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루어둔 건강검진을 오늘 받았다. 올 3월, 아버지가 전립선암 수술을 했던 서울성모병원으로 하려다가 결국은 시간에 쫓겨 그동안 계속 건강검진을 해왔던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했다. 우리 쌍둥이들이 1997년 태어난 병원이기도 하다.
 
직장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솔직히 두려움이 앞선다. 2005년 건강하던 아내가 갑작스레 그것도 국립암센터에서 이상이 없다고 한지 두달만에 청천벽력같은 유방암말기 판정을 받고, 1년 6개월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하늘나라로 간 이후, 나마저 아프면 세 자식들을 어찌 해야 하나? 나와  세 자식들에게 큰 병이 생긴다면 어찌 해야 하나?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그동안 해마다 직장건강검진을 통해 신체 각 부위별로 건강검진을 다 해서 올해는 기본항목에서 남은 마지막 선택인 갑상선암검사를 했다. 2005년은 대장암검사, 2006년은 위암검사, 2007년은 복부CT와 뇌암검사를, 2008년은 신장암검사를, 2009년은 전립선암검사를 돌아가며 했는데 다행히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가장 고역인 검사는 위내시경검사이다. 사무실에서 수면내시경으로 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다들 하지 않겠다고 하여 나도 일반내시경을 선택했다. 수면내시경을 하면 마취제성분인 프로포플이 들어있다고 하여(프로포플은 마이클잭슨 사망을 계기로 마약류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왠지 꺼림직하여 그냥 일반내시경으로 했는데 실제 검사는 약 2분정도 걸리지만 미리 목에 마취를 하고 검사를 마치고 나오기까지는 10여분이 걸리는데 이후 몸 마취가 풀리기까지 30분정도는 고역이다. 입안에 마취를 하고나면 목 안이 뻣뻣해지고 침도 삼킬 때 까칠하고 따갑다. 기계가 목을 타고 위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거북함을 참고 있자면 저절로 눈물과 콧물이 주루룩 흘러내린다.

그래도 위에 조그만 염증 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갑상선검사 결과 또한 정상이란다. 복부초음파도 작년과 비교해 아무런 이상도 없고 대신 체중이 특히 복부지방이 많다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지금보다 4킬로그램 정도를 줄이란다. 1킬로그램도 아니고 4킬로그램씩이나~~ 그래도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소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동안 긴장 속에 보냈던 스트레스와 위내시경을 하면서 받았던 고통의 순간을 일순간에 날려보낸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승훈아! 내가 그동안 알아봤는데, 너 쌍둥이들 다 키워놓고 60넘어서 결혼해라!. 요즘 여자들이 착하기만 하는 남자는 싫단다"

자주 만나는 선배님이 작년 가을에 나를 중매해 보겠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너 같은 놈은 착하겠다. 직장 든든하겠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빚도 다 갚을테니...쬐금만 기다려봐라~ 내가 좋은 소식 줄테니...."

그 선배가 2주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실토를 하였다. "세상 여자들 틀리더라~ 전에는 착한 남자 없냐고 채근대더니 막상 이야기를 꺼내니 착한 것은 기본이고, 돈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지, 애가 셋이라니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라. 애들 다 대학 보내놓고 결혼시켜 놓으면 그때나 생각해 보자더라. 너도 천상 60살 이후에나 결혼해야 되겠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제 자리 그대로인데 많은 바람들이 내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나를 흔든다. 조용히 지나가는 바람이 있는가하면 때로는 나를 심하게 흔드는 폭풍우도 있고, 나를 흠뻑 적시는 홍수까지 동반케 한 바람도 있었다. 그들은 외부 현실적인 잣대를 가지고 수없이 나를 잰다. 재산은 얼마나 되나? 연봉은? 아파트는? 학력은? 직장은? 자식은 몇명이고 지금 몇살인가? 성격은? 부모는 살아계시고 무얼 하시는가? 부모 재산은 많은가? 왜 싱글남이 되었나? 등등....

