿는데까지
매달 얼마씩이라도 해결해주고 싶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살면서 지켜온 삶의 원칙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일을 함으로써 매달 조금씩이지만 금전적인 부채와 심리적인 부채가
점점 줄어들어가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산다. 집사람 생전 부탁대로 집사람과 이혼하고
집사람이 떠난 세상 함께 죽음, 파산신청을 하고 낙향 등 쉽고도 현실도피적인 방법도
있었지만 나는 그냥 당당히 현실과 맞서며 헤쳐나가고 싶었다. 창피함? 그것은 잠시이다.

집사람을 데려갔고 남겨진 것은 온통 빚 투성이고 가진 재물도 없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아직도 건강한 몸뚱아리와 버틸 수 있는 보루인 안정된 직장, 내가 그동안 그토록 고생하여
쌓은 지식과 실무경험이라는 무형의 큰 자산이 있었기에 희망을 품고 도전해 볼만 했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재기하는 성공신화를 꼭 쓰고 싶다. 인생의 중년 후반기에서
맞이한 불행, 추운 겨울 바람막이 하나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에 알몸으로 내몰린 상황이지만
조금만 버티면 봄이 오리라, 내 인생 반드시 그리고 다시 화려하게 꽃피우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을 품으니 내 몸에서 열정이 생기고, 이 일 저 일을 찿아
도전하게 된다. 내 글이 삶에 지치고, 삶을 포기하고 싶고, 꿈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고 싶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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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근로자의날,
오늘은 석가탄신일이자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다음주 화요일은 어린이날...

월요일만 하루 휴가를 내면 무려 5일의 황금연휴가 이어집니다.
회사의 콘도는 이미 두달전에 신청마감이 되었습니다.

쌍둥이들은 5월 4일도 징검다리로 쉰다고 합니다.
어제 장모님께서 어디 야외로 안가나 하는 눈치십니다.
어저는 한소망교회 비전채플 건축을 위한 1일금식릴레이기도가 있어
하룻동안(정확히는 4월 30일 밤 9시부터 5월 2일 새벽 5시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음식먹는 즐거움이 정말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저는 이번 연휴에 '사내근로복지기금 운용실무(신고 및 보고사항)' 책자를 탈고하려고
어제부터 열심히 작업중입니다. 3년전부터 생각을 했으나 준비가 부족하고 또 충분히
검증을 거쳐 발간해야겠다는 마음에서 계속 다음으로 미루어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 지난 3년간 교육을 진행하며 검증받은 CFO아카데미 교육교재를
중심으로 여기에 실제 실무사례를 더하여 이번에 펴내려고 합니다.

사내근로복지기금 신고 및 보고와 관련된 각종 서식에 작성사례를 겸하니 실무자들은
쉽게 실무에서 적용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금식기도를 하는 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원고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휴가 저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사내근로복지기금
관련 세가지 책(사내근로복지기금 운영실무, 사내근로복지기금 진단, 사내근로복지기금
회계실무) 을 펴내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런 소중한 휴식기간이 주어져 마치 이번 연휴가
나에게 원고작업을 하도록 예비해준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지난 금요일 KBS 1TV '반갑습니다 선배님'에서 팬션디자이너 이상봉님이 송곡고등학교
후배들을 향해 교실 칠판에 붙인 도화지를 향해 마음껏 달걀을 던지도록 하면서 삶은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개성을 표현하며, 추억을 남기고,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기 위해 꿈을 디자인하고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가슴에 간직한 열정을 하나하나 도전이라는 실행으로 옮겨 펼쳐나가려 합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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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한소망교회 주일예배에서 류영모목사님이 설교하신 내용이 지난주에 이어 창세기 22장이었고.
그리고 저녁예배때 설교주제가 문제의 창세기 제23장이었다.

