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박사 첫회의이자 마지막 회의 개최(2000년 9월)

< 회의내용 >
- 회의를 없애자
- 출퇴근 시간을 없애자
- 복장을 자율화 하자
- 보고서 서류와 상급자 결재란을 없애자(담당자 전결, 담당자 책임)
- 직원 모두 일본에 관한 업계 최고의 박사가 되자
- 자기판단에 따라 시간만 나면 현지 답사를 가자
- 이 업이 천직인 사람만 같이하자
- 돈을 쫒지 말고 일을 쫓아가자
- 컴프레인 고객은 무조건 여행박사 고객이 되게 하자
- 임직원과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업을 하지 말자
- 절대 손님을 귀찮게 하지 말자
- 손님에게 친절하기보다 당당하게 대하자
- 쉽게 안된다는 말을 하지말자
- 최저가 요금을 받고서도 업계 최고의 대우를 받자
   (최저 급료100만원에 상여금 상한선은 없다. 기타 자율성, 복지, 출장 등 모든 면에서,
   단 수익이 없다면 대표이사 급료부터 일정액을 줄이기로 한다)
- 필요한 직원은 상시 채용하되 임직원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배제한다.
   (구비 서류가운데 보증인의 서류나 재정보증서류는 일체 필요 없이 의료보험을 들기
   위한 등본 한 통만 받는다. 학력, 나이, 성별, 지역연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본어나 컴퓨터 교육비외 운전 수강비 등은 회사 부담으로 하자.
-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회사와 연계된 비용은 회사비용으로 처리한다.
   (교통비, 식대, 접대비, 차량유지비 등. 단, 이면지 한 장이라도 필요 없는 지출은 없애자)
- 휴일은 사무실에 나오지 않지만 인터넷을 통한 고객과의 대화는 24시간 가능하도록 하자.
- 1인 1대 이상의 팬티엄급 컴퓨터를 보유하자.
- 경쟁사를 만들지 말자.
   (다른 회사 상품과 비교를 말고 우리 주관대로 가자)
- 낼 세금 다내는 투명경영으로 간다.
- 일정 수익이 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직원 급료의 10%이상은 사회에 환원하자.
- 일본을 홍보하는 사람, 돈이 없는 사람 등에게는 공짜로 여행을 보내주자.
   (임직원 가족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은 제외한다)
- 남의 돈으로 사업할 생각을 버리자.
- 거래처에 미수를 달지 말자(어쩔 수 없는 외상거래인 경우 두 번 이상의 청구 독촉을 받는
   사람은 시말서를 쓰도록 한다)


윗 글은 일본 전문여행업체인 여행박사의 홈페이지에서 제가 따온 글입니다.
평소 기업복지제도와 기업문화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자료를 조사하다가 여행박사라는
급성장하는 회사가 눈에 띄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8월 창단, 5년만에 100배 성장(2001년 송객인원 10,000명, 2007년 송객인원 260,000명

2001년 총매출 23억, 매출이익 4억 5천 200만원, 순이익 6000만원에서

2007년 총매출 1,200억, 매출이익 157억원, 순이익 22억원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
여행업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내 눈을 끌었던 것은 제목처럼 회사를 설립하던 2000년 9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의를 열고 그 이후는 회의를 열지 않았다는 사실과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 내용이 너무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회의문화를 개선하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가 가진 자료를 김승훈의스크랩이야기로 올립니다.

2008.11.2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30일 오후 3시, 서울대기초교육원 302동 대형 강의실에 국민배우 이순재(73)씨가
나타났다. '관악초청강연'의 연사로 나선 것이다. 학생들의 환호성과 휘파람이
쏟아졌다. 200여 좌석이 모자라 계단에 앉고 섰다.
이씨는 서울대 철학과 1954년 입학했다. 학생들은 '50년후배'들이었다.

