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8월,

일산으로 이사간 후 휴일이면 늘 집에서 호수공원까지 걷곤 했다.

운동 겸 휴식, 그리고 아픔을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18년, 그동안 쌍둥이자식들이 태어나고,

먼저 간 아내의 유방암 말기판정과 투병생활,

그리고 사별,

쌍둥이들의 게임중독....

한 남자로서 감내하기 힘든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하얀 눈은 세상의 더러움을 덮는다.

하얀 눈은 세상의 아픔을 덮는다.

하얀 눈은 사람의 고통마저 덮어준다.

 

눈오는 추운 겨울날에도

휴일이면 두툼한 겨울파카를 입고

목도리에 장갑,

모자에 마스크까지 무장하고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추위에 호수 수면이 얼고

그 위에 하얀 눈이 내려 덮히면

드넓은 호수면이 하얀 평원처럼 펼쳐진다.

마치 다른 나라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작년 3월에 재혼과 함께

일산을 떠나왔다.

겨울이면 보고 싶었던 추억의

눈덮인 호수공원을 어제 다시 보았다.

눈 덮힌 호수공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세월이 간다. 하얀 눈 속으로 쌓여서 세월이 간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하나

13년전 오늘인 1997년 11월 10일은 우리 쌍둥이자식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쌍둥이를 임신했던 탓에 출퇴근은 항상 자가용으로 내가 모시고 출퇴근을 했다. 11월 10일날도 출산예정일이 2주가 남아있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며 언제 출산휴가를 내야 될지 날짜를 꼽고 있었다. 그때는 출산휴가가 지금처럼 길지가 않았기에 미리 휴가를 내놓으면 하릴없이 집에서 애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날짜를 까먹기 때문이었다. 진짜 어미의 손길이 필요한 건 애들이 세상에 나온 이후이니까...

일산에서 출발하여 올림픽대로를 들어서 양화대교 밑을 지나는데 아내는 하혈을 한다고 조짐이 이상하다고 곧장 병원으로 가자고 하여 직장으로 출근하는 길에 곧바로 여의도성모명원으로 직행하여 입원을 시켰다. 담당 의사가 당시 이름이 있는 김수평박사였는데 양수막이 터졌다며 쌍둥이인지라 조금만 늦었어도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할 뻔했다고 하셨다.

아내는 자연분만을 고집했다. 당시 아내 나이 39살, 큰애가 89년 2월생이니 늦둥이에 쌍둥이를 양수막이 터진 상태에서 자연분만을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아침 8시 30분에 입원하여 애들을 낳은 시간은 저녁 6시를 넘어 어수룩할 때였으니 그동안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고, 내 속은 얼마나 탔는지.... 형인 재명이는 2.75킬로 호흡이 약하여 나오자마자 곧장 인큐베이터로 들어가고, 동생인 재윤이는 3.25킬로로 건강했다. 낳을때부터 0.5킬로그램 차이가 난 몸무게는 이제는 3킬로나 차이가 난다.

이렇게 힘들게 쌍둥이들은 낳고 나서, 일주일만에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분유값과 기저귀값은 배로 뛰고..... 나와 아내는 이마트에 가서 번갈아가며 50개들이 기저귀를 사나르던(당시는 환율이 급등하여 한사람 앞에 기저귀는 하나씩 밖에 팔지를 않았다) 일이 생각난다.


# 둘

4년전 2006년 11월 10일은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 날이다. 공교롭게도 하늘나라로 간 날도 쌍둥이들이 태어난 날이자, 태어난 시간과 비슷한 저녁 7시 부근이었다.

2005년 5월초에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1년 6개월간 암투병에 힘들어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매일 링거 몇개씩을 몸에 꼽고 살았다. 아내는 평소 혈관이 잘 보이지를 않았는데 항암제를 맞고부터는 그나마 가느다란 혈관마저 살 속으로 숨어버려 초보인 간호사들은 몇번이나 찔렀다 뺐다는 반복하여 간호원들이 주사기를 새로 꼽는 시간을 제일 끔찍하게 생각했다. 식사량보다 더 많은 항암제에 진통제를 먹어가며 고생하는 것을 보니 회복에 대한 가능성이 없다면 이제는 놓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빚 걱정없는, 항암제를 맞지 않아도 되는 하늘나라로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나와 아내의 이생에서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1987년 8월 22일날에 만나, 8개월간의 뜨거운 연애 끝에 88년 4월 23일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딸이었음에도 친정집을 부양하며 힘든 삶을 살았다. 국립암센터 노정실 유방암센터장님도 "최혜숙씨는 이대로 하늘나라로 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다"라고 아쉬워 할 정도로 참 예쁘고 똑똑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산 여인이었고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뛰어난, 나에게는 정말 과분하고 아까운 여인이었다. 아마 하늘나라에서도 큰 직분을 맡아 정신없이 바쁘겠지...

