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을 모시고 일산칼국수를 갔다. 최소한 월 2회 닭칼국수를 드시지 못하면 병이 난다고 하실 정도로 닭칼국수 애호가이시다. 장모님은 음식솜씨가 좋으신데 원래 음식솜씨가 좋은 사람은 남이 해준 음식은 잘 안 먹는다. 내 형편이 어려워 자주 외식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 식구가 어쩌다 외식을 할 때마다 장모님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느라 음식점 선정에 애를 먹는다.

그런데 장모님이 유일하게 잘 가시는 곳, 외식장소로 의견일치가 되는 곳이 닭칼국수로 유명한 일산칼국수이다. 칼국수에 닭고기와 바지락을 넣는데 국물 맛이 괜찮으면서 양도 넉넉하고 또 다른 외식에 비해 저렴하여(1인당 6000원) 자주 이용하게 된다. 

아내 암 진단 이후 5년간 2007년 추석을 제외하고는 추석과 설에 고향을 거의 내려가지 못했는데 올해는 아버지 암 수술이후 경과도 볼 겸 아버지를 뵈러 내가 추석 때 고향을 내려간다니 혼자서 아내 차례상을 차릴 걱정에 마음이 울적하신가 보다. 큰애도 군입대를 해버리고 쌍둥이들이 있다지만 아직은 심부름이며 차례상을 준비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를 못하니...

쌍둥이들이 저녁 늦게 수업이 끝난다고 저녁에 먹을 김밥을 만들어 보내주고 오면서 일산칼국수에 외식이나 가자고 말씀드리니 반대하지 않고 나서신다. 오후 5시 30분, 아직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보니 평소 북적이던 칼국수집이 기다리지 않고 입구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가족단위로 외식을 오다보니 어린애들이 많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어린애들, 뛰어다니는 애들, 자식들이 뛰고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막고 누워있고 넵킨으로 장난을 쳐도 젊은 부모들은 말릴 생각을 않고 있다. 오히려 천방지축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자식들을 흐믓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건 아닌데, 귀한 자식일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하거늘....

그런데 장모님이 우리가 앉은 자리 바로 뒤 신발을 벗어놓는 곳을 가리키며 "어머, 저 애들도 쌍둥이인 모양이네"하신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제 막 두살정도 되어보이는 사내아이 둘이 있는데 체격도 비슷하고 많이 닮았다. 녀석들도 우리 재명이와 재윤이처럼 꼭 닮은 일란성쌍둥이였다. 그런데 녀석들이 남의 신발을 가지고 노니 엄마가 다가와 나를 가리키며 쌍둥이들에게 한마디를 한다.
"애들아, 자꾸 이러면 저기 할아버지가 이놈하며 맴매하신다."

헐~~ 나보고 할아버지라니??? 내가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정도인가? 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이봐요, 젊은 쌍둥이엄마! 나 할아버지 아니라우~'하는 무언의 항변만 내 입가를 맴돌고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하나

지난 토요일 농협하나로마트를 갔다. 실내가 더워서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본닛을 열고 오일을 점검하고 나서 본닛을 닫으려니 닫는 방법을 까먹었다. 어떻게 닫지? 본닛을 지지하고 있는 지지대를 흔들어보고 앞으로 밀어보고 살짝 쳐보고, 본닛을 열 때 전면부 옆으로 살짝 밀었던 부분을 다시 밀어보아도 한번 열려진 본닛은 꿈쩍할 생각을 않는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니 점점 초조해진다. 지금쯤 장모님과 큰애가 시장을 다 보았을텐데... 창피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물어볼까?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아하~ 그렇지! 차량안내서를 보면 되겠구나~' 차에 들어가 실내 사물함을 열어 재빨리 차량설명서를 꺼내 읽어본다. 제길~ 여는 방법은 나와있는데 닫는 설명은 없다. 어떡하지??? 등에서는 식은 땀이 계속 흐른다. 다시 밖으로 나와 무심코 본닛을 손으로 잡고 밑으로 살짝 내려보니 헉~~ 그동안 꿈쩍도 않던 본닛이 그냥 밑으로 스스르 내려온다. 그동안 늘 타고나니던 차량 본닛 하나도 닫을 줄 몰라 헤매는 나는 바보다!

# 둘

"쌍둥이엄마가 남겨놓은 그 많은 빚을 떠안고 갚아나가면서 쌍둥이엄마 전혀 원망하지 않고, 장모님 모시면서 애들 키우며 열심히 사는 당신은 정말 바보다"

아내가 내가 미워서 그렇게 많은 빚을 남겼겠나? 우리 가족 잘 살아보려고 주식에 손댔다 그렇게 된 것을... 또 미워하고 원망해본들 무엇하리~ 좋았던 감정만 간직하고 살아가야지! 나는 바보다!