" '대발이 아버지' 이미지 가지고 5~6년은 우려먹을 수 있더라고 하지만 한계가
있어요. 나이 먹으니까 재수 좋으면 '아버지 역', 재수 없으면 '할아버지 역'이야.
고정된 이미지에 함몰되면 배우는 끝이에요"
'함몰되지 않는 배우',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배우는 백지상태로 스탠바이하는 항상 창의적 여지를 남겨 주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의 말은 최근 행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씨는 70년대 들어 더욱
다양한 빛깔을 내고 있다. 2006년 시트콤 '거침없는 하이킥'에서 모든 권위의
틀을 깨뜨렸다. 야동을 보고 들키는 할아버지 역할을 통해 '야동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곧바로 사극 '이산'에 출연해 '영조' 역을 소화했다. 이어서 '엄마가 뿔났다'
에서는 최고령 키스신을 통해 황혼의 로맨스를 연출했다. 지금은 '베토벤 바이러스'
에서 오보에 연주자를 맡고 있다. '고착되지 않는 자기 변신', 그 자체가 강한 충고였다.

이날 강연의 제목은 '이순재, 나는 왜 아직도 연기를 하는가 였다'(중략)
"어떤 젊은 후배가 '이 드라마 끝나면 CF가 들어오겠지'라고 말해, 가서 대본이나
제대로 외우라고 했다"라는 말도 했다.
진지함은 '기본의 강조'로 이어졌다. 그는 "한류는 지속되고 있지 않다. 재미 본
친구가 배용준밖에 더 있나. 그건 내용의 빈곤, 질의 빈곤이다. 상업성에 몰입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학교를 나온 여기 학생들은 나가서 구석구석에 가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제대로 해야겠죠. 제대로 하려면 기본을 단단하고 반듯하게 다질 필요가
있습니다. 52년 연기자의 긴 여정이 실은 '탄탄한 기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 중앙일보 2008년 10월 1일 -  

이순재님의 52년 연기 비결은 '함몰되지 않는 배우'가 되지 않기위해 부단한 변신과
자기관리 노력이 있었고, 그 밑바탕은 '탄탄한 기본'이 뒷받침 되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요인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변칙과 임기응변은 그저 잠시이고 당면한 위기를 넘기더라도
위기는 계속된다. 적당히 현실과 안락과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너무 심하여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다. 어떤 이는
그저 조용히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지만 조용히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하고 기본을 탄탄하게 다지면서 다가오는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힘든 시기,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에 집중하고 어디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가를 냉철히 살펴보아야 한다.
힘든 때일수록 나의 핵심역량에 투자해야 하고 자기계발도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2008.10.1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외환위기 이후 기업현장에서 상시 구조조정이 고착화하면서 기업들은 행복해졌지만,
노조라는 방패막이조차 없는 화이트칼라 샐러리맨들만 죽어난다는 하소연이었다.

문득 지난해 이맘쯤인가 읽었던 '화이트칼라의 위기'라는 제목의 책을 떠올려본다.
작가는 '회사는 잘되는데 왜 화이트칼라의 근로여건은 갈수록 나빠지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한 뒤 '화이트칼라 노동착취'에서 답을 얻어냈다. '비즈니스는 전투이며
그 전투를 감당하지 못하는 직원은 총알받이로나 써야 한다'는 책구절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평균수명이 갈수록 길어지는 반면 직장에서 퇴직하는 연령은 점점 낮아지는 요즘
세태를 가리켜 '2050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CMI연구소측은 "20대에
경제활동을 시작한다고 가정할 때 평균수명을 고려해 최소 50년은 유효한 경제수명을
만들어야 안정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경영혁신 지원 전문사인
이 연구소가 제시한 '경제수명 늘리기 10계명'을 읽어보니 숨이 턱턱 막힌다.
①도전 :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도 없다. 지금이 마지막이면 기회라고 여겨라...    
⑤인맥 :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를 잡아본 사람을 만나라. 성공적인 인맥 구성을
위한 현명한 시간 운용이 필요하다. ⑥전문성 : 남들과 다른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20대부터 50년을 일하는 시대에는 전문성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도 쉽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샐러리맨 현실을 반영하듯 '샐리던트'
라는 말도 생겼다고 한 친구가 전한다. 자격증 취득이나 어학공부 등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학원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많다보니 '샐러리맨+스튜던트(학생)'의 개념이란다.

