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회사 사무국장님이 '당신, 앞으로는 자꾸 미스최 이야기는 하지마'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국장님 뜻을 잘 압니다. 당신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 지난 23여년간 당신과 너무도 가까웠고 당신이 그토록 좋아했고 흉금을 털어놓고
지냈던 몇사람 안되는 선배님이셨는데 그런 국장님이 이제는 당신을 잊으라고
말하십니다.

국장님 뜻은 잘 압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으니 나더러 더 이상 당신과의
있었던 과거 추억에 머물러 살지 말고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지난 추억을 훌훌
털고 아내의 사별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 갈길을 가라는 뜻이겠지요.
더 나아가서는 재혼을 염두에 두라는 의미겠지요.

그러나 아직은 당신을, 당신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행복했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내 기억속에서 밀어낸다는 것이 힘이 듭니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아름답던
추억을 회상하며 살게 된다는데 우리 가족 좋은 일, 궂은 일,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당신이 생각납니다. 요즘 동규가 애비에게 무슨 섭섭함이 있는지 나에게 다가오지를
않으니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누구에게 이런 가족들 문제를, 답답함과
서운함을 상의해야 할지 마음이 아려옵니다.

늦은 저녁 세미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에는
유난히도 크고 밝은 별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당신의 큰 눈과도 닮았습니다.
첫 만남에서 나를 쑥 빠져들게 했던 눈이었지요. 그 크고 아름다웠던 호수같은
눈은 아직도 나를 당신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찌 해야할지 오늘 저녁 살짝 내 꿈 속에 와서 알려줄 수는 없는지요?
하늘나라에는 병이 없다는데 나에게 다시 올 때는 마지막 헤어질 때 모습이 아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아리따운 모습으로 왔으면 합니다. 그래야 내가 마음이
덜 아플테니까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토요일 옆 동으로 이사를 하고 오늘 출근하기 전에 동사무소(지금은
주민자치센터로 이름이 바뀌어 있음)에 들러 주민등록 전입신고도 하고
주민등록증과 면허증에 바뀐 주소도 기록하고 전세계약서에 확정일자
날인도 받았다.

주민등록 전입신고 기재사항 이름에서 나, 큰애, 쌍둥이자식 이름을 쭈~욱
써내려가는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4년전 전입신고 때와 비교하니
소중한 한사람 아내 이름이 빠져 있다. 4년전에 전입신고를 했을 때는 아내
최혜숙 이름을 내가 직접 썼는데 이번에는 쓸 수가 없었다. 아내 이름을 적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인지 전입신고를 하는 동안 내내 마음이 착잡하고
미안하기만 했다. 꼭 집사람 혼자만 전에 살던 아파트에 남겨두고 나와 세
자식들만 새로 이사가는 집으로 몰래 옮겨가는 것만 같다.

동사무소 행정을 보는 여자분의 낯이 익다. 1년 6개월전 집사람 사망신고를
하러 갔을 때 창구에 앉아 있던 사람이다. 사망신고를 하는데 사망 일시,
사망사유, 사망 장소, 신고자, 사망자와의 관계 등을 쭈욱 적고 벽제
화장장에서 발급받은 화장증명서류를 함께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여자분도 그때 기억이 난 것인지, 내내 머리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기에 나도 필요한 말만 하고 수속을 마치고 얼른 동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가장인 내 밑에 아들만 셋, 게다가 어린 초등학생 쌍둥이까지 있으니 내
사연을 알고 있는 그 여자분이 보기에도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이사하면서 짐을 정리하다보니 1992년에 집사람 방송통신대 동창들 부부들과
함께 가을단풍놀이에 가서 내장산 정상에서 찍은 액자사진이 나왔는데
장모님이 그 사진을 안방에 걸어두지 그러냐고 넌즈시 내 의사를 묻기에
그러겠다고 하고 안방에 걸어두었다. 장모님은 딸자식, 내가 사별한 아내에
대한 마음이 멀어질까봐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이다. 그것이 딸자식, 그것도
한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미의 애끓는 마음이겠지..