창세기 제23장은 구원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내용이다.
결혼에 대한 정의를 연극배우에게 물었더니 '희극과 비극이 섞인 시나리오다"라고 했고,
역시 같은 질문을 군인에게 하니 '30년 장미전쟁이다'라고 했고,
일기예보관에게 물의니 '고요한 밤에 폭풍우가 쳤다 개였다, 다시 폭풍우가 치다 안개가 끼는
예측불가능한 전선'이라고 했으며, 사업가에게 물으니 '가장 위험한 투자이다'리고 했다고 한다.
참 결혼을 직업에 맞게 기막히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 제2절에서는 '몹시 슬퍼했고 애통해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아브라함과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많이 보고 살았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80년에서 90년을 아브라함과 함께 산 것으로 나온다.
자신에게 아들이 없어 몸종에게서 이스마엘을 보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이방인의 남자 품에 던지는 아내에게는 지울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못난 남편을
섬기고 살았다. 늙그막에 낳은 자식 이삭도 번제의 제물로 바치하는 말씀에 남편인 아브라함이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번제의 제물로 데리고 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수많은 여인들 중 사라만이 누린 햇수(수명)와 죽어서 묻힌 곳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2절처럼 아브라함은 몹시 슬퍼했고, 애통해하다가 제3절에서는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약속의 땅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믿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를 탈피하여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과 자손이 묻힐 약속의 땅을 만들기 위해 그냥 주겠다는
가나안 헤브론 족속의 땅을 거액을 주고 구입함으로써 스스로 약속의 땅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울면 안된다고 자라면서 수없이 교육받아 왔다. 나도 집사람 상중에 슬픔을
꾸욱 참고 견디어 왔다. 무엇보다 애들에게 기둥인 아빠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고, 슬픔에 안주하여 넋을 놓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다급했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들으며 그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만나서 행복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가슴 벅찬 환희에 들떠 기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주어진 좋은 인연의 끈을
계속 잇지 못했던 아픔과 좌절을 겪었지만 그 자리에서 계속 주저앉아 슬퍼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집사람이 나에게 부탁한 일과 함께 못다 이룬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 눈물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 열정으로 채우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불태운다.

김승훈,  200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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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열정만 있다면 나이 들어서도 그 열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연극 무대에
도전하게 됐다"
 
"53세의 나이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연습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개그맨 김형곤 형이라는 사실이 특히 부담스러웠다"
 
"나처럼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열정이 있고, 두려움만 떨칠 수
있다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개그맨 故 김형곤 친형 김형준씨가 53세에 연극배우에 도전했다. 김형준씨는 현재
대학로 라이프씨어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수요일의 연인들'에서 주인공 존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연극배우로 변신하기 전, 김형준씨는 국내 굴지 대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1월 삼성전자를 퇴직하고, 연극 무대에 도전하며 1월 11일부터
정식으로 '수요일의 연극들' 무대에 올라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  뉴스앤뉴스 2009.2.4 보도자료 중에서...
 
53세의 나이로, 더구나 우리나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선망하는 국내 최고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임원(상무)으로 일하다 180도 다른 삶인 연극배우로 도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고 열정이
있다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천적은 미칠 정도로 좋아함과 열정이다.
 
제1의 인생이 가장으로써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교육시키고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인 책임과 의무로 보낸 삶이었다면 제2의 인생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이 시대 가장 행복한 사람들' 대열에 끼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고 꿈꾸는 진정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2009.2.4.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일의 값어치를 따지지 않고 찾아서 하는 성실함, 고객뿐 아니라 주변 직원에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친화력이 고비마다 빛을 발한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기회라도 그게 내 앞에 왔을 때 어떻게 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적성 운운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어떤 때는 '이런 걸 하라고 엄마가 공부시키지는 않았는데'라는 자괴감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외부 고객 못지않게 내부 직원과의 융화가 중요하더라”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누가 뭘 시키더라도 ‘4년제 대학까지 나와놓고는 내가 고작 이런
아르바이트나 해서야 되겠어’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항상 성심성의껏 일하는 자세가 오늘을 있게 한 것 같다”

최근 경제위기로 취업길이 막혀 고통받는 후배들에게
"‘힘들다’고 말하기에 앞서 ‘너 스스로 그만큼 노력했는가’를 먼저 질책하라"
“후배들은 물론 나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낄 때 항상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며
“아무리 어려워도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결국 길이 열리게 돼 있다”고 조언한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하나은행 월곡지점에 번듯한 서울의 4년제 여자대학
전산통계학과 졸업반이었지만 경기침체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일단 비정규직
대학 출신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이서원(33·당시 23세)씨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8년 하나은행 본점 차세대 인수지원부 과장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한파로
공채 출신 정규직 은행원들조차 속속 사표를 쓰고 쫓겨나가던 시절에 들어온 아
르바이트생이 계약직·정규직을 거쳐 책임자급(과장)까지 오른 것이다.