직장 환경은 갈수록 살벌해지지만 변화하는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해가는게 한국
샐러리맨들의 강점이 아니겠는가.(후략)

- 문화일보 2005.9.20. 김병직 경제부 차장


요즘 9월 금융위기설에 우리나라가 순채무국으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이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처분하고 우리나라를 떠날 경우 우리나라가 제2의 IMF구제금융이
오는 것 아니냐는 경고와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10년 9개월전, IMF구제금융 신청으로 기업이 줄지어 도산되고 샐러리맨들이 대거
거리로 내몰리던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이 떠오르며 샐러리맨들은 그 후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생존에 대비와 자기계발에 어느 정도 힘쓰고 준비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된다.

2008.9.3.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1995년 영화 '닥터봉'으로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한 한석규!
1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대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너무나 한결같다.
부드러운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6:4,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가르마로 항상
깔끔하게 정돈하고 다니는 모습이 그렇고 대학교때부터 64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고, 은테 안경 너머의 부드러운 눈빛,
커피광고에 어울리는 목소리와 미소가 그렇다.

영화 속에서는 갖가지 변신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현실의 그는 그렇지
못하다. 강박증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한결같음', 삐닥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간 한석규에게는 너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닌가?'

"(잠깐 생각한 다음)네, 일단 저는 연기를 할 때는 다 뜯어고치고 싶어요.
나와 완전히 다른 그런 (캐릭터) 작업은 어떤 것일까 그런 작업이 가능할
때는 항상 고민하죠. 그러나 실제의 나는 '그런 나'를 못만들어요. 스스로
검열하는 것 같아요. 제가 (변화를) 불편해 하는 거죠.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죠. 성격적인 것도 과거의 어떤 경험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가족들 특히 아내는 만난지 20년이 됐는데, 내
얼굴 형태나 눈의 모습같은 것이 청년 때와는 많이 변했대요. 제가 봐도
그래요. 가끔 제 영화를 보거든요. '닥터봉'부터 최근 작품까지 다 보는데,
변했더라고요. 늙었다는 것이 아니라 달라졌어요."

연기면에서도 변화가 많았단다.

그는 30대 시절 찍은 자신의 영화를 보면 낯이 뜨겁다고 말했다.
열심히는 하지만 '애 많이 쓰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안쓰럽다는 것이다.
가증스럽기까지 하다고. 하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런 것을 덜
느낀단다

40대에 했던 연기는 한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꽤 괜찮아 보인다고,
배우로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좋은 40대 때 될 수 있으면 좋은
결과물을 많이 만들었으면 한단다.

"연기를 통해서 '변함없는 나'를 확 던져버림으로서 받는 쾌감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저같은 경우는 그런 타입의 배우예요. 그래서 ('눈눈이이')
곽경택 감독님이 저보고 '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우울증이라는 것이 현대인, 도시인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런 것을 분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아요.
한석규의 가장 큰 스트레스가 뭐냐고 물으면,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장
크고, 그 스트레스를 연기로 푼다고 하겠어요"(중략)

제가 요즘 EBS에서하는  '한국 영화 걸작선'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듯,
현재의 관객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의 관객이 있으니까요. 내가 죽고
난 뒤 다음세대 다음세대에도 관객이 있잖아요. 제 영화는 아이들 다 큰
다음 나중에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네 아이 중에서 배우가 나왔으면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가능하다면 2세, 3세에서도 배우를 했으면 한다고. 그가 생각하기에
'배우란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행착오를 한 만큼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선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누군가에게 천상의 행복도 주지만, 동시에 지옥의 슬픔과 아픔을 던져주기도
하는 사랑. 그는 연기와 그런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연기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하다는 그. 촬영 현장에서의 순간순간이 지극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3년전쯤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의 학교에 일일교사로 간 적이 있어요.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 간 것이죠. 꼬마 친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며칠전부터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결국 이런 말을 했어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그게 정답인 것 같아요"

- 여성조선 2008년도 8월호, 한석규 인터뷰에서....