# 셋

"바보같이 착한 당신을 놓고 가려니 내 마음이 놓이지를 않네"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아니 그 여인이 워낙 똑소리나게 해버리는 바람에 맡기고 나는 그냥 뒤만 따라 다녔다. 물건을 고를 줄도, 물건을 살때 흥정을 할 줄도 몰랐다. 그 여인은 하늘나라로 가기 전 남편과 시장을 가면 남편더러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라고 시키고 멀찌감치 뒤에서 지켜보았다. 아직도 나는 물건 흥정에 서투르다. 점원이 부르는데서 고작해야 1~2천원밖에 깎지를 못하겠다. 어휴~ 나는 바보다!

# 넷

"차장님! 이자가 입금이 안되었네요. 지금이라도 매달 얼마씩이라도 원금을 갚아주시면 안될까요?"
"이자는 오늘 입금시킬께요. 원금은 개인회생이 끝나면 매달 얼마씩이라도 꼭 그렇게 할께요"
생전에 아내는 마당발이어서 직장에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아내는 그 후배들을 끔찍히도 잘 챙겼다. 아내는 나에게 후배들에게 빌린 돈은 꼭 갚아달라고 유언을 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아내가 하늘나라에 간 뒤 나는 아내의 채무에 대해 상속포기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아내와 했던 약속에 따라 아내가 후배들에게 빌린 돈은 개인회생이 끝나도 원금만이라도 갚아주려 한다. 나는 바보다!

# 다섯

"차장님! 저희 사내근로복지기금 결산이 잘 되었나 검토해 주세요"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하여 내일 오전에 연락드릴께요"
보내준 자료를 출력해서 집에 돌아와서는 쌍둥이들 숙제며 준비믈을 다 봐주고 재우고 나서 밤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검토하여 그 다음날 오전에 결과를 알려준다. 대부분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끝내지만 일부는 식사라도 대접하겠다는 것을 괜찮다고 전화를 끊는다. 주위에서는 내 생활도 어려운데 그 정도는 돈을 받고 컨설팅을 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사내근로복지기금 이 일이 좋아 그냥 도와주고 싶다. 나는 바보다!

# 여섯

사랑하는 여인이 내 곁을 떠났다. 너무 힘들어해서 잡을 수가 없었다. 잡았으면 나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 여인이 그랬다. 당신은 바보라고....

바보는..... 바라볼수록 보고싶은 사람이라고....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버지께 10만원을 송금해드렸고, 장모님께는 10만원을 더 드렸다. 아버지는 지난 3월 하순 암수술도 하셨고, 장모님은 한달전 새로 틀니를 하셨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어려우실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이 드리고 싶었지만 내 형편이 허락을 하지 않으니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할 수 밖에....

아버지는 "네 형편도 어려울텐데 왠 돈을 부쳤냐"고 하시면서도 기분이 좋으신듯 목소리가 밝으시다. 다섯 자식 중에서 직장을 가진 자식은 나 혼자뿐이니 내가 작더라도 매월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드려야 하는데 개인회생에 세 자식을 키우며 장모님 모시고 살다보니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렇게 부쳐드린 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쌍둥이들 중학교 간다고 필요한 것 사라고 도로 주시고, 명절에 내려오는 손자들에게 용돈으로 주시고...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이제야 부모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아파도 자식이 걱정할까봐 자식에게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않으시는 아버지, 전립선암이 3기가 되도록 나에게는 말 한나디 않으셨던 아버지, 치질 수술을 받으시고도 나에게는 연락도 않으셨던 아버지, 내가 쓴 책 3권을 안방에 잘 보관해두시고 계시는 아버지!

오늘 한소망교회 찬송 중에 부모는 자식이 힘드록 어려울 때는 기도하고, 자식이 잘 나갈 때는 찬송을 한다는 귀절을 들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버지는 내가 잘 나갈 때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지켜보셨고 내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안타까움으로 위기를 극복하도록 기도하시며 늘 자식과 함께 하셨다. 자신과 똑같이 아내의 사별이라는 닮지 않아야 할 부분까지도 똑같이 닮아가는 자식의 모습에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내가 암투병을 할 때 동생들 사업실패를 수습하느라 이미 신용불량 상태가 되신 아버지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해 며느리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낸 것처럼 아직도 자책하시며 나에게 미안해 하신다.