2030때만 결혼 때 스펙이 있는 줄 알았더니 4050 재혼 때는 그보다 몇배나 더 까다로운 스펙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제야 어슴프레 느끼게 된다. 나는 '사랑'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애틋하고, 미안하고, 신뢰와 대화를 생각하며 가슴이 설레곤 했는데 참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올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스쳐지나갔던 메가톤급 폭풍 두개가 나의 이런 순진했던 사랑관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버렸다. 애초부터 큰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물징과 조건으로 재단하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냉정함으로 내 삶을 바라보며 재설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중년(대부분 이혼을 겪었거나 혼기를 놓쳐 4050이 되어버린)들은 이제 더 이상 고생을 하려 들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희생하려 들지도 않는다. 물질적인 풍요와 자신만의 간섭받지 않는 시간을 배려받으려는 요구와 비중이 훨씬 높아져 버렸다. 한마디로 돈 많고,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있어도 대학을 들어갔거나 결혼하여 자녀교육에서 홀가분한 상태, 그러면서도 여자들 일에 간섭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뒷바라지 해줄 수 있는 성격좋은 싱글남을 원하는 것 같다.

60살 이전에는 부담없이 만나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뜻이 맞으면 한 달에 두세번쯤 만나 성적인 부족함을 채워주는 파트너로 지내다 그래도 괜찮으면 60살 이후에나 결혼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요즘 결혼관과 삶의 가치관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고  끔찍하다는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우리집 청소당번은 항상 내 차지이다. 특히 화장실은... 오늘도 늦은 밤, 욕조 위와 내부, 세면대 위가 지저분하여 팔  걷어붙이고 청소를 마쳤다.

큰애도 그렇고, 쌍둥이들도 학교에서는 교실이며 복도, 화장실 청소를 곧잘 하면서도 집에서는 화장실이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대도 손도 까닥하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병원에서 뇌 MRI를 찍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려나?

거실 청소는 간혹 녀석들이 하지만 유독 회장실 청소는 하지 않는다. 화장실에서 조금만 냄새가 나도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고 야단법석을 떠는 녀석들인데, 대체 이유가 뭘까? 한때는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녀석들이 결국은 청소를 하겠지, 그래도 사람인데 화장실에서 냄새가 나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겠지 하며 멸날 며칠을 그냥 두고 지켜 보았지만 하지 않았다. 급기야 내가 먼저 두 손 들고 말았다.

나와 쌍둥이들 치열한 눈치싸움에 지친 장모님께서 먼저 락스로 청소를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녀석들에게 넌즈시 물어보았다.
"명아윤아~ 도대체 너희는 왜 화장실 청소를 않니?"
"화장실은 냄새나고 지저분하잖아요?"
"너희는 안쓰니? 너희도 쓰면서 지저분 하다고 그러니?"
"....."
"그리고 제일 지저분하게 쓰는 사람이 너희들이잖아? 소변을 볼 때 변기에다 흘리는 통에 아빠가 매일 아침에 청소하고 그러잖아?"
"저는 덜 그래요, 윤이가 심하지?"
"나만 그런게아니고 명이형도 그러잖아? 오늘 아침은 안그랬어?"
"으이그~ 좌우지간 너희들 때문에 지저분하니 너희가 더 청소를 잘해야 하는거 아니니?'
"그래도 저희는 싫어요?"
"그럼 누군가가 화장실 청소는 하는데 어떡하지? 지저분하게 그냥 둬?"
"거실이나 방은 청소를 해도 화장실은 못하겠어요"

끙~~ 철없는 자식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는 날이 언제나 올꺼나? 하기는 할까?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금요일 저녁, 고등학교 동창친구를 만났는데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나를 조회하더니 불쑥 한마디 한다.
"너! 참 열심히 사는구나!"
"무슨 소리야?"
"네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니 인터넷에 네가 쓴 글이 쫘악 나오잖아"

허걱~

공무원이 츨장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 스마트폰으로 전자결재를 하는 시스템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여 개인이나 회사를 조회해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영향력을 가지면 곧 브랜드파워를 인정받게 된다.

인터넷에서 영향력을 가지려면 먼저 꾸준한 컨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 조인스 블로그에는 글을 등록하려면 반드시 창작여부를 묻는다. 내가 쓴 글이냐, 기사/스크랩 글인지를 반드시 등록하도록 되어 있다. 저작권 시비가 현실화되는 시점에서 시의적절한 조치로 생각된다. 조인스 블로그에서 짧은 기간 안에 파워블로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지속적으로 내 창작물을 만들어 올렸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블로그를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운영하면 효과가 크다. 자신이 쓸 글을 미리 분야를 정하여 카테고리화시켜 놓고 그 카테고리에서 구체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는 내가 하는 업무에서 사내근로복지기금(국내에서는 최고의 역사와 전문성을 갖추었다)과 기업복지, 열정과도전(자기계발)을 그리고 내 일상에서 싱글대디와 쌍둥이양육일기 등 크게 다섯가지에 집중하고 있다.