이 시대 최고의 남자배우 한석규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내려가면서 절제된
그의 모습과 철저한 자기관리 노력,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기에 하는 일(연기)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주어진 배역에 몰입할 수 있고, 그런 연기에 관객들은 열광하며
최고의 배우라는 평가를 내린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라는 말은 지금도, 앞으로도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진리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지금,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계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과연 자신있게 "네"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인지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2006년, 고작 스물한 살 때 체코 프라하에서 민박집을 운영해 유럽 여행객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박아름씨(23). 박씨는 원래 민박 사업을 하기 위해 체코까지
갔던 것은 아니었다. 음악도로서 유학을 떠났던 2005년 당시에는 바이올린 연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동양인 유학생일 뿐이었다.
"처음 원룸을 얻어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는데 저녁 때 바이올린 연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웃들의 항의가 빗발쳐 경찰까지 찿아왔고, 학교 연습실도 사용 허가를
얻기가 어려워 스트레스가 심했죠."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그는 단독주택에 들어가기로 했다. 발품을 팔아서 찿아보니
330
㎡가 넘는 펜트하우스 수준의 이층집을 한국 돈으로 300만원이면 1년 동안
빌릴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몇주가 흐른 어느 날,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박씨는 3명의 한국인 여성 관광객을 만나면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기차를 놓친 이들은 숙소를 찿지 못해 박씨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넓은
집에서 혼자 살았던 박씨는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타국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반가운 나머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이 분들은
원래 이틀 예정으로 체코에 왔는데 일주일이나 머물다 갔어요. 그로부터 며칠 후
또 다른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전화가 온 거예요. 이 분들에게 소개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민박집이 아니라는 그의 설명도 소용없었다. 바로 그 다음날 집으로 들이닥친 그들을
내칠 수 없었고, 이를 계기로 박씨는 민박을 운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분의 방이 3개나 됐고, 여행객들이 잠만 자고 갈 수 있도록 하여 용돈을 벌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었다. 당장 그는 이케아(유럽의 조립식 가구 브랜드)로 달려가 침대
두 세트를 들여놓고 인터넷 사이트에 민박을 한다는 글을 올렸다. 한 방에 여러 명이
묵는 경우 일인당 20유로(약 2만 8000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기조차 제대로 장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소문은 빨랐다. 몇 주도 지나지
않아 하루에 10명이 넘는 여행객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나중에는 예약이 밀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준비가 부족했던 그는 버는 돈으로 그 때 그 때 침대, 소파, 식기를 장만하여 점점
민박집의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1층에 있던 방 3개는 여행객들에게 내주고, 하늘이
보이는 2층의 넓은 방은 자신이 사용했지만 이도 포기하기로 했다. 2층까지 새 가구를
들여 신혼여행객을 위한 스위트룸으로 꾸몄다. 원래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예쁘게 꾸미고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숙박비는 110유로(약 15만원)을 받기로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민박을 시작한지 한 달 반 만에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한국 돈 280만원을 주고 비슷한 크기의 집 한 채를 더 빌려
본격적인 민박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프라하에 있는 수많은 한인 대상 민박집 중에서 두번째로 손님이 많았을 정도였죠.
두 집에서 총 30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었는데 늘 꽉 찼으니까요"