모 일간지에서 소개한 가장 좋은 효도방법 Best 5에 4위는 부모님께 충분히 용돈을 드리는 것, 3위는 자식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 2위는 자식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 제 1위가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것이라 하였다. 나도 이제부터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아야지, 아프지 말고, 경제적인 위기도 하나하나 극복해 가며, 자주 연락도 드려 부모님이 흐믓하게 미소짓도록 해드려야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내고향 시골마을에는 명절이면 마을 스피커에서 하루 종일 남도민요나 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가구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어릴적에는 마을에 250가구 이상이 되는 시골마을치고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민속전수관이 건립되어 있고 상시 공연이 이루어지는 민속마을로 유명하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이 수시로 도시로 나와 공연을 하곤 한다. 나의 감성은 이런 고향에서 훌륭하신 우리 가족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많이 영향을 받았다. 어릴적 자라면서 할아버자와 할머니가 다투시는 것은 딱 한번 보았다. 마을 어르신을 불러 논일을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에 (힘든 노동이니) 아침에 쌀밥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당시 쌀밥은 무척 귀했다) 그만 할머니께서 며느리와 자식들이 팥죽을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뜻을 거스리고 팥죽을 끓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녁에 논일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팥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팥죽그릇을 마당에 던져버리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을 어르신이 오히려 괜찮다며 수습을 해주어 겨우 넘어갔다. 그 사건 전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순종하였고 두 분은 서로 존중하며 사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살 위셨는데(당시는 여자는 조혼풍습으로 서너살 위가 보통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하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꼭 서로 존대말을 쓰셨다. 나도 결혼해 아내에게 단 한번도 하대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존대말을 했던 것도 할아버자와 할머니 두 분 영향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께 직언을 하시는 분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할아버지와 할버니는 서로 안방 끝에 주무시면서도 밤이면 매일 자식들 일이며 재산문제, 집 대소사, 마을에 관련된 문제들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국악을 매우 좋아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레코드가 있어서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집 안방으로 모여 당대에 유명한 명창과 국악인들 판소리며 민요를 매일 들으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김소희 명창의 열렬한 팬이셨다.

내가 문화재단을 세워 한글과 우리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아마 이런 풍부한 정신적인 문화유산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500미터만 나가면 갯벌이 있고 망둥이며, 게, 조개, 고막, 장어들이 많았던 자연의 보고인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오늘이 설날인데 아내와의 약속때문에 22년째 설날에 고향을 가지 못했다. 아내와는 설날은 우리집에서(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추석은 시골 고향집에서 지내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철저히 지켜오고 있다. 이제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고 없어 이제는 자유스럽게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가도 되지만 아직 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내려가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욱 깊어지고 안타깝고 부모님께 죄송하기만 하다. 부모님 생전에 자주 찿아뵈야 하는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남들은 3일간 황금연휴라고 콘도다 스키장이다 휴가를 떠나지만 나는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 및 신고실무' 책자를 출간하기 위해 막바지 원고작업에 여념이 없다. 싱글대디로 개인회생을 이행하며 자식 셋을 키우며, 장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나는 매일 매일이 절박함과의 싸움이다.

시간 흐름의 속도가 나이와 비례한다고 했던가~ 이제 내 삶의 시간의 속도도 시속 50킬로에 접어선듯한 느낌이다. 자고나서 아침 먹고 출근하여 회의하고 잠시 일하다보면 점심시간, 점심 식사를 마치고나서 오후에는 걸려오는 전화 받고 예산과 결산, 펀드관리에 신경을 곤두새우다보면 금새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요즘 법원에 매달 돈을 입급시켜주어야 날짜, 집주인에게 월세를 송금해주어야 하는 날짜, 아내가 남겨놓은 직원들의 빚을 송금해주어야 하는 날짜, 쌍둥이들 학원비 내주어야 하는 날짜, 매주 장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 날짜는 왜 이리 빨리 그리고 자주 돌아오는지....차라리 봉급날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가도 그래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개인회생도, 직원들 빚 잔치도 빨리 끝나겠지 생각하니 고통과 기대가 서로 상쇄되고 고민도 평정되는 감을 느낄 수 있다.

내년이면 쌍둥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한다. 쌍둥이녀석들 초등학교 졸업기념으로 휴대폰을 사달라고 목을 매고 있는데, 녀석들이 중학생이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겠지. 봉급은 수년째 동결인데 그럼 내가 더 뛰어서 수입을 늘리는 수 밖에 없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적자인 가계를 이리저리 꾸려나가는 현실이 기적과도 같다. 요즘 직장인들은 자기 집에서 맞벌이를 하며 사는데도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을 보면, 외벌이에 개인회생에 직원들 빚까지 갚아나가고 매달 70만원씩 월세를 주어가며 자식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나에게는 복에 겨운 투정으로 들린다.

세상사는 양면이 있다고 했던가? 나에게 물질적인 부족과 감내하기 어려움 짐을 주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족에게 건강을 주셨고, 매일 매일을 웃음으로 보내고 그날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쌍둥이자식들의 재롱과 애교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진정한 큰 부자라고 위안하며 산다.