아르바이트 신분일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종일 서서 차 심부름하고
설거지하면서 한 달에 쥔 돈은 50만~60만원이 전부. 훨씬 나이가 어린 여상 출신 정규직
행원들 월급의 반의반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만 그저 묵묵히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항상 누구한테나 웃었다. 실적은 물론 고객들로부터 평판도 좋아 비슷한 또래의
4년제 대학 졸업 공채들보다 승진이 더 빨랐다. 고객 만족을 인정받아 받는
‘이달의 우수 행원상’인 별도 아홉 번이나 받았다. 하나은행 6800여 명의 행원 중 별 9개를
받은 사람은 100명도 안 된다.
 .
이 과장은 98년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초과근무를 밥 먹듯이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시급이 나왔지만 늦게까지 일했다.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선배들이
퇴근할 때까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는 일은 더욱
아니었지만 “아무리 아파도 은행에 와서 아팠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99년 4월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금융회사 경력이 최소 2년 이상
필요했지만 지점장이 강력하게 추천해 준 덕분에 이례적으로 1년도 안 돼 기회를 잡았다.
당시 하나은행에선 보람은행과의 합병으로 많은 사람이 명퇴했다. 하지만 이 과장에겐
거꾸로 새롭게 기회가 열린 셈이다.

계약직 창구직원으로 일할 때 이 과장은 ‘푼돈’을 가져오는 고객도 다 기억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고객을 기억하니 예금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를 찾았다.
특별히 상담 기술이 좋지 않아도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밝은 성격과 친화력은 조직생활에서 항상 큰 경쟁력이었다. 그는 계약직 채용
이후 정식 업무교육이나 연수 없이 곧바로 창구에 앉다 보니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은행업무가 끝나고 정산을 하면 늘 계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 언니들이 그를
위해 항상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노하우를 알려줬다.
 
<중앙일보 2008년 12월 11일>

흘린 땀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장애도,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던
일들도 하고자 하는 열정과 도전 앞에서는 길이 열리고 일이 풀리게 된다.
혹독한 IMF구제금융하에서 은행 아르바이트로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참으며 오직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 친화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행원보다 더 일찍 과장
직위에 오른 이서원과장의 입지전적인 성공사례를 보며 아직도 세상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일한만큼 대우받는 공정한 곳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IMF금융위기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는 요즘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공존하며,
어려울수록 위축되지 말고 나도 어려우면 남들도 똑같이 힘들다는 마음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가까운 내부 동료들을 감동시키며 그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그녀의 생존전략과
성실함, 땀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2008.12.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그동안 외설시비로 많은 논란과 시비의 불러 일으켰던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이원호 작가의 강안남자 2,000회를 기념하는 인터뷰가 있었다.
2002년 1월 2일 연재를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7년째이다.

'강안남자' 2,000회를 맞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연재를 시작할 때 솔직히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독자들을
어디로든 끌고갈 자신감은 있었다. 연재하면서 즐거움이라면, 역시 뜨거운
관심이다.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밤 늦게 전화를 걸어 강안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 고위직 관료는 이야기가 조금만 늘어져도 즉각 지적해준다.
이런 관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물론 노무현 정권 당시 소설이 문제가 되고,
모 국회의원이 '강안남자'를 확대한 패널을 흔들며 비난했을 때 내 자신이
비하되는 듯 해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대중작가이다. 대중소설은 찬반 논란을
일으켜야 한다. 이같은 좋은 일과 나쁜 일들로 인해 대중소설가로서의 목표가
달성됐다."

7년을 이어오면서 소재고갈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없었다. 삶은 변화무쌍하고 사람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써달라며 소재를 제공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중심은 나의 경험과
취재다. 여성의 인체 구조를 익히고, 여성의 심리를 알기 위해 여러 책을 섭렵했고,
메모했다. 그 노트만 몇 권에 이른다. 물론 룸살롱이나 카바레 등에 가고, 중국,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소설 속 장소를 방문해 풍물을 익혔다. 또 섹스에 관련해
유명한 사람들을 수소문해 직접 찿아가 취재하기도 했다. 10장 넘게 메모해도 겨우
두줄 인용될 정도다. 취재에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내 작품은  해피 엔드다.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을 말하려 한다. 부질없는 삶이지만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도 또 내일의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그런 희망을
말하고 싶다.