러시아 유학생 한 명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해 청소를 전담하게 하고,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0인분의 한식 요리를 혼자서 해냈다. 삼겹살, 쇠고기, 오이무침,
조기구이, 미역국 등 반찬도 푸짐하게 했다. 김치도 직접 담갔다. 일주일에 40포기가
넘는 양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늘어나고 사업이 커져가는 재미에 푹 빠져 힘든지도
몰랐다고 한다.
"유럽 여행객들은 보통 20~30대가 많은데 코드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감각으로 집을 꾸미고 함께 어울리다보니 손님들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중략)

운도 따라주어 2006년 그가 민박집을 운영할 때는 마침 독일월드컵이 열렸을 때였다.
바가지요금에 질린 여행객들은 독일에 경기만 보러가고 체코에서 숙박을 했기 때문에
방학이었던 여름성수기는 가히 대박수준이었다.
"한국에서 직장을 관두고 온 가족이 민박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를 모델로
삼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이미 많은 민박집이 있었지만 잘되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거든요."

그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손익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투자한 만큼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여행객들을 친구나 가족처럼 대해 무엇이든 아끼지 않았던 게
오히려 좋은 소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이런 호응이 지나쳐 방송국이나
출판사, 관련 기업에서 다양한 러브콜이 이어졌다. 바로 이때 그는 민박집을 접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주변의 지나친 관심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연히 시작한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하고 싶어요. 철저하게
준비해서 나만의 사업체를 다시 한번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2007년 1월 그는 음악 명문인 프라하 컨서바토리를 수료했지만 이제 음악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한다. 민박집 운영을 했던 1년동안 그는 1억원이 넘는 학비와 레슨비를 스스로
해결하고, 2억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더 큰 수확은 사업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고 말한다.
"이상하게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행복한 거예요. 음악 공부를 하면서 부모님이 주시던
용돈으로 예쁜 옷을 살때보다 말이죠.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사업체를 늘려나가는 게 바로
내 길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1년동안 책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체코에서 민박집을
운영했던 경험과 손님들에게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여행정보를 함께 담았다고 한다.
(후략)

- 이코노미플러스 2008년 3월호 -


한편의 드라마같은 젊은 여성 박아름씨의 체코 민박운영 성공체험을 나는 이전까지
다른 스크랩이야기와는 달리 글을 비교적 길게 소개해야만 했다. 문맥을 생략하면
그 과정이 단절되어 생생한 느낌과 감동이 반감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연히 찿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 사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만약
뜻하지 않게 만난 한국인 여성 관광객 3명을 친절하게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재워주는
그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면, 밀려드는 여행객에서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던들 그녀는 지금쯤 평범한 음악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또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수입범위 내에서 차근차근 집이며 집기를 장만하고 차근차근 영역을 넗혀간
재무전략이나 손익에 집착하지 않고 여행객을 친구나 가족처럼 대하여 아끼지않고
지원해 주었던 고객관리전략도 주효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사업을 시작할 때 못지않게 떠날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정도 입지를
굳혔을 때, 언론과 주변에서 러브콜을 보낼 때 그녀는 과감히 아름다운 퇴장을 했다.
우연히 찿아온 성공을 자신이 유능하고 잘나서 성공한 것으로 너무 과신하다보면
무리가 따르게 되고, 시장은 포화되고 과잉과 중복투자로 실패에 이르는 것은 지끔껏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3년전 들은 공병호 박사의 강연내용이 생각난다. 앞으로 블루오션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체험에 관한 실전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다양한 실전경험, 그리고 이를 체계화하기
위한 메모 습관, 치밀한 계획과 준비, 절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그동안 외설시비로 많은 논란과 시비의 불러 일으켰던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이원호 작가의 강안남자 2,000회를 기념하는 인터뷰가 있었다.
2002년 1월 2일 연재를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7년째이다.

