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시골마을에는 명절이면 마을 스피커에서 하루 종일 남도민요나 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가구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어릴적에는 마을에 250가구 이상이 되는 시골마을치고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민속전수관이 건립되어 있고 상시 공연이 이루어지는 민속마을로 유명하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이 수시로 도시로 나와 공연을 하곤 한다. 나의 감성은 이런 고향에서 훌륭하신 우리 가족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많이 영향을 받았다. 어릴적 자라면서 할아버자와 할머니가 다투시는 것은 딱 한번 보았다. 마을 어르신을 불러 논일을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에 (힘든 노동이니) 아침에 쌀밥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당시 쌀밥은 무척 귀했다) 그만 할머니께서 며느리와 자식들이 팥죽을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뜻을 거스리고 팥죽을 끓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녁에 논일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팥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팥죽그릇을 마당에 던져버리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을 어르신이 오히려 괜찮다며 수습을 해주어 겨우 넘어갔다. 그 사건 전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순종하였고 두 분은 서로 존중하며 사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살 위셨는데(당시는 여자는 조혼풍습으로 서너살 위가 보통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하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꼭 서로 존대말을 쓰셨다. 나도 결혼해 아내에게 단 한번도 하대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존대말을 했던 것도 할아버자와 할머니 두 분 영향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께 직언을 하시는 분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할아버지와 할버니는 서로 안방 끝에 주무시면서도 밤이면 매일 자식들 일이며 재산문제, 집 대소사, 마을에 관련된 문제들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국악을 매우 좋아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레코드가 있어서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집 안방으로 모여 당대에 유명한 명창과 국악인들 판소리며 민요를 매일 들으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김소희 명창의 열렬한 팬이셨다.

내가 문화재단을 세워 한글과 우리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아마 이런 풍부한 정신적인 문화유산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500미터만 나가면 갯벌이 있고 망둥이며, 게, 조개, 고막, 장어들이 많았던 자연의 보고인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오늘이 설날인데 아내와의 약속때문에 22년째 설날에 고향을 가지 못했다. 아내와는 설날은 우리집에서(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추석은 시골 고향집에서 지내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철저히 지켜오고 있다. 이제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고 없어 이제는 자유스럽게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가도 되지만 아직 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내려가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욱 깊어지고 안타깝고 부모님께 죄송하기만 하다. 부모님 생전에 자주 찿아뵈야 하는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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