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생전에는 아내는 처갓집의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처갓집 제사도 모셨고,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살았고 처갓쪽 가족모임은 모두 우리집에서 했다. 명절이면 처남이나 처형, 처 이모와 이모부, 심지어는 처의 이종언니부부(처 큰이모 큰딸)도 우리 집으로 모여 명절을 보내곤 했다.

자연히 우리집 행사에도 다들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이사때면 처남이나 동서와 처형도 우리집에 와서 짐도 날라주고 전기배선이나 현관보조키 달기 등을 해주곤 했다. 특히 손위 동서는 엘리베이터 회사에도 근무하였고 지금도 엘리베이터 관련 벤처기업에서 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기나 전기배선 쪽은 기술과 경험이 많아 우리집 전기관련 문제의 해결사였다.

그러다보니 아내는 집안에 수리할 사항이나 고칠 사항이 생기면 나보다는 형부(나에게는 손위동서)를 찿았고 내 차지까지는 기회가 오지를 않았다. 아니 나에게 전기나 배선 일은 아예 미덥다고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하며 살아온지 23년째... 이래뵈도 내 어릴 적에는 내가 손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집안의 손이 가는 잔일이나 수리는 내게 부탁하여 내가 곧잘 해결해주곤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내 손재주는 바느질만 빼고는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그렇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집에 이사 등 큰 일이 있을때마다 다들 와서 도움을 주는 편한 생활이 익숙하고 이를 즐기고 살았는지 모른다.

내 바느질 솜씨는 여자인 아내도 인정을 했다. 하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을 마칠때까지 자취생활과 군생활(비록 장교였지만)을 합하면 13년 6개월을 객지생활을 하고 살았으니 바느질이며 취사, 반찬을 만드는 일, 요리, 집안 수리나 전기기구의 간단한 수리 등 어지간한 문제는 스스로 자급자족을 해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도 이 세상에 없고 지금도 장모님은 내가 모시고 있지만 처갓집 가장 역할은 막내처남이 수년전부터 제사를 모시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넘어갔고 명절에도 모임은 처남집에서 하고 있다. 이번 집 이사를 하면서 현관입구 번호키를 기존에 달려있던 키를 그대로 쓰려고 했더니 장모님이 글씨가 작고 눈에 익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석을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기능이 없어 불편하다고 반대하시며 이전 아파트에서 쓰던 키로 바꾸어달라고 하신다. 손윗동서가 달아보려고 저녁 늦게 와서 2시간이나 시도를 했지만 장비도 부족하고(특히 현관 철문에 구멍을 뚫어 번호키 본체를 고정시키는 일) 시간에 쫓겨 금요일 밤 11시에 미완성의 상태로 두고 월요일에 와서 고쳐주겠다고 하고 가버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홀로서기를 해야겠구나!' 마음을 먹고 있던 차였던지라 철물점에 들러 구멍을 뚫는 드릴 바이트날을 구입해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30분만에 조립을 완료했더니 장모님이나 쌍둥이자식들이 놀라는 표정이다. "자네도 이런 일을 다 할 줄 아는가? 고맙네", "아빠! 아빠가 이걸 하셨다. 와~ 우리 아빠 대단하시다" 내친 김에 거실에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못을 박아 시계도 달고, 가족사진 액자도 달고, 내 공부하는 식탁 위 전등도 이전 전등으로 교체하고... 그동안 숨겨놓은 내 실력을 발휘했더나 가족들이 모두 놀란다.

'짜식들~ 이 아빠를 뭘로 보고.... 아빠도 한번 하면 한다는 사람이란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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