'강안남자' 2,000회를 맞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연재를 시작할 때 솔직히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독자들을
어디로든 끌고갈 자신감은 있었다. 연재하면서 즐거움이라면, 역시 뜨거운
관심이다. 한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밤 늦게 전화를 걸어 강안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 고위직 관료는 이야기가 조금만 늘어져도 즉각 지적해준다.
이런 관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물론 노무현 정권 당시 소설이 문제가 되고,
모 국회의원이 '강안남자'를 확대한 패널을 흔들며 비난했을 때 내 자신이
비하되는 듯 해 괴로웠다. 하지만 나는 대중작가이다. 대중소설은 찬반 논란을
일으켜야 한다. 이같은 좋은 일과 나쁜 일들로 인해 대중소설가로서의 목표가
달성됐다."

7년을 이어오면서 소재고갈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없었다. 삶은 변화무쌍하고 사람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 주변의
이야기를 써달라며 소재를 제공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중심은 나의 경험과
취재다. 여성의 인체 구조를 익히고, 여성의 심리를 알기 위해 여러 책을 섭렵했고,
메모했다. 그 노트만 몇 권에 이른다. 물론 룸살롱이나 카바레 등에 가고, 중국,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소설 속 장소를 방문해 풍물을 익혔다. 또 섹스에 관련해
유명한 사람들을 수소문해 직접 찿아가 취재하기도 했다. 10장 넘게 메모해도 겨우
두줄 인용될 정도다. 취재에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내 작품은  해피 엔드다.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을 말하려 한다. 부질없는 삶이지만
순간을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도 또 내일의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그런 희망을
말하고 싶다.

- 문화일보 2008년 8월 13일자  하루 100장 쓰는 '1인 소설공자' 작가 이원호
인터뷰 기사 중에서


강안남자를 읽다보면 어떤 때는 성행위를 묘사하는 대목이 너무 적나라하여
얼굴이 화끈거리고 내 자신 스스로 읽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여서 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누구인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터뷰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자신을 대중소설 작가로 당당히 말하는 이원호 작가! 대중소설은 찬반 논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신,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메모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원정 방문하여 풍물을 직접 익히고, 섹스와 관련하여
고수를 수소문하여 찿아가 취재하여 소설에 반영시키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열정과 뚜렷한 목적의식, 그리고 프로기질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작가의 노력으로
강안남자를 읽는 독자들은 대리만족을 느꼈으리라!

"삶은 변화무쌍하고 사람은 다양하다"는 말을 음미하며 앞으로 이원호 작가가
펼칠 무궁한 상상력과 열정과 도전으로 이어나갈 손끝을 기대해 본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미 경제주간지 비지니스위크지는 14일 지난 20년간 효율적 '브레인스토밍'
(자유토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6,000여개 팀을 조사한 전문가 유레카 랜치의
말을 인용, '빅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공식과 3대 원칙을 소개했다.

◈ '빅 아이디어' 산출 공식

비즈니스위크지에 따르면 브레인스토밍 성공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자극 ▲다양성 ▲재미 ▲드려움 ▲협력 ▲개방성 등. 랜치는 이 중 자극과
다양성, 두려움 등 3가지를 주요 변수로 보고, '빅 아이디어 산출 개수 =
자극 × (다양성 ÷ 두려움)'이라 는 공식을 만들었다. 특히 다양성은 가장
강력한 변수로 아이디어 창출에 터보엔진처럼 기하급수적인 영향을 미친다.
랜치는 "빅 아이디어는 업무와 관련된 전혀 상관없는 외부 자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면서 "바보처럼 보일까 봐, 비웃음을 살까 봐 주저하게 하는 두려움을
없애고, 다양성을 인정할 경우에만 대담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 '빅 아이디어' 를 위한 리더십 3대 원칙

그러나 효과적인 브레인스토밍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리더십이 필수라는
게 비즈니스위크의 분석이다.
첫번째는 구성원의 지속적인 학습을 유도하는 것. 매달 최소 3권의 학술잡지와
저서, 학술세미나 자료를 읽은 뒤 내용을 요악하게 하면 구성원들이 새로운
사고에 훨씬 자유롭게 반응한다고 잡지는 전했다.
둘째는 반대의견과 합의불일치를 독려하는 것이다. 신선한 사고를 점화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초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구성원들에게 조직의 '문제요인(death threat)'을 적도록
하는 등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잡지는 덧붙였다.