하루 하루 참고 살 뿐이지, 내가 어찌 집사람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까지
잊을 수 있으랴! 이렇게 사진을 보면 자꾸 생각나고, 행복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과 유방암 투병생활 중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내 마음이 한없이 저려오고 죄책감이 밀려오는데...

보고싶어도, 생각나도
그저 참고 사는 것을....

2008.6.23.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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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몇시간 후면 정들었던 지금의 아파트에서 단지내 조금 떨어진 옆 동으로
이사를 한다. 지난 2004년 6월 30일 이사하여 만 4년에서 딱 10일 부족한
기간동안 내 삶 가운데서 가장 가슴아팠고 고통스러웠던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굴곡의 삶을 보낸 곳이기에 이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착잡하고 만감이 교차된다.

그 어려움 속에서 세 자식들을 키웠고, '사내근로복지기금 운영실무' 책자 발간,
활발한 강의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희망의 보금자리임과 동시에 결혼하여
지금껏 함께 살았던 내 사랑하는 아내이자 내 인생의 소중했던 길벗, 아니
인생동지가 2005년 5월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기전까지
1년 6개월동안 투병생활을 함께 하던 곳이다. 집안을 둘러보면 아직도 곳곳에
집사람의 손떼와 메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한 체온이 느껴진다. 이름만 부르면 곧 대답할 것 샅고,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아서 하늘나라로 가기전 사용했던 물품 대부분을 아직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꼭 내게 다시 돌아와 다시 그 물건을 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어쩌다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에서 "지금 몇시요? 당신 미쳤소?"
하며 눈을 부릅뜨며 야단을 칠 것만 같다. 안방 서랍을 열면 다이어리에유방암
투병생활을 하면서 쓴 글이며, 약 처방전, 국림암센터 진료비 계산서와 병원
의무기록지 사본, 서울대 유방암센터장 노동영 교수님과 나눈 이메일이며,
항암치료에 좋은 약품, 항암제에 개발에 대한 기사 등을 스크랩한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두가 살기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몸부림을 쳤던 흔적이기에 내 차마 치울 수가 없었다.

집사람 손떼가 묻은 장롱과 차단스도 아직 그대로 있다. 결혼 10주년이었을 때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집사람은 장롱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은데 무슨 장롱이냐고 그 돈으로 먼저 빚부터 갚고 나중에
결혼 20주년이 되면 내가 그때는 꼭 사주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내가
집사람 고집을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집요한 설득 끝에 정 사고 싶으면
사라고 허락을 했을때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니 집사람
말을 들어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결혼 20주년을 1년 5개월 남두고
먼저 하늘나라로 훌쩍 떠나버렸으니 만약 그때 사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면
아마 나는 또 다른 회한을 가슴 한켠에 평생 간직하고 미안함으로 살았을 것이다.
함께 20년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나에게 회한을 남겨주지 않게 하려고
그때 그렇게 사겠다고 고집을 피웠나... 그럴줄 알았으면 내 빚을 내서라도
더 좋은 장롱으로 그냥 기분좋게 살줄껄....

안방 들어가는 문 옆에는 쌍둥이 녀석들 키를 잰 표시가 남아있다. 4년동안
키도 많이자랐고, 체중도 많이 늘었고 고집도 많이 늘었다. 큰애 동규는
고등학교를 졸업후 대학에 진학했고.....

이제 밤 12시가 넘었으니 이사가 8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밤 12시 20분이
넘어가는데도 잠이 오지를 않는다. 집사람과 그동안 이 집에서 웃고, 울며,
부디끼며 살았던 지난 기간들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 이별의 아픔이 나를
잠못들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몇시간 후면 정들었던 이 집을 뒤로 하고 나는 이사를 해야 한다.
지난 과거 아픈 추억과 고통을 훌훌 털고 새로 이사하는 집에서는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피며 살리라! 여기서 겪었던 아픔과 고통, 절망, 후회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 살리라! 새로운 각오로 두 눈 부릅뜨고 새로이 오게 될
희망과 기회의 미래를 준비하며 열심히 노력하며 살리라! 종자돈도 모아 집도
장만하고, 열심히 시간을 아껴 글도 쓰고,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사내근로복지기금 회계실무', '사내근로복지기금 진단' 책자도 집필하고,
'사내근로복지기금 운영실무' 개정판도 올해 안에 내리라! 사랑하는 희망둥이인
세자식도 반듯하게 키워내며 내 미래를 꼭 희망으로 도배질하리라!