세월 참 빠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되돌아보니 추석에 고향을 가지 않은지가 꽤 오래 되었다. 결혼 후 아내와의 약속(설은 우리집에서 장모님과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보내고, 추석은 시골에서 보내고)에 따라 아내가 유방암판정을 받기 전인 2004년까지는 추석명절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고향을 다녀왔는데 2005년과 2006년은 아내 투병생활로 국립암센터에서 보냈고, 2008년과 2009년은 아내 제사상 사건으로 내려가질 않았다.

사실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뵈면 상처하고 혼자 사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만 같고 2007년 제사상 사건으로 장모님이 그래도 아내는 남편이 차려주는 차례상이 최고라고 그냥 집에서 추석차례를 지내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바람에 2008년부터 연 2년 주저 앉았다.

아내 제사상 사건은 2007년 추석에 일어났던 한바탕의 헤프님이었다. 할아버지 기일이 추석이다보니 우리집은 추석차례상과 할아버지 제사상이 겸해서 준비한다. 할아버지 제사상이 주가 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부님과 증조모님, 거기에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밥까지 올려지다보니 아내 제사밥을 차릴 공간이 없어 아버지께서(사실 아버지는 며느리 제사밥까지 제사상에 올리면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다) 사전에 둘째 동생에게 아내(큰형수) 제사상을 부탁하셨고, 이를 모르는 어머니가 둘째 작은어머니에게 큰며느리가 신경이 쓰인다고 하자 아내 생전에 사이좋게 지냈던 둘째 숙모께서는 그럼 우리가 쌍둥이엄마 제사밥을 올리겠다고 나섰다.

나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아내 제사밥을 차린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추석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작은아버지 집에를 다녀왔다가 아버지께서 동생집에서도 제사밥을 차렸다고 다녀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면서도 아침 일찍 내가 오기를 기다렸을 제수씨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이후 시골을 다녀와서 조용히 넘어갔던 이 헤프닝이 한참 뒤에 장모님과 어머님이 통화하면서 큰며느리 제사밥을 시댁이 아닌 동생집과 작은아버지 집에서 이중으로 차리게 해서 미안했다고 이실직고를 해버리는 바람에 장모님께서 발끈하셔서 "그래도 장손며느리였는데 시댁 제사상에 오르지도 못하는 그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앞으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내딸 은경이(집에서 부르던 아내 이름) 제사밥은 내가 직접 차릴테니 자네도 명절에 시골 내려갈 생각은 하지 말게"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내가 중간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제사밥을 올려야 할 대상이 많은 우리집인지라 연로하신 장모님 화가 풀리실 동안은 그냥 장모님 의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올해 3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전림선암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하시는 동안 큰아들인 내가 아버지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고, 자주 찿아뵙지도 못해 죄송하여 이번에는 우리집에서 추석명절을 보낼 수 없었다. 마침 시골을 편하게 다녀오라는 하늘의 뜻이었는지 회사 게시판에 9월 21일 아침 7시 20분발 용산-목포 KTX 표가 딱 한장이 나와 편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고향에 가면 내 형편은 모르는 친척들은 다들 '왜 재혼을 하지 않느냐?', '언제 재혼할거냐?', '사귀는 사람은 있느냐?' 재혼을 채근하고 독촉할텐데 내려가도 마음은 편치 않을 것 같다. 또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이번주 로또 1등 당첨자가 한명이란다. 당첨금액만 무려 105억874만9800원이다. 지난주에도 당첨자가 한명으로 혼자서 103억7399만7900원으로 독식했는데..... 로또 추첨번호는 6개, 이 추첨 번호 6개를 모두 맞힐 확률은 814만5060분의 1이니 하늘의 도움 내지는 조상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숫자조합이다.

나에게 로또는 희망이다. 지금은 힘들어도 로또에 당첨되면 인생이 역전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산다. 매주 혹은 2주 단위로 로또를 사는데 많이도 아닌 딱 두게임 2000원씩만 산다. 굳이 2를 고집하는 것은 쌍둥이들 때문이다.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인 늦둥이 쌍둥이들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부담이 있다. 늦둥이에다 하나도 아닌 두녀석을 잘 키워야 할텐데, 내가 운 좋게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다면 녀석들은 그때 대학 3학년이다. 한참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에 나는 퇴직을 해야 하니 그 노후 대책을 지금 해놓아야 한다. 또 우리 가족들이 편히 발을 뻗고 잠을 잘 집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사는 집은 월세부담이 커서 살기에 벅차다. 지금이야 고정적인 급여수입이 있다지만 퇴직 이후에 대비해 우리 가족이 거주할 수 최소한의 주거공간은 한시 바삐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절박감을 로또가 유혹한다.