- 문화일보 2006.6.15. -


위 글은 집사람이 입원하여 암투병하던 시기, 국립암센터 병실에서 집사람
병상을 지키며 밤 늦게 신문스크랩을 해두었던 내용이다.

우리는 회의를 주재하거나 또는 각종 회의에 참여하여 '빅 아이디어'나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주문하지만
주문에 그치는 경우를 경험한다. 랜치가 발표한 공식에 의하면 다양성을
크게 인정하고, 비웃음을 살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적게 갖도록 배려할 때
'빅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바로 회의이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사람들과 친해질만 하면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생활이 반복됐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데 음악이 윤활유 구실을 했다"

"군 제대후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영어 수업을 한 후 클럽으로 달려갔죠.
새벽까지 연습하다 지치면 자동차에서 잠깐 눈을 부친 후 다시 영어학원으로
출근했어요. 안정된 수입은 보장됐지만 음악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사를 그만뒀어요. 재즈 트럼펫의 1인자가 돼야겠다는 무서운 결정을 하게
됐거든요"

생후 3개월부터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외국을 떠돌아 다녔다는
이주한씨(43세), 1977년 이란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교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악기들을 펼쳐넣고 아이들이 직접 선택하게 했는데 당시
12살 꼬마였던 이주한씨는 무언가에 홀린듯 황금빛 트럼펫을 잡았다.

수리남 밴드 생활을 통해 음악의 모든 그림을 배웠다는 그는 미국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재즈 밴드를 계속한다. 음악에 푹 빠져 있었지만 아버지 소원대로
워싱턴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오리건주립대 MBA에 입학하여 1년간 꾹
참고 다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가족 몰래 시애틀의 코니시예술대학에
다녔는데 성적표가 집에 배달되는 바람에 들켰다.

아버지와 싸우던 그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도망치듯 서울로 왔고,
군 제대 후 영어 강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트럼펫 연주를 했다.

1994년 '수요예술무대'에 서며 이름을 알렸던 그는 음반 '인튜이션(Intuition,
95년)', '긴셍 펑크(Ginseng Funk, 96년), '10+1'(2001년), '마일즈송 북'(Miles
Song book, 2002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작곡.연주실력을 동시에 인정받아
확고한 입지에 오른다. 영화 '괴물', '미녀는 괴로워', '1번가의 기적', '연애의 목적'
등 대박영화와 MBC드라마 '누구세요' 등에서도 이씨 숨결의 흔적이 남아 있다.
 
- 매일경제 2008년 7월 9일 -


재즈 트럼펫의 1인자가 되기 위해 수입원인 영어강사 자리까지 과감히 버리면서
한 우물을 판 무서운 집념과 열정이 이주한씨를 재즈 트럼펫 최고 전문가로
만들었다.

남과 똑 같이 해서는 남의 흉내에 그칠뿐 결코 남을 이길 수가 없다.
남과 같은 시간에, 남과 같은 비용을 들여서는 결코 남을 앞서나갈 수 없다.
열정과 몰입은 전문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창조와 차별화라는 자산을 선물로 준다.
최고의 전문가라는 호칭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아름다운 보상인 셈이다.
2008.8.9.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대기업, 공직자 출신이 퇴직하고 창업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인지 아시나요? 바로 밑바닥부터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밑바닥을
자생력이라고도 하지요"

"조건과 인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의 핵심포인트는 '자생력'입니다."

- 2008.6.12. 오전 8시 (주)민들레영토 지승룡대표 조찬강연회 <창조적 리더십> 중에서


"36세 백수시절, '주말이라 손님이 많으니 나가달라'던 찻집의 문을 나서면서
'정말 맘 편하게 차 마실 수 잇는 찻집은 없나?'라며 문득 '내가 그런 칫집을
만들면 되잖아?'하고 생각한 지승룡 대표. 무일푼의 백수였던 그는 가래떡,
옷 장사로 기어코 종자돈 2000만원을 마련해 1994년 신촌에 10평 남짓한 공간을
빌려'민들레 영토'를 차렸다."