슬픔이여 이제는 안녕~~
아픈 추억이여 잘 있거라~~

2008.6.21.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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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한소망교회 주일예배에서 류영모목사님이 설교하신 내용이 지난주에 이어 창세기 22장이었고.
그리고 저녁예배때 설교주제가 문제의 창세기 제23장이었다.

창세기 제23장은 구원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내용이다.
결혼에 대한 정의를 연극배우에게 물었더니 '희극과 비극이 섞인 시나리오다"라고 했고,
역시 같은 질문을 군인에게 하니 '30년 장미전쟁이다'라고 했고,
일기예보관에게 물의니 '고요한 밤에 폭풍우가 쳤다 개였다, 다시 폭풍우가 치다 안개가 끼는
예측불가능한 전선'이라고 했으며, 사업가에게 물으니 '가장 위험한 투자이다'리고 했다고 한다.
참 결혼을 직업에 맞게 기막히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 제2절에서는 '몹시 슬퍼했고 애통해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아브라함과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많이 보고 살았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80년에서 90년을 아브라함과 함께 산 것으로 나온다.
자신에게 아들이 없어 몸종에게서 이스마엘을 보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이방인의 남자 품에 던지는 아내에게는 지울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못난 남편을
섬기고 살았다. 늙그막에 낳은 자식 이삭도 번제의 제물로 바치하는 말씀에 남편인 아브라함이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번제의 제물로 데리고 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아야 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수많은 여인들 중 사라만이 누린 햇수(수명)와 죽어서 묻힌 곳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2절처럼 아브라함은 몹시 슬퍼했고, 애통해하다가 제3절에서는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슬픔에만 젖어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약속의 땅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을 믿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를 탈피하여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과 자손이 묻힐 약속의 땅을 만들기 위해 그냥 주겠다는
가나안 헤브론 족속의 땅을 거액을 주고 구입함으로써 스스로 약속의 땅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울면 안된다고 자라면서 수없이 교육받아 왔다. 나도 집사람 상중에 슬픔을
꾸욱 참고 견디어 왔다. 무엇보다 애들에게 기둥인 아빠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고, 슬픔에 안주하여 넋을 놓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다급했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산적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들으며 그때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
내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만나서 행복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가슴 벅찬 환희에 들떠 기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주어진 좋은 인연의 끈을
계속 잇지 못했던 아픔과 좌절을 겪었지만 그 자리에서 계속 주저앉아 슬퍼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집사람이 나에게 부탁한 일과 함께 못다 이룬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 눈물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 열정으로 채우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불태운다.

김승훈,  2007.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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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당신과 만나 결혼해 살았던 시간이 앞으로 가는 시간이었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었다면,

당신과 헤어진 이후 시간은 거꾸로 가는 시간이고,
당신과의 추억을 지워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내일이면 설명절이 시작됩니다.
당신과 신혼 초에 약속했던 대로
설은 우리집에서 장모님과 함께,
추석은 우리 시골 고향집에서 지내자고
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년 설에도,
이번 설에도 나는 시골을 내려가지 않습니다.

장남에 장손인 내가 시골을 안내려간다고 하니
아버지가 많이 서운해 하셨지만
나는 장모님을 마지막까지 잘 모셔달라는
사랑하는 당신과의 생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떠나면 혼자서 며칠간
집에 계실 장모님을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떠난 그 다음날부터 전화를 하면
빨리 돌아오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장모님을
오래 홀로 집에 계시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설이면 처남이나 처형,
막내이모님들이 모두 우리집에 모여
윷놀이며 고스톱을 치곤 했지요.
당신은 항상 고스톱자금을 빳빳한 신권으로
미리 바꾸어 놓는 용의주도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없으니
이제는 우리집에서 모임도 갖지 못합니다.
다들 바쁘기도 하겠지만
당신같은 강한 카리스마와
흡인력을 가진 사람이 이제는
없음이겠지요.

