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누구나 아픔은 있다.

그 아픔을 승화시켜 성장과 발전으로 이겨내야 한다.

 

오늘 돌아가신 어머니와 쌍둥이 어미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는 나 하나를 낳으신지 2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당시 군복무 중이었고,

아버지에게는 탈영이나 사고를 우려하여 어머니가 사망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며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살면서 외롭고 정말 힘들 때마다 어린 나를 홀로 두고

눈을 감으셨을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겨냈다.

이제 나도 환갑을 훌쩍 지나 뒤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쌍둥이어미를 보내고 남겨진 빚더미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마음 독하게 먹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쌍둥이자식도

지 어미 부탁대로 잘 키웠다. 자식도 다섯으로 늘었다.

 

매번 일산푸른솔공원과 청아공원에 가면 나는 열심히

살고 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리 살거라고 대화한다.

힘들었던 지난 시절도 잘 이겨내고 살아서 지금에 이르니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그때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떠올려지는 여유도 생기더라.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자식 셋과 함께 어머니를 모신 일산푸른솔공원과

아내가 있는 자유로청아공원을 다녀왔다. 자식 셋과 함께

다녀온 것은 지난 8월 이후 두 번째이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추석 때 코로나 통제 때문에 다녀오지

못해 오늘 기일을 앞두고 어제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올해 10월 말에 벌써 세번째 관리비 납부 통지가 왔다.

오늘이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지 벌써 만 15년째 음력기일이다.

성당에 연미사를 올렸다.

 

어제 가서는 자유로청아고원에서 계약자를 나에서 큰아들로

변경했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니 내가

지고 있던 각종 경제적인 부담을 자식들에게 하나 둘씩 

넘기고 있다. 보험료 납부도 그렇고, 이번 납골당 관리비도

그렇고.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점점 경제적인 속박에서

해방되고 있다.

 

실손보험료도 아내의 암투병을 지켜보면서 필요성을 느껴

15년 전에 가입해놓고 여지껏 불입하다 마지막 쌍둥이들 것을

지난 9월에 넘겼다. 막내가 군대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었는데

제대 후 취업을 해서 일을 하다가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을

다니면서 실손보험 덕을 툭툭히 보고 있다. 어제 만나니

아빠가 들어놓은 실손보험이 정말 좋은 거라고, 지금은 들려고

해도 이런 상품이 없다고 고마워한다.

 

계획에도 없던 쌍둥이자식을 97년에 가지면서 지금껏 25년을

그 힘든 시절을 어찌 헤치고 오늘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2005년과 2006년은 아내 암투병, 이후 아내를 보내고 5년을

홀로살이........ 2011년애 재혼. 늘어난 다섯자식들이 성장해가는

모습과 함께 거울에 비친 주름이 깊게 패이고 머리가 빠진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지난 25년을 자식들 모두 잘 키우고 잘 살아왔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 어머님을 모신 일산푸른솔공원과

쌍둥이엄마가 있는 자유로청아공원을 다녀왔다.

사내근로복지기금 결산컨설팅으로 일정이 쫓겨 망설였지만

지난 설날에도 코로나 때문에 다녀오지 못해 자식된 도리이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단가 사철가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생전의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돌아가신 후에 상다리가 휘도록 많은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보다는 살아있을 때

찾아가 한잔 술이라도 대접해 드리는 것이 더 소중한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는 만 59년,

쌍둥이엄마가 간지는 만 15년이다.

무심한 세월은 잘도 흐른다.

 

나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 얼굴조차 모른다.

내가 너무도 힘들 때, 제발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어머니 얼굴을 한 한번만이라도 뵙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어머니 얼굴을 뵙고 싶어 5년 전 수백만원을 들여 심리학

박사에게 심리치료를 받으며 최면까지 해보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다. 그 심리학박사는 내가 너무 기가 쎄다고 얼버무렸다. 

 

내가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잘해드리는 것도,

아내에게 잘해주는 것도 후회를 남기지 싶지 않아서이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릴껄~~~

함께 살 때 아내에게 잘해줄껄~~~

내가 잘 살고, 성공하면, 부자가 되면 그때는 잘해드려야지~

미안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부모와 아내, 자식에게는 평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나중에 미련이나 후회가 없다.

쌍둥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떠날 때 내손을 잡고 했던 말

"나에게 잘해주어 고마워요. 내가 복이 없어 당신같은 사람과

백년해로 못하고 갑니다. 남은 자식 잘 부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살았기에 비록 부부의 연은

죽음으로 끊어졌지만 여한이 없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그 부탁대로 남은 자식 잘 키우고 있다.

 

어머니도 내가 자식으로서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셨더라면 평소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나 사모곡,

아쉬움은  덜 했을텐데..... 

기회조차 주지 않고 너무도 일찍 가신 어머니가 야속하다.

어린 자식을 두고 가신 어머니는 나보다 더하셨겠지.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예전에는 명절에는 길이 멀고 교통이 불편해도 무조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내려가야 하고

성묘도 해야 하고,

명절 음식도 산더미같이 준비해야 했는데

이제는 많이 변했다.

 

핵가족이 되었고, 명절문화가 변해간다.

부모님이 오히려 자식들이 사는 대도시로 역귀성을 하고

송편이나 전, 명절 제수음식은 필요한 분량만 간단하게

시장에서 사서 준비하고

명절에 부모나 친척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대신에

조용히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장묘문화도 매장보다는 납골당에 모시는 경우가 늘고 있고.

