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가는 국악카페를 들렀다가 카페를 들렀다가 구음시나위에 발길이 머물렀다.
소리에 박병천, 대금에 박환영, 아쟁은 이태백님이다.

박병천님은 지난달 11월 20일 타계하였으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비록 박병천님은 갔지만 그분이 남긴 많은 작품은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 이시간에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박병천님은 중요무형문화제 진도씻김굿의 굿음악 예능보유자였다. 박병천님의 소리에
대해서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박병천님은 시골 외갓집 마을 출신으로 어릴적 시골 마을에서 죽은 사람의 혼백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할 때 자주 뵈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오고가지 말아라. 이시간도 다 늙는다'
'엊그저께 곱던 얼굴, 오늘보니 다 늙었네'
'엊그저께 검던 머리, 이제보니 다 희어졌네. 세월아~ 세월아~ 무정한 저 세월아~~~'

애절한 대금과 아쟁소리와 함께 박병천님의 恨을 토해해는 구음소리가 어울려 내 가슴
속을 파고 들며 마치 온 몸을 헤집는 것처럼 한 여인을 향한 사모와 그리움, 아쉬움의
마음을 다시 요동치게 한다.

꼬부랑 할아버지와 꼬부랑 할머니가 되도록 백년을 해로하자고 약속했던 여인!
그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나와 세 자식, 그것도 눈에 밟혀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잘 부탁한다던 어린 쌍둥이 자식을 나에게 덩그러니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먼저 훌쩍 가버린 여인!

젊은 나를 첫눈에 단박에 나를 사로잡게 만들었던 맑고 고운 눈과, 목소리를 가졌던 여인!
가냘픈 여인의 몸에서 발산된다고 믿기에도 어려운 넘치는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삶을
후회없이 살다 간 여인!
가진 사랑을 가족에게 300프로 진하게 쏟고 갔던 내가 사랑했던 아내였던 여인!

내 곁을 떠난지 1년 하고도 한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아직도 부르면 대답하며 곧장 내 곁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직장이 같아 다른 부부들보다 붙어있는 시간이 두배로 많아서 였던가,
집에서도 보고, 직장에서도 보고,  출퇴근도 항상 함께 하며 오손도손 함께 사는 모습을
하늘이 시샘해서였던가....
2007.12.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람이 하는 착각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자기 곁에 늘 함께 있어줄 것으로 믿는 것이 있다.

나도 작년 사랑하는 아내가 하늘나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집사람과 백년해로를 하면서 오래도록 함께 살 것으로 생각했다.
18년 넘게 살면서 이러한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다.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6개월 시한부삶 선고를 받고서도 다시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나리란 믿음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허무하게 하늘나라로 먼저 가 버린 뒤에야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나와 함께 내곁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남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 이전보다 더 잘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식을 키우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집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애들을 데리고 살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다.
오늘 그동안 부모님께 잘해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함께 감사의 마음이 교차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이유없이 내손으로 부모님께 이십만원을 부쳐 드렸다.
인터넷뱅킹을 통하여 송금하려니 받는 사람에게 표시하고 싶은 말을 일곱 글짜로
쓰라기에 그냥 '항상 건강하세요'라고만 썼다.

물론 명절이나 생신 때에 아내가 선물이며 돈을 부쳐드렸지만
내 손으로 감사함과 속죄의 마음으로 송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상 내 곁에 계실 것만 같은 부모님!
항상 내 곁에서 못한다고 불평하고 잔소리만 했던 아내,
항상 내 곁에서 싸우고 말썽만 피우는 자식들,
항상 내 곁에서 함께 일하는 회사 동료들,
항상 출근하여 일할 수 있는 직장....

소중한 이런 것들이 내 곁에 항상 머물러 주지는 않는다.
떠나고 나서, 보내고 나서
그제서야 소중함을 느끼고 후회하고 애통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랑은,
지금 현재 자리에서,
주어진 것을 소중히 지키고 가꾸며 나누어야 한다.