또 명절 3일을 어찌 보내야 하나?
명절이면 온 처가집 식구들이 모여 함께 놀던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납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내 머릿 속에서 지워질까요?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당신과 다시 만나 사랑의 추억을
다시 쌓을 수 있을까요?

2008.2.5.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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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무실 직원이 장인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어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오늘 식사를 하면서 불현듯 내뱉는 말이 내 폐부를 찌른다.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장인어른을 보고 있으니 지난 시절에 맏사위로서
잘못한 일과 서운하게 해드린 일만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평소 잘 다투셨습니다. 장모님은 다투시면 항상 저희 집으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잠시후에 장인어른이 꼭 오십니다. 그럴 적마다
장인어른에게 서운하게 해드린 일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직 정정하게 활동하실 예순일곱의 연세인데 약 한달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폐암수술을 하였으나 수술후 경과가 좋지않아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주 금요일부터 뇌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아내와의 사랑과 만남이 영원하지는 않더라도 백년해로까지는
갈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18년 7개월도 채되지 않았는데
허무하게 막을 내릴 줄 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생전에 집사람 고집에는 늘상 지고 살았는데,
눈을 부릅뜨기라도 하거나 언성이 높아지려고하면 그냥 꼬리를 내리고 살았는데,
집안 청소며 화장실 청소, 이부자리 펴고 개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쌍둥이자식들 숙제봐주기 등 심부름이나 청소는 알아서 척척 해주며 살았는데
막상 너무도 일찍 내 곁을 훌쩍 떠나고 나니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이내 후회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알았으면
더 기쁘게 해줄껄!
하자고 했던일 다 들어주고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줄껄!
내몸이 부서저라 일해서 금전적인 고통을 덜어줄껄!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은 모두 내탓이다.
아내를 먼저 보낸 것은 모두 내탓이다.
이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아내와의 사랑을 어이하랴!

2008.1.28.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밤 늦게 집사람이 아꼈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은 지방에 근무하는데 직원 몇사람과 술 한잔하는데 집사람 이야기가 나와
생각이 나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누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니
내 목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전화를 했으며 시간이 흐르면 누님이
잊혀질 것 같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생각난다고 울먹인다. "형님! 잘 사십시오!"
하며 전화를 끊는다. 아내가 아꼈던 후배 몇 사람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았던 후배였다.
본인도 나에게 자기가 가장 누님에게 사랑받았던 후배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후배 전화를 받고보니 사랑하는 아니 이제는 사랑했던 아내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주변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두고 갔고 그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두고 갔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도 아닌것 같다. 사람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고 그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고 갔다. 아직도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은 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내는 인맥관리를 하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했고, 한번 내사람이다
생각되면 앞뒤 이해타산 따지지 않고 설사 불이익이 있더라도 끝까지 챙겼다.

지금은 중소기업 사장님으로 계시는 분이 있다.
그분과 사귄 것은 25년전, 한참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고 그분과 친분관계를
쌓으려 많은 사람들이 그분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분과 식사를 하려면 한달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학력문제로 보직을 내놓고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냉소를 보내며,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모두 떠났을 때, 유일하게 집사람
혼자 그분을 지키고 말 상대가 되어 드렸고 매일 책상도 닦아 드렸다. 나중에 다시
명예회복이 되었을 때 다시 몰려든 사람들은 거들떠 보지 않고 가장 먼저 여직원인
집사람부터 찿았다. 집사람이 아프다고 하자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시는 의사에게 직접
전화해서 병실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여 입원조치시키고 진찰받도록 해주고, 입원비도
20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쾌히 내 놓으셨다. 아내가 작년 11월 눈을 감았을 때 가장
애통해 하며 가족을 빼고는 3일 내내 영안실을 지켜주신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들이 그분이 어려움에 처하자 모두 그분 곁을 떠났을 때 당신은 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분명 재기하실 분이다. 나는 그분 능력을 믿는다. 사람은 기쁨은 같이
해 주는 사람보다 어려울 때 함께 해 주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나이는 집사람보다 15살이나 더 연상이었지만 집사람 충고를 받아들여 그 어려운
시기를 숨 죽이며 견디어 냈고 그후 다시 화려하게 재기했고 환갑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사장으로 재직하고 계신다. 그 누구도 그 분이 다시 재기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나
아내는 정확히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을 사귀고, 사귄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만남을 소중히 여겼고 진심으로 대해주었고, 상대의 장점을 인정해준 채워지지 않는
그 빈자리를 아쉬워 한다. 유애리 아나운서가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했던 말
"최혜숙씨는 사람을 남기고 간 것 같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승훈, 2007.3.23.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내가 자주 가는 국악카페를 들렀다가 카페를 들렀다가 구음시나위에 발길이 머물렀다.
소리에 박병천, 대금에 박환영, 아쟁은 이태백님이다.