 

사람들이 변하면 유행이 되고 더 나아가 트랜드가 되고

문화로 정착이 되어 버린다.

 

나도 이제는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다 큰 자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TV영화를 보며

선정릉도 산책하며 명절을 보내고 있다.

감기도 아직 낫지 않았고......

내일은 일산추모공원과 자유로청아공원을 다녀오려 한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재명이가 수능을 마친 날, 식사를 하면서 오늘 자유로청아공원에 함께 다녀오기로 약속을 했다. 기일 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수능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5일을 미루었다.

 

애들 엄마가 벌써 하늘나라에 간지 9년이 지났다. 부부가 살다가 사별을 한다는 것은 부부 서로에게 너무도 가혹한 벌이다. 더구나 어린 자식이 있을 경우는 더더욱..... 초등학교 2학년에 암 말기 판정, 1년 6개월 투병생활 끝에 쌍둥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에 자꾸 눈에 밟힌다는 쌍둥이들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으니....... 그후 남겨진 빚과 싸우며 어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억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다.

 

납골당 안 모습은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은 나이를 먹은 내 모습과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쌍둥이모습.... 유골함과 유족을 가르는 유리문이 마치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어미를 잃고 두려움에 떠는 세자식을 데리고 흩어지지 않고 여지껏 잘 살았고 초등학교 3학년짜리를 수능까지 보고, 막내는 올해 초에 대학까지 진학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그래도 하지 않았나 위안해 본다.

 

오는 길에 일산에 살면서 자주 갔던 송가네칼국수집에 들러 점심겸저녁 식사를 했다. 송가네갈국수도 오랜만에 가보니 이전을 했다. 하긴 벌써 9년 전이니... 내가 주차한 차를 주차한 사이에 쌍둥이들이 먼저 들어가니 여사장님이 애들을 몰라본다. 식당에 들어선 나를 보고서야 그 어린 쌍둥이들이 이렇게 많이 컸냐고 놀란다. 이어서 "애들 엄마는 안와요?" 묻는데 말문이 턱 막히며 울컥해진다. '하늘나라에 갔어요' 할수도 없고...... 하긴 예전에 일산에 살 때는 다니던 한소망교회 옆이라 우리 가족이 칼국수를 먹으러 자주 오곤 했는데 식당 사장님 눈에는 우리집 사정을 알리도 없으니 엄마가 보이지를 않으니 궁금했겠지.... 칼국수와 만두맛도 여전하다. 나중에는 음료수까지 한병 서비스로 주신다.

 

10년전, 그 당시만 해도 죽도록 힘들었는데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고보니 이제는 미소가 지어지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낸 내 자신에게 오늘은 스스로 칭찬과 격려를 하며 환하게 웃을 정도로 삶에 여유가 생겼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내내,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도 내리던 비가 뚝 그치고 드높은 가을 하늘이 드러났다. 집에서는 장모님이 먼저 하늘나라에 간 딸의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인 나는 고향을 내려가려니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말이 없는 창공은 이 마음을 알려는지...

아내 생전에는 고향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제수음식을 미리 준비하느라 한달전부터 노량진수산시장이며 건어물시장을 발 빠르게 다니며 준비했고, 시골로 출발하기 이틀전에는 과일을 마지막으로 챙겼지. 욕심이 많았던 아내는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음식 절반이상을 미리 챙겨가 올렸지. 매면 추석이면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에게 고생 많았다고, 고맙다고 많이 이쁨을 받고 있겠지...

어제 장모님이 아내가 잠들어있는 자유로 청아공원을 다녀와서 "나는 은경이가 하늘나라에 간지 3년이 안된줄 알았는데 벌써 3년이 지나 4년째가 곧 다가오네"하신다. 손으로 곱아보니 아내가 내 곁을 떠난지 벌써 3년하고도 9개월 10일이 지났구나. 벌써 그렇게 지났구나~ 하긴 아내가 하늘나라에 갈 때 쌍둥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벌써 중학교 1학년이고, 이제는 키가 내 눈높이까지 자랐네... 그 세월을 내 어찌 살았나?

그래도 아내가 자신을 쏙 빼어닮은 쌍둥이아들 윤이를 남겨놓고 가서 윤이를 보면서 윤이를 키우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곱씹으며 위안을 받는다.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이도령과 이별하는 대목에서 "이별없이 살아볼꺼나 했더니, 이별이 왠말이요~~"하며 오열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살아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품고 살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간 사람은 육신의 몸을 가진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가 없으니...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이별, 오늘도 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몸부림을 친다. 지난 90년대 초반 추석때 28시간씩이나 차를 운전하며 내고향 진도를 내려가며 고생했던 추억 때문인지 추석때만 되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진다. 그토록 힘들어하던 빚도 차근차근 갚아나가고 있고, 쌍둥이들도 점차 성장해나가는 모습, 큰애가 이제는 늠름한 군인이 되었고, 내가 책을 출간하는 모습도 내 곁에서 지켜보면 좋았을텐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어린 쌍둥이들을 내게 맡기고 내 곁을 빨리 떠났는고?

내일이면 고향으로 출발한다. 오늘따라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푸르구나~~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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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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