블로그 글은 가급적 자신의 일상과 지식, 경험이 어루러지면 좋다. 일상이나 지식, 경험이 그 자체로서는 소재나 내용이 제한적이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일상과 지식, 일상과 경험, 지식과 경험이 융합되면 공통분모가 커지면서 수용층이 넓어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후기정보화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눈에 보이고 또 보고 산다고 한다. 내가 쓰는 이 다섯가지 카테고리 글들은 모두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 내 일상에서 늘 겪는 일이자 부닺치는 일이고 고민하는 일들이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책을 펴 낼 것은 목표로 삼으면 지속성을 유지하고 좋은 컨텐츠를 발굴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전한 가치를 담아 주면 여러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관심층을 많이 만들 수 있다. 관심층과 추종자들이 많으면 글을 쓰는데 또 다른 에너지원이 된다. 내책을 가질 경우 인터넷 검색에서 내 브랜드파워는 크게 상승하게 된다. 책 한권이 경우에 따라서는 블로그 통째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카페지기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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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큰아들이 논산훈련소에 입대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큰애방을 들여다보고,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면서도 큰애방을 둘러보는 것이 내 일과가 되었다. 함께 있을 때는 밤에 늦게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지 않아 답답했고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막상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나니 시원함보다는 허전함이 앞선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다투고 나를 힘들게 했었지만 화해하고 논산훈련소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는 눈물을 감추며 "아빠 사랑해요"하고 울먹이던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찡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수준에 빨리 오르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내고 안달을 했던 내 지난 모습이 생각난다.

못나도 내 자식이고, 잘나도 내자식인 것을.... 큰애가 군입대를 하며 나보고 자신의 방을 쓰라고 했다. 좁은 안방에서 쌍둥이 동생들과 함께 자는 모습이 안타깝고 동생들이 방에 들어와 이것저것 만지는 것이 싫다고.... 나는 그냥 지금처럼 안방에서 동생들과 잠을 자겠다고 했다. 늦둥이 쌍둥이 동생들이 생기는 바람에 큰애를 너무 일찍 떨어뜨려 혼자 자게 했던 것이 큰애를 외롭게 했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느껴 쌍둥이들과는 최대한 함께 지내고 싶었다.

큰애 방에 들어와 있으니 참 낯설다. 큰애는 의무감으로 키운다는데 마치 나와 큰애 사이에 커다란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것도 자신의 방에 다른 가족이 들어오는 것도 싫어했던 큰애의 성격탓에 큰애 방에 자주 들어가지를 않아서 그런 걸까? 자식이라도 자주 대화하고 자주 안아주고 방에도 들락거리고 함께 하는 시간도 많이 가져야 친밀해지는 것 같다.

2007년 대학 1학년때 기숙사에 있느라 1년 떨어져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고된 훈련도 없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거나 가서 만날 수 있었지만 군대는 그런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먹는 것도 까다롭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군대에 잘 적응해 나갈런지 걱정이 된다. 날씨는 연일 34도를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는데 몸 건강히 훈련은 잘 받고 있는지 어느덧 마음 한켠에는 큰애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차지하고 있다.

자식이 집을 나가면 집에 들어와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편히 잠자리에 드는데, 당분간은 큰애방을 들여다보며 큰애의 체취를 맡으며 허전하고 보고싶은 마음을 달래야 할 것 같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큰애와 함께 논산훈련소(연무대) 입소대대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2시 50분, 입소식 시간 1시 30분에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이런 지루함을 배려한 것일까? 일찍 도착한 입소생과 가족친지들을 위한 위문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어 입소식 준비를 위해 연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면을 통해 부대 소개와 5주차 교육 소개가 있었다. 이어 가족간 헤어짐의 의식을 마지작으로 입소생들 연병장으로 집결(이 시간 이후부터는 부대배치, 첫 휴가 때 까지는 당분간 가족과 만나지 못한다)

13: 20 사전 예행연습 실시
- 경례연습(우렁찬 목소리로 충성! 구호)
- 국기에 대한 경례 연습(구호가 없음)
- 반동준비 연습(군가 부를 때 사용)
- 방행전환 연습(좌향좌, 우향우 - 부모 친지에게 인사할때 사용)