지난 3월부터 막내 재윤이가 "나는 천재이다", "나는 미남이다"를 입에 달고 다니더니 정말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등을 하는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오늘은 재명이도 "나는 얼짱이다"를 경쟁적으로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니 중학교에 가서는 두 녀석들이 힘들어하는 나에게 지금보다 더 큰 선물을 주려나 보다. 지금의 생활고가 매일 아웅다웅 싸우다가도 금새 화해하고 친해지는, 미래 세계를 이끌어나갈 큰 리더로 성장해가는 세 자식을 보는 기쁨을 상쇄시키지도, 나를 좌절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이왕이면 밝은 면을 보고 살아야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공평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더 큰 영광과 선물을 주시려고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계실꺼야. 어렵고 힘들어도 그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없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람이 살면서 수중에 돈이 떨어진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다.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추위를 피할 주거지, 기본적인 교육을 받는 것, 집 밖에 이동하려고 해도 왠만한 거리는 대중교통이나 차를 갖고 움직여야 하고 그럴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사람들 의식주생활 거의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어 있어 오죽했으면 누군가는 너무 살기 힘들어 콱 죽고 싶어도 약 사먹을 돈이 없어 죽지도 못한다고 했을꼬?

사람들은 이런 돈의 무서움 힘을 알기에 죽어라 돈을 벌려고 하는데 돈이란게 그리 쉽게 사람들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 돈이 벌리지 않으면 기존에 벌어놓은 돈을 까먹는 수 밖에 없다. 퇴직하신 선배님들이 퇴직후 처음 한두달은 집에서 취미생활도 하며 폼나게 쉬시다가 결국은 남은 돈이 슬금슬금 빠져 나가는 것에 조바심을 느끼고 사전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였다가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여 벌어놓은 알토란 같은 종자돈을 그만 한몫에 털어넣고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모습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내가 오는 12월 8일 지식노마드에서 출간하는 '소심남녀 재테크 도전기'에서 부끄러운 지난날을 고백했지만, 나는 지난 2006년 5월부터 법원으로부터 개인회생을 인가받아 이행중에 있다. 5년 기간 중에 지난 11월까지 3년 7개월을 보냈고 아직도 1년 5개월이란 기나긴 기간이 남아 있다. 이 남은 기간 동안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 봉급을 받아도 법원에 개인회생금액, 개인회생에 포함시키지 못한 아내가 아주 친한 직원들이나 친척들에게 빌린 돈을 넣어주고 나면 항상 마이너스이다.
 
나 혼자 살면야 없으면 안쓰고 안먹고 월세 단칸방 아니 찜질방에서 잠을 자면 되지만 가족이 딸리니 사정이 달라진다. 쌍둥이들이야 어리니 내가 데리고 잔다지만 장모님과 다 큰 자식이 한 방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고, 다섯 식구들 먹고 살아야지, 장모님께 드려야 하는 생활비며, 아파트 월세, 쌍둥이들 미래를 생각해서 공부도 시켜야 하고.... 돈을 입급시키고 건네드려야 하는 날은 내 힘든 사정을 보아 멈추어주지도 않고 꼬박꼬박 잘도 다가온다. 또 왜그리 빨리 그리고 자주 오는지.... 머피의 법칙도 아니지만 수중에 돈이 없으면 또 돈 들어갈 일은 왜 자주 일어나는지 이번 11월과 12월은 누구 결혼, 누구 부친 사망 등 경조사가 잇달아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오늘 그동안 2년 넘게 잘도 참아왔던 쌍둥이들 세뱃돈 통장에 들어있는 돈 34만원을 출금했다. 당장 이번주 장모님 드릴 생활비며 시장을 볼 돈이 떨어졌으니.... 우리 쌍둥이들 중학교 들어가면 교복을 사주려고 2년간 받은 세뱃돈 안쓰고 잘 적립해 두었는데,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이 돈만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잘도 버텼는데, 이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네. 은행에서 돈도 빌릴 수도 없지, 주변에 돈 좀 빌려달라고 손을 내밀 염치도 없지...주변 사람들이 꺼리는 것도 당연하지, 그러고 보면 돈이 왠수지.... 그나저나 쌍둥이들이 세뱃돈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걸 알면 많이 실망할텐데....내년 1월에 인세를 받으면 이자까지 후하게 쳐서 갚아주리라~~

내 밑바닥을 시험하는 이런 일들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런 시련들을 겪을수록 나는 더 강하고, 독하게 단련되어 간다. 운명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함 붙어보자~ 뭐 이런 식의 오기가 생겨난다. 앞으로는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겠다고, 그리고 내 代에서 이런 모든 악연을 끝내고, 내 자식들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어 본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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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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