"찻집이나 지하철 등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공간에 불특정 다수에게 행복을 주는
그런 사업을 하고 싶다. 이 세상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비즈니스로
풀어나가는게 종국의 꿈이다. 요즘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사업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다. 유재석 같이 편하고 민중적인 연예인을 키워 세상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민들레영토'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는 어머니같은
편안함을 세상에 퍼트려나갈 것이다."

"버텨라! 힘든 상황이 오면 포기하지 말고 버텨야 한다. 해결이 안되면 안달하지
말고 기다리면서 버텨라. 결국 기회는 온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몰입하라.
그것을 통해서도 기회가 온다. 독서, 운동, 다이어트, 친구 등 일상의 것에 최선을
다하면 또 다른 성공의 기회가 성큼 다가올 수 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바로 도전의 또 다른 이름인 '시작'이다. 성공한 자의 위대함은 시작에서 나온다고
했다. '친구따라 강남갔다 부자되다'라는 우스갯소리 속에서도 도전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소통이 안됐다. 고객과 함께 행복과 사랑을 나눠야 하는데
규모가 커지니 어느덧(나 스스로) 관리경영 모드로 바뀌어 있더라. 고객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영자들이 사업을 해 나가면서 경쟁심리로 인해 욕심과
집착이 생긴다. 때문에 초심을 잃고 실패하는 것 같다.


- 노동법률 2008년 7월호 (주)민들레영토 지승룡 대표와의 특집인터뷰에서 발췌


2008.7.31.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삼송역과 고양고교 사이에 '금메달의집'이란 간판을 걸고 30년 동안
같은 곳에서 오로지 전자제품만을 수리해 온 이병학 씨(52세)

"어찌 하다보니 이곳에서 30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네요. 처음에는
이곳이 번화한 곳이라 경기가 좋았어요. 물론 지금도 단골손님들이 자주
찿아주시고요. 고양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나 저 멀리
부천에서도 오지요"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옛날 기술을 고집했다가는 하나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저는 계속 공부를 합니다. 비록 이곳이 좁고 옹색해도 저는 이곳이
좋아서 10시에 나와 새벽 1시~2시에 집에 들어갑니다. 연구도 하고
공부를 하다보면 시간이 그렇게 후딱 지나갑니다."

"요즘처럼 자원난이 심각한 시대에는 고장난 제품 당연히 고쳐 써야
합니다. 고치면 얼마든지 잘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주 많습니다.
새것만이 좋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 고양소식 2008년 8월호, '이 사람' 전자제품 수리점 금메달의집 이병학 -


이 글을 읽고 있다보면 두가지가 생각난다.

첫째는 자가변신 및 자기계발 노력이다. 이병학씨는 네덜란드에서 개최한
77년도 제23회 기능올림픽 시계부분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땄다. 간판의
금메달은 기능올림픽이 아닌 75년도 서울에서 개최한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기념하여 내건 간판이다. 시계부문으로 금메달을
땄지만 시계가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어 재빨리 전자로 돌렸다고
한다. 나름대로 시대변화를 반영한 자기변신에 성공한 셈이다.


두번째는 물질적인 풍요속에 살면서 소비형태가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단기적이라는 것이다. 한번 쓰고 곧장 버린다. 어지간한 것은 고쳐쓰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유행의 흐름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오늘 일요일 오전
아파트에서 실시하는 분리수거에 나가보면 너무도 멀쩡한 책이며 가전기구,
가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사를 가면서 버리고 간 가구며 책장,
침대가 아파트 경비실 앞에 쌓여 있다. 고쳐서 활용할 수는 없는지...

2008.8.3.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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