13:30 입소식 실시

1. 연대장님께 대한 경례

2. 국기에 대한 경례

3. 애국가 제창 - 1절

4.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5. 연대장님 인사말
- 현 연무대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이름임
- 28연대와 29연대는 1952년 창설
- 비데와 드럼세탁기가 설치된 막사가 준공됨.
- 당부하는 말(자랑스럽다. 여러분 스스로를 격려하자 "oo야 힘내지! 꼭 승리하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연대장님 인사말 중 열중쉬어

군악대 모습

연대장님 인사말

6. 군가 제창(진짜 사나이)

7. 부모님께 경례


8. 연대장님께 경례(입소식 끝)

환송나온 부모 친지, 애인, 친구들을 향해 마지막 열병 실시



이렇게 입소식은 끝났다. 입소생들은 이제 격리된 훈련시설로 집결하여 관물을 지급받게 된다.
연병장에서 이동하여 바로 옆 관물을 수령받기 위해 집결한 모습. 이 모습이 논산훈련소에서 입소생들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예전 우리가 군 입대시 살벌한 분위기와는 달리 요즘은 입소식도 부드러웠고, 훈련소 내부 시설도 훌륭했으며 교관과 조교들도 많이 친절해지고 밝은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5주간 기본교육 잘 마치고, 군생활 잘 하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국군 화이팅!!!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큰애가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다. 오늘이 초복날, 일산에서 출발하여 논산훈련소까지 가는 길은 찜통 그 자체였다. 차 에어컨을 틀어도 더위에 별로 시원하지도 않다. 차도 작년에 중고차를 인수했는데 장거리를 다녀올 때마다 고장이나  일으키지 않을지 조마조마하다.

일산에서 오전 8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사전에 네이버에서 지도를 보고 갈 행로를 잡았다. 집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IC에서 당진상주고속도로 - 공주IC에서 천안논산고속도로 - 논산IC에서 빠져나와 동안대로 - 동산교차로를 타면 거리는 편도 약 220.36킬로미터가 나온다.

가는 도중 큰애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며,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평소 나에게 거리감을 두고 지내던 녀석인데 군입대를 하려니 속에 덤고 있던 이런 얘기 저런 얘기도 많이 드러낸다. 처형(큰애의 이모)에데 전화가 걸려와서 통화를 하는 도중 어젯밤에 엄마 꿈을 꾸었다고 한다. 통화를 마치고 물었다.

"어제 엄마 꿈을 꾸었니?"
"네"
"엄마가 뭐라고 하든"
"엄마가 유방암이 완치되셨다고 하셨어요"
"...... 엄마가 네가 다 커서 군입대를 하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보고 많이 흐믓해 하시겠다"

논산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려고 갈비집에 들어가 갈비를 시키려고 하자 냉면을 먹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고기라도 먹여서 보내야 애비가 마음이 편하지 않겠니?" 해도 막무가내이다. 내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 녀석인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나 보다. 다른 입소생들은 다들 아빠와 엄마, 동생이나 여자친구들이랑 왔는데 나는 애비 혼자이다. 큰애가 커서 이렇게 입대하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아내가 지켜보고 있겠지.

입소식을 하기 위해 정해진 소지품(현금 3만원 이내, 주민등록증, 입영통지서)을 제외한 나머지를 맡기고 헤어지려 할 때 현금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고 하자 8000원이 있단다. 3만원을 채워주려 하자 돈을 쓸 일이 없다고 애비의 마지막 호의도 거절해 버린다. 평소 워낙 근검절약하는 애라 돈을 허튼데 쓰지 않은데, 그래도 애비가 쥐어주는 3만원이라도 받으면 돌아오는 애비 마음이 덜 답답할텐데....