- 문화일보 2008년 8월 13일자  하루 100장 쓰는 '1인 소설공자' 작가 이원호
인터뷰 기사 중에서


강안남자를 읽다보면 어떤 때는 성행위를 묘사하는 대목이 너무 적나라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고 내 자신 스스로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여서 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누구인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터뷰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자신을 대중소설 작가로 당당히 말하는 이원호 작가! 대중소설은 찬반 논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신,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메모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원정 방문하여 풍물을 직접 익히고, 섹스와 관련하여
고수를 수소문하여 찿아가 취재하여 소설에 반영시키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열정과 뚜렷한 목적의식, 그리고 프로기질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작가의 노력으로
강안남자를 읽는 독자들은 대리만족을 느꼈으리라!

"삶은 변화무쌍하고 사람은 다양하다"는 말을 음미하며 앞으로 이원호 작가가
펼칠 무궁한 상상력과 열정과 도전으로 이어나갈 손끝을 기대해 본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2007년 8월 28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 중 사물놀이 50주년을 맞는 김덕수님과의
인터뷰 기사이다.

"5세에 남사당패를 따라 나섰다 한평생 사물놀이판에서 놀았지요. 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전통예술은 여전히 소외받고 있어요. 열심히 하는데도 자꾸 엇비껴나가는
것 같은게 꼭 엇모리장단 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저희보다 클래식 연주자들 출연료가 100배 정도 더 많아요. 우리
것을 지키는데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셈이죠. 1982년 콧대 높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은근히 사물놀이를 무시하더군요. 그래도 사물놀이를
알려야겠다는 욕심에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들이 어렸을때 '우리 아버지는 사물놀이 세계총연맹 총재'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은근히 기뻤어요. 자식이 아비를 알아주니 더 바랄게 있나요?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행복이죠"

"남사당패는 신을 모시는 예인 집단이에요. 나쁜 짓을 하면 안 되고 보신탕도 못 먹게
했어요. 몸조심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쁜 일을 피해가게 됐어요"

"동포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우리 가락과 춤을 아주 좋아해요. 왜냐, 자연의 소리이기
때문이죠. 괭과리, 징, 장구, 북은 각각 천둥번개, 바람, 비, 구름을 상징해요. 그 울림이
아주 독특하고 에너지가 넘쳐요. 세계의 음악교실에서 우리 신명을 교육하는 게 제
꿈입니다."

"사물놀이로 다듬어진 체력이라 연주를 하면서 재충전이 가능하다. 죽는 날까지
공연을 할 것이다"

"한때 제가 돈을 하도 많이 벌어서 집을 금으로 도배한다고 소문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번돈을 나누는 남사당 전통을 따르고 있어요. 그때는 쌀이나 양초,
실도 똑같이 나눴지요. 저도 월급받고 단원들 월급주고 남은 돈은 교육에 쏟아 부어요"

"거참 과거를 왜 감추는지 모르겠어요. 머슴이면 어떻고 無學이면 어떻습니까?
자기 일이 분명하다면 당당할 수 있어요. 그까짓 대학 졸업장이 대수입니까?
그리고 너무 학벌만 중시하는 사회인식도 바뀌어야 해요."

- 매일경제신문 2007.8.28 사물놀이 50주년 맞는 김덕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정한 藝人의 당당함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단국대 요업공학과를 중퇴한 김덕수님은 신명나고 고집스럽게 사물놀이를 밀어붙인
결과 국내 분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가치를 알아주는 전통예술의 대명사가 되었고,
고졸 학력으로 재능만으로 즐비한 박사학위자들을 제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가 되었고 2007년 출간된 일본 음악교과서에 1980년대부터
1990년대를 빛낸 세계 음악가로 소개되었다.

그는 사물놀이로 번 돈도 전통예술에 다시 투자한다. 사물놀이 부여교육원, 영암
남도교육원, 양평 악기공방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끼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일찌기 발견하고 거기에 시간과 열정을 집중 투자하여 승부를 거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간절히 닮고 싶어하는 부분이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님처럼 남이 거들떠보지 않고, 남이 하지 않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몰입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승화시키는 삶! 참으로 멋지고 당당한
삶이 아닌가? 내가 문화재단을 세우고 싶은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전통예술을
지키는 예인들이 자랑스럽게 인정받고 대접받으면서 무대에 서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우리 뿌리를 소중히 계승시키고 발전시키는데 조그만 역할을 하고
싶다.

2008.7.9.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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