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힘들고 외롭게 자랏던 탓인지 자식에 대한 욕심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어머니가 너무도 일찍 돌아가시고(나를 낳은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정이, 가족에 대한 따스함이 무언지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집을 떠나 객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삶 속으로 따라들어가 버렸다.
아버지 형제가 칠남매(5남 2녀)여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많은 삼촌들과 고모들을 객지로 보내 학교를 다니시게 하느라 고생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릴적 할아버지께서 삼촌과 고모들에게 보낼 돈이 없어 할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싫은 기색없이 마을에서 돈이 있을 만한 집에 가서 돈을 만들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이자 지역 유지이신 덕분에, 신용이 좋아 비교적 돈 빌리기는 쉬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살다가 시집오신 우리 할머니께서 남의 집에 가서 돈을 빌려달란 말을 하기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텐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싫은 기색없이 다녀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호흡이 자식과 장손자인 나를 시골 어려운 환경에서 모두 고등학교 이상 졸업시킨(고모 한 분만 빼고) 교육열로 승화되었던 것 같다.
우리집은 아주 어릴적부터 염전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는 할머니가 직접 우리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장에 가서 직접 파시기도 했다. 우리 염전에서 함께 소금을 떼가지고 간 마을 다른 여자분들은 장사에 능해서 오전내에 모두 팔아치웠지만 우리 할머니는 오전에 모두 팔지를 못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가게를 돌아다니며 팔아달라고 사정하시는 모습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역 유지이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께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금을 이고 시장에 나가서 판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형제도 내 밑으로 남동생이 넷, 5형제이다. 아버지도 우리 다섯 형제 모두 고등학교 이상 본인들이 원할 경우 대학까지 진학시켰다. 지금 돌아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느라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포기한 셈이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자식들, 손자를 먼저 챙기셨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에게 치이며 고생하시고 희생하시는 모습이 싫어 나는 결혼하면 자식을 딱 하나만 낳아야겠다고 일찍이 결심을 했다.
결혼 하자마다 우리 부부는 사주에 손이 귀하니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장모님 성화대로 허니문베이비로 들어선 큰 애를 낳아, 솔직히 큰 애는 정보다는 의무감으로 키웠다. 그 때 큰애에게 아비의 정과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하고 키웠던 것이 지금은 많은 아픔과 회한으로 남는다. 게다가 97년에 아내가 늦게 아기를 가져 그것도 아들 쌍둥이를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을 선언을 하기 일주일 전에 낳아 졸지에 아들만 셋이 되어 눈코 뜰새 없이 키우다가 아내마저 2006년 11월에 많은 빚을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린 지금, 나 혼자 신용불량 상태에서 개인회생까지 이행하면서 세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무척이나 버겁고 마치 나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왜 나에게 원치 않은 아들을 셋이나 주었을까? 특히 늦둥이는 아들 쌍둥이로 주셨을까? 많은 의문 속에서 살았다. 나는 그 답을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내 나이 오십을 넘긴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야근에,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매일 밤 11시 40분, 큰애와는 냉전 중이라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다. 불이 꺼진 집,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 뒹글며 이불을 차버린체 곤히 잠들어 있는 쌍둥이 재명이와 재윤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자식은 하나님이, 먼저 간 아내가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구나! 먼저간 아내가 남긴 다시는 받을 수 없는 선물! 나 혼자면 이 세상 살아가는데 외롭고 힘들까봐 서로의 비전을 공유할 자식을 셋씩이나 나에게 선물하고 갔구나! 유난히도 밝고 성품에 구김이 없어 복원력이 빠른,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닌 쌍둥이들이 곁에 있어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금새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녀석들 키우고 뒷바라지하고 공부시키려면 잠시도 좌절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즐거움과 행복함으로 굴곡많은 삶에 당당히 맞서고 자식들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끌어안고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나는 부자구나~~ 아들을 셋씩이나 둔 당당한 자식 부자아빠.^^
싱글대디 김승훈
아버지 형제가 칠남매(5남 2녀)여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많은 삼촌들과 고모들을 객지로 보내 학교를 다니시게 하느라 고생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릴적 할아버지께서 삼촌과 고모들에게 보낼 돈이 없어 할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싫은 기색없이 마을에서 돈이 있을 만한 집에 가서 돈을 만들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이자 지역 유지이신 덕분에, 신용이 좋아 비교적 돈 빌리기는 쉬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살다가 시집오신 우리 할머니께서 남의 집에 가서 돈을 빌려달란 말을 하기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텐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싫은 기색없이 다녀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호흡이 자식과 장손자인 나를 시골 어려운 환경에서 모두 고등학교 이상 졸업시킨(고모 한 분만 빼고) 교육열로 승화되었던 것 같다.
우리집은 아주 어릴적부터 염전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는 할머니가 직접 우리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장에 가서 직접 파시기도 했다. 우리 염전에서 함께 소금을 떼가지고 간 마을 다른 여자분들은 장사에 능해서 오전내에 모두 팔아치웠지만 우리 할머니는 오전에 모두 팔지를 못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가게를 돌아다니며 팔아달라고 사정하시는 모습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역 유지이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께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금을 이고 시장에 나가서 판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형제도 내 밑으로 남동생이 넷, 5형제이다. 아버지도 우리 다섯 형제 모두 고등학교 이상 본인들이 원할 경우 대학까지 진학시켰다. 지금 돌아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느라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포기한 셈이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자식들, 손자를 먼저 챙기셨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에게 치이며 고생하시고 희생하시는 모습이 싫어 나는 결혼하면 자식을 딱 하나만 낳아야겠다고 일찍이 결심을 했다.
결혼 하자마다 우리 부부는 사주에 손이 귀하니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장모님 성화대로 허니문베이비로 들어선 큰 애를 낳아, 솔직히 큰 애는 정보다는 의무감으로 키웠다. 그 때 큰애에게 아비의 정과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하고 키웠던 것이 지금은 많은 아픔과 회한으로 남는다. 게다가 97년에 아내가 늦게 아기를 가져 그것도 아들 쌍둥이를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을 선언을 하기 일주일 전에 낳아 졸지에 아들만 셋이 되어 눈코 뜰새 없이 키우다가 아내마저 2006년 11월에 많은 빚을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린 지금, 나 혼자 신용불량 상태에서 개인회생까지 이행하면서 세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무척이나 버겁고 마치 나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왜 나에게 원치 않은 아들을 셋이나 주었을까? 특히 늦둥이는 아들 쌍둥이로 주셨을까? 많은 의문 속에서 살았다. 나는 그 답을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내 나이 오십을 넘긴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야근에,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매일 밤 11시 40분, 큰애와는 냉전 중이라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다. 불이 꺼진 집,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 뒹글며 이불을 차버린체 곤히 잠들어 있는 쌍둥이 재명이와 재윤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자식은 하나님이, 먼저 간 아내가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구나! 먼저간 아내가 남긴 다시는 받을 수 없는 선물! 나 혼자면 이 세상 살아가는데 외롭고 힘들까봐 서로의 비전을 공유할 자식을 셋씩이나 나에게 선물하고 갔구나! 유난히도 밝고 성품에 구김이 없어 복원력이 빠른,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닌 쌍둥이들이 곁에 있어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금새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녀석들 키우고 뒷바라지하고 공부시키려면 잠시도 좌절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즐거움과 행복함으로 굴곡많은 삶에 당당히 맞서고 자식들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끌어안고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나는 부자구나~~ 아들을 셋씩이나 둔 당당한 자식 부자아빠.^^
싱글대디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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