집에서 함께 생활을 할 때는 밤 늦게까지 잠도 자지 않고, 아침이면 일어나지 못하고 비실비실대는 모습을 보고 속이 상해 빨리 군입대라도 했으면 했는데 막상 삼복 더위 때문에 훈련받으며 고생할 큰애를 생각하니 마음이 쨘하다. 나는 지금보다 더 혹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고 군생활도 하며 살았건만 그래도 자식을 고생스런 자리로 보내놓으니 안쓰럽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이별행사를 하라는 사회자의 말에 큰애를 꼬옥 껴안고 말했다.
"사랑한다.규야! 네 뒤에는 쌍둥이들과 가족이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제대해라"
"네, 할머니를 잘 부탁드려요"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 : "윤아! 할머니 방에서 바느질상자 좀 가져오너라"
재윤 : "바느질 하시게요"
나 : "응, 어제 보니 시장바구니 손잡이가 너덜너덜하더구나"

곁에서 바느질 하는 걸 지켜보던 막내 재윤이 왈~
재윤 : "어쩜 아빠는 바느질 실력이 이렇게 좋으세요"
나 : "응, 아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빠 옷이나 양말이 떨어지면 아빠가 직접 바느질을 해서 기워입곤 했지"
재윤 : "아빠 바느질 실력은 뛰어나세요"
나 : "아빠 바느질 솜씨는 네 엄마도 인정했는걸. 아빠에게 이런 달란트가 있어 가족들을 위해 쓰게되니 아주 행복하구나~"

어제 농협하나로마트를 다녀오다보니 시장바구니 손잡이가 너덜너덜하는 걸 보고 오늘 생각이 나서 배란다에서 기우고 있었더니 쌍둥이자식들이 옆에 와서 내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결혼후, 내가 바느질을 할 줄 안다고 하니 아내가 믿지를 않았다. 그래서 잠시 실력발휘를 했더니 자기보다 바느질 솜씨가 더 낫다며 그 다음부터는 옷이 떨어지거나 자식들 신발주머니나 가방끈이 떨어지면 기우는 것은 모두 내 차지가 되어 버렸다.

손재주는 타고 나는 걸까?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살았다. 손으로 만드는 것도 칭찬을 들었고, 글씨도 잘 쓴 덕분에 학교 선생님을 대신하여 수업시간 칠판 판서는 내 몫이었다. 서예도 대학 1학년 말에 처음으로 배웠는데 당시 서예학원 원장님이 초보자인데도 예사 실력이 아니라고 계속 배우라고 꼬셨지만 딱 3개월 배우고 그만두었다.

1979년 12월, 9월초부터 4개월간 가정교사를 해서 받은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으로 내 2학년 1학기 대학 학비를 남겨놓고 남은 돈으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웅변, 서예, 합기도 학원에 딱 3개월 다녔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느질을 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섬세해진다. 그저 길 따라 한 올, 한 올 집중하여 순서대로 해야 한다. 글을 쓰고 자립심을 키우며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홀로 살아야 했던 자취생활, 군생활, 아내와의 사별, 자식 셋을 키우고 사는 싱글대디의 삶을 아시고 나에게 이런 달란트를 미리 주신 걸까???

그래 옷, 신발주머니 뿐만 아니라 마음 속 상처나 외로움도 다 나에게 가져와라, 이 애비가 흔적도 없이 다 꿰매줄테니...^^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하나

"이리 와서 누워봐요. 내가 머드팩 해줄께"
"남자 무슨 머드팩??? 싫어"

"내가 오이팩 해줄까?"
"에이, 나 시간없어~~"

오늘 거울을 보니
거울 속 내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머리카락 또한 부쩍 희어지고 많이 빠진 것 같다,
'아내가 머드팩, 오이팩 해준다고 할 때 그때가 행복했지'


# 두~울

하루 네번씩, 1회에 덱사라는 진통제를 7개씩 복용한다.
한끼 식사랑보다 더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으며
하루 하루를 버틴다.

깊은 밤, 병상 옆에서 쪽 잠을 자는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시도하다가 나에게 들킨다.
그러면 나는 막 나무란다.
"화장실 가려면 나를 깨우라고 했잖아~~
그러다 넘어지면 다리 부러진단말야.
항암제를 맞느라 가득이나 약한 다리인데~~"

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퇴근후 국립암센터 유방암 병동으로 달려가
병실에 누워있는 아내 곁에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며,
그날 집과 학교에서 쌍둥이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긴장을 풀지 못하고 쪽잠을 자던 그때가 행복했지'


# 세~엣

하루종일 우울한 병실에 누워있을 아내를 생각하서
기분전환을 시켜주기 위해 강의 때 써먹던
유머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6인실 병실 안이 잠시나마 웃음이 넘쳐났다.
내가 퇴근하고 가면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 없는냐고
병실내 환자들이 은근히 기대를 했다.
대부분 아줌들이라 찐~한 Y담을 더 좋아했다.