아내는 생전에 로또를 즐겨 사곤 했다. 빚에 시달릴 때, 유방암 투병을 할 때도 한가닥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로또를 즐겨 샀지만 당첨도 잘 되지 않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 액수를 많이 줄여나갔다. 유방암 투병중이던 2005년과 2006년 회생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나에게 자기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면 빚도 갚고 집도 사고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도록 꿈에 나타나 로또 번호를 알려줄테니 잠을 잘 때 꼭 머리맡에 메모장을 두고 자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로또를 사놓고서는 거의 맞추어 보지를 않는다. 로또 당첨기한은 6개월인데(이 기한을 하반기에는 1년으로 연장하려고 법개정을 서두르고 있단다) 두달전에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보니 서랍안에 그동안에 사서 모아둔 로또용지가 수북히 쌓여있다. 심지어는 9개월전에 산 로또가 있어 그냥 찢어버렸다. 죽은 자식 머시기 만진다고 지급기한이 넘긴 로또가 당첨된 것을 알면 오히려 내 속만 상할 것 아닌가?

나는 로또를 환상이 아닌 희망을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싱글대디로 혼자 벌어서 살려니 힘들어도 일주일만 더 참자, 혹시 로또에 당첨될지 모르니 극단적인 선택은 피하고 보자 하며 참고 시간을 끈다. 그러면 일주일전 나를 힘들게 하던 문제도 어느새 풀려져 있곤 한다. 로또에 투자하는 돈은 1년이면 52주 곱하기 2000원이면 104,000원, 내 형편에 적지 않은 돈이지만 대신 극단적인 선택과 절망, 포기를 대신한 소멸성 보험금으로 치부해버리며 즐겁게 산다.
만약에 로또가 당첨되면 어디에 쓸까? 딴마음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 십일조부터 바치고 빚도 갚고, 서재가 딸린 집도 장만하고, 대학원도 진학하고, 장모님도 집 한칸 마련해드리고, 아버지께서 전립선암 방사선치료 중이신데 치료에만 전념하도록 병원비도 듬뿍 쥐어드리고, 시골 집도 새로 지어드리고... 상상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잠시나마 행복해진다. 그리고 로또가 아니면  내 힘으로 열심히 돈 벌어서 그렇게 해드리면 되지 하며 분발하게 된다.

이것이 로또가 가진 순기능이 아닐까?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때론 살면서 나 때문에 고생하시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함을 잊고 살곤 한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에 닥쳐보아야
그제야 머리를 숙이고 겸손해지는 아주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그러나 마음은 있지만 현실을 핑계대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산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 함께 고생한 배우자, 마음은 있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를 꺼리고 머뭇거린다. 사정이 좋았을 때도 그런데 요즘같이 힘들고
지갑까지 가벼워진 시기에는 더더욱 실천으로 옮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제는 장모님께 회사 매장에서 건강신발을 팔기에 눈 딱 감고 56,000원을 들여 구입해서
선물로 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신다. 1988년 결혼하고부터 지금껏 22년째 함께 모시고
사는데 큰애며 쌍둥이들 키우고 뒷바라지, 아내의 유방암투병시 뒷바라지 등 우리집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은경이가 살아있을 때 이런 편하고 좋은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네가 사주네...고맙네"
 
이마도 집사람이 생전에 장모님께 신고 다니기에 편한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모양이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사주겠다고, 해주겠다고 한 유리한 약속은
잘 잊지 않는다. 내가 해주어야 하는 불리한 일은 잘 잊어버리는 반면 내가 받아야
하는 유리한 일은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치수도 딱 맞고 마음에 쏙 드는 신발을 보니
몹시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집사람과의 그런 약속이 있었던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사드릴껄...하는 미안함이 앞선다.
집사람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내가 대신 지켰으니, 아마도 집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장모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내 발길을 신발 파는 매장으로
가도록 했나 보다. 살다보면 이렇게 몇푼 들지 않은 일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
56,000원 내가 덜 쓰면 되지... 택시를 탈 것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탈 것 걸어다니면 되고,
우리 식구 한끼 외식을 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정말 가정의 행복은 거창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주변에서 얼마든지 찿을 수
있고 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내 의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실천의 문제이고
행동의 문제이다. 그저 눈 딱 감고 실천으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이것 저것 재기
시작하면 하기 어려운 법! 내가 먼저 양보하고, 다가가는 것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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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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