박병천님은 지난달 11월 20일 타계하였으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비록 박병천님은 갔지만 그분이 남긴 많은 작품은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 이시간에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박병천님은 중요무형문화제 진도씻김굿의 굿음악 예능보유자였다. 박병천님의 소리에
대해서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박병천님은 시골 외갓집 마을 출신으로 어릴적 시골 마을에서 죽은 사람의 혼백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할 때 자주 뵈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오고가지 말아라. 이시간도 다 늙는다'
'엊그저께 곱던 얼굴, 오늘보니 다 늙었네'
'엊그저께 검던 머리, 이제보니 다 희어졌네. 세월아~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애절한 대금과 아쟁소리와 함께 박병천님의 恨을 토해해는 구음소리가 어울려 내 가슴
속을 파고 들며 마치 온 몸을 헤집는 것처럼 한 여인을 향한 사모와 그리움, 아쉬움의
마음을 다시 요동치게 한다.

꼬부랑 할아버지와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백년을 해로하자고 약속했던 여인!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나와 세 자식, 그것도 눈에 밟혀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잘 부탁한다던 어린 쌍둥이 자식을 나에게 덩그러니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훌쩍 가버린 여인!

젊은 나를 첫눈에 단박에 나를 사로잡게 만들었던 맑고 고운 눈과, 목소리를 가졌던 여인!
가냘픈 여인의 몸에서 발산된다고 믿기에도 어려운 넘치는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삶을
후회없이 살다 간 여인!
가진 사랑을 가족에게 300프로 진하게 쏟고 갔던 내가 사랑했던 아내였던 여인!

내 곁을 떠난지 1년 하고도 한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아직도 부르면 대답하며 곧장 내 곁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직장이 같아 다른 부부들보다 붙어있는 시간이 두배로 많아서 였던가,
집에서도 보고, 직장에서도 보고,  출퇴근도 항상 함께 하며 오손도손 함께 사는 모습을
하늘이 시샘해서였던가....
2007.12.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호수공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산  대하마트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트 앞에는 장두감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장두감은 대봉이라고도 합니다.
장두감을 보자마자 사랑했던 아내가 생각납니다.

매년 늦가을이면 당신은 순천이 시골집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장두감 두박스와 단감 두박스를 주문하곤 했지요.
내가 과일 중에 유독 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겨울내내 두고 익으면 하나씩 꺼내 먹으라고
결혼하면서부터 작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을 줄곧
장두감을 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장인 내가 잘 먹고 건강해야 한다고
한사코 말리는 데도 당신의 황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에 먹는 대봉감은 정말 달고 맛있습니다.
함께 먹자고 해도, 당신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사코 마다했지요. 같이 먹으면 줄어드니 나에게만
주려는 그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중 유방암투병하면서 그제야 대봉감을 받아먹는
당신을 보며 지난 18년 동안 우겨서라도 지금처럼
당신과 함께 먹지 못한 나를 많이도 자책했습니다.