지금은 모두들 퇴근하고 텅빈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아 밀린 업무를 하고 있다.
이제는 혼자라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병상에 있던 아내를 위해 매일 인터넷을 뒤지며
유머를 찿던 그때가 행복했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월요일, 모 사내근로복지기금 실무자와 조합측 관계자들과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다. 그 회사의 13년간 숙원사업이었던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을 단 8일만에 마치고,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에 도움을 주어 감사의 의미로 마련된 자리였다.

요즘에는 가급적 술약속을 하지 않는다. 내 나이 50을 넘다보니 이제 나에게는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가야할 시간이 더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소중하고 물릴 수 없는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낼 궁리를 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내근로복지기금 실무자들과의 자리는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석을 하는 편이다. 실무에서 일하는 사내근로복지기금 실무자들의 생생한 현장경험과 애로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등 우군이 되어주어야 기금실무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만족도가 높아지고 기금제도에 애정을 갖게 되고 기금제도의 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식사장소는 일식집, 내 돈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날도 소폭에 폭탄주를 겯들여 한참을 마신 것 같다. 우라나라 술 문화는 섞는 문화이다. 술도 맥주와 소주, 양주 등 몇가지 술을 섞어야 하고, 술잔도 서로 돌려야 한다. 노조관계자와 술을 마시면 그 날은 각오를 하고 나가야 한다.

밤 9시 45분, 1차로 자리를 마치고 여의도백화점을 빠져나와 일산행 버스를 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올라탄다. 쌍둥이들이 기말고사가 끝났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니 애비가 자식들 얼굴은 보고 재워야지.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그것도 폭탄주를 대여섯잔을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온다. 술도 자주 마셔야 느는데, 마시지를 않으니 요즘은 한두잔에도 곧 취기가 올라온다. 돈이 없으면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법, 주머니 사정이 허락되면 택시를 타고 빨리 귀가하고 싶었지만 요즘은 최악이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지. 영등포역에서 내려 일산행 870번 좌석버스에 몸을 싣는다. 영등포역에서 순환하는 곳이니 자리는 넉넉하다. 당산역까지 가면서 버스안은 승객들로 꽉 찬다.

당산역을 마지막으로 버스는 고양시까지는 논스톱이다. 고양시에 들어서자마자 이제는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행주산성 입구, 화원 앞을 지나 능곡 기차역과 능곡초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이 버스도 어쩜 우리네 삶의 모습과 똑같을까?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집착, 욕망, 꿈 등을 하나 둘씩 내려놓기 시작한다. 젊었을 때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던 혈기도, 기개도, 꿈도 시간이 지나면서 버거움과 포기로 이어진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괴리감을 깨닫고 현실에 적응해 가면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운이 따르지 않았노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포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내 옆자리에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자던 청년도 목화연립 앞에 이르자 벌떡 일어나 내린다. 그리도 곤히 자던 청년이 자기 내릴 정류장 앞에서는 정확히 깨서 내리는 그 의지가 너무 신기하다~ 삼화연립 앞에서는 경의선 열차 통과때문에 한참을 서 있다. 그렇지 삶에서도 내 의지는 반하여 기다리고 뜻을 접어야 할 때가 있었지. 아무리 살아보려고 발버둥쳐도 일이 풀리지 않고, 아내를 살려보려고, 효능좋은 항암제를 써보고 싶어도 이미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 돈을 구할 수가 없어 가슴을 치던 때가 있었지.

삼성당과 섬말다리, 신주택입구, 화훼단지는 내리는 승객이 없어 그냥 통과한다. 어느새 일산병원...일산병원 맨 윗층에는 생을 마감하는 말기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아내도 2006년 10월 31일부터 11월 10일까지 그 곳에 입원하여 이 세상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눈을 감기 5일전까지도 재활을 꿈꾸며 재활시설을 둘러보았었지...나처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지녔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유방암말기 판정을 받고서도 포기라는 단어를 비웃으며 눈을 감기 3일전까지도 희망을 품고 살았던 당찬 여인이었다. 그런 열정과 도전이라는 공통점이 우리를 부부로 엮어주었겠지.

일산병원부터는 출입구가 붐빈다. 내가 내리는 마두1동사무소에서 한 무리의 승객이 내리고 나니 이제 버스 안 좌석은 3분의 2가 비어 있다. 버스는 남은 승객마저도 모두 내려주고 차고지로 들어가 나처럼 내일을 기약하며 하루의 고단한 삶을 마치겠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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