작년에는 당신이 생각나서 대봉감을 일체 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트 앞을 지나오면서 당신 생각이 나서
대봉감 한박스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에게 주지 못했던 장두감을 이제는 익으면 우리
쌍둥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들,
당신에게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을
큰애, 쌍둥이자식 세자식들에게 쏟아 주렵니다.
2007.1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11월 10일 사랑하는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습니다.
발인하는 13일 월요일 아침 6시 40분,
하늘도 우리 가족의 아픔을 느낀듯
거짓말처럼 10분간 비가 내리며 대지를 적셨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 23일 저와 결혼하여
꼬박 18년 6개월 18일을 같이했던 제 생애 최고의 길벗이자
제 인생 여정의 멋진 반려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규, 명, 윤을 저에게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훌훌 먼저 떠나갔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집안에서는 장손며느리로서,
세 아이의 어미로서,
직장(KBS)에서는 사원으로서,
KBS노동조합에서는 여성중앙위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바쁜 삶을 살다 갔습니다.

눈을 감기 3일 전만해도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 명, 윤이가 눈에 밟혀
1년만 더 살아서 쌍둥이자식들을 키워놀고 가고 싶다고
어미로서의 간절한 애정도 보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이 너무 많았기에
하늘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불러 데려간 것으로
혼자 위안삼는 것으로 아픔을 달래봅니다.

삶은 투쟁입니다.
2005년 5월 8일,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유방암 말기와 6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고도 흔들리지 않고
그동안 암과 당당히 싸워 삶을 1년 더 연장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장학생이 아니면
대학을 진학할 수 없었기에 대학 진학에 실패 후
1978년 6월 KBS 시청료 징수부서에 일당 아르바이트요원으로 들어가
일용직을 거쳐 업무직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정규직으로까지 신분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직장에서는 비일반직 여성 사원들의 대모로서
초대 여성협회 부회장으로서,
비일반직 사원들의 모임체인 지원협회의 간부로,
노동조합 대의원과 여성중앙위원까지 맡으며
어렵고 힘든 비일반직, 여성사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국립암센터에서 유방암 투병 중에서도
유방암을 앓고 있는 병상 환자들에게
유방암에 관한 자료와 새로운 신약 개발 정보를 검색하여
출력, 복사해 나누어주며 용기를 잃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자고
그러면 신약이 개발되어 모두 살아날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시 간호사나 의사에게 찍히면 불이익을 받는다며
불편함도 그대로 감수하며 생활하는 환자들을 대신하여
'환자는 고객이다'며 불편 부당함은 과감히 따지기도 하며
고충과 애로사항은 개선을 건의하는 등 환자들의 가려운 곳을
곧잘 대변함으로써 병동 내무반장, 환자 대표라는 닉네임도 얻었습니다.

아내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평소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약속 장소에도 정한 시간보다 항상 미리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현재의 인력 구조조정 시대를 미리 예견하였던지
1993년 2월 당시 미원 기획실 관리과장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보다 고용이 안정된 현재의 직장으로 전직할 것을
권유한 것도 아내였습니다.

평소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
향후에는 지식사회가 도래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앞으로는 공부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1997년 저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흔쾌히 학비를 마련해 주었던 아내였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는 미리 수산물시장이며 농협을 들러
틈틈히 과일이며 생선을 구입하여 미리 보내주거나
가지고 내려가 시골에서는 별 준비없이도 명절이나 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큰애 동규를 가졌을 때 군소리없이 만삭의 몸으로
셋째 동생 일구의 대학입시 뒷바라지며,
입시원서까지 사다주며 대학을 합격시켰습니다.
네 시동생 모두를 두루 챙기는 큰 형수이기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스스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겼습니다.
일을 사랑하고 삶을 소중히 생각했고
주어진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자 했던 점은
저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둘도 없는 동지였습니다.

그런 선이 굵었던 아내였기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고나니
아내의 빈자리가 더 커보입니다.

당신이 했던 일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 부부는 수년전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해두었습니다.
장기를 기증하려고 해도,
암에 걸려 더 이상 기증할 장기가 아무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아내였습니다.

가족과 자식들에게 짐이되기 싫다며
화장한 후 뿌려달라는 처음 유언을 설득하여
자식들이 어리니 저식들이 모두 결혼할 때까지만
청아공원에 안치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아내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청아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소서....

2006.11.14.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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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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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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