김승훈 2007.1.31.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한국증권선물거래소에서 2006년 코스닥 횡령배임사고를 분석해보니 업체수는
20% 증가(2005년 15개 업체에서 2006년 18개 업체), 금액도 20% 증가
(2005년 934억원에서 2006년 1122억)했으며, 평균 사고금액은 62억원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사람이 인재(人材)가 아니고 인재(人災)에 해당된다.

어제 신문 보도자료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에서는 이혼을 임원 결격사유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S그룹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사를 잘 돌보지 못하는 종업원에게는
기업의 운영권한도 맡기지 않는다는 게 사내규율이다. 또 다른 대기업인 H그룹의
경우는 그동안 직원들의 사생활에 크게 게의치 않고 능력만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최근에 이 추세가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기업에서는 높은 지위로 올라갈수록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책임과 권한이 막강해지기 때문이다. 기업은 신뢰를 생명처럼 관리한다.
기업에서 횡령사고 등 불미스런 사고가 나면 그 기업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진다.
신뢰는 쌓기까지는 수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평소에 사소한 것이지만 위기상황에 대비하여 이상징후를 포착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가정은 가장 작고 기본적인 공동체이다. 가정과 회사는 분리하여 생각할 대상이
아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 '치국평천하' 할 것을
지적한 것처럼 가장 작고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정 하나도 화목하게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더 큰 조직, 회사를 잘 관리한다는 보장이 없다.

가정을 화평케 하는 것도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때론 자기 욕심을 절제하고 공통분모와
접점을 도출해내기 위해 구성원인 가족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회사에서는 한없이 관대하던 사람이 집에만 가면 군주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가정법률상담소에서 이혼신청가정에 대해 그 원인을 조사해보니,
가정폭력, 배우자의 외도, 생활고 등 여러가지 사유 중에 많은 항목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사람과 계속 살아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
이었다고 한다. 가정에서 가장 가깝다는 배우자와 가족들에게 신뢰와 비전,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밖에 나가 큰 일을 맡아 관리할 수 있겠는가?

지난 3년전 집사람이 나에게 이혼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본인의 투자 실패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본인 채무를 나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으며 나라도 남은 가족 데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혼을 하면 집사람이 선택할 길은 너무나 뻔했다.
"내가 싫어졌다면 모르지만 그런 일로 이혼할 수는 없소. 나와 헤어져 당신이 나와
살 때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혼해 줄 수 있지만 더 불행해
진다면 결코 응할 수 없소. 희노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하고 부부가 되지 않았소?
투자도 당신 혼자 잘 살겠다고 한 것이 아닌데 왜 그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시오?"

당시 집사람 요구대로 이혼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금전적인 고통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혼 때 언약했던 어떤 어려움이 와도 변치않고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겠노라던 약속을 저버리게 되고 나는 일생동안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어려움이 와도 그 길을 같이 걷는 것이 부부이며 가족이라는 판단에서 끝까지
이혼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그 사건 1년후 유방암을 얻은 집사람의 투병생활을 거치며
집사람을 내 손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거두어 하늘나라로 보내주었다.
이후 집사람  빚을 비록 내가 대부분 떠 안았지만 지금도 내가 내린 결정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이나라, 몸으로 직접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김승훈 2007.1.18.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당신이 하늘나라로 가기전에 같이 근무했던 부서원 박상섭부장과
윤경인씨가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여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 당신 상 중에 너무 도움을 많이 주어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건만 시간이 없다고 차일피일 미루다 1년 하고도 20일이 지난
어제야 겨우 마련된 자리여서 내가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나갔습니다.

여의도 별관 뒤에 가서 식사를 마치고 인근 커피숍에 가서 담소를 나누는데,
봉투를 하나 내밀더이다. 작년 당신 발인할 때 같이 참석했던 부서 동료들
네명(박상섭, 윤경인, 신석용, 신승원)이 남겨진 쌍둥이들을 보고 쌍둥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자고 뜻을 모아 1주기때 전해주자고 그동안 1년간
통장에 넣어둔 돈이라며 나에게 봉투를 하나 내밀더이다.

식사도 내가 계산하려는데 했는데 극구 말려 내지 못했지, 커피값도
윤경인씨가 얼른 치렀지 결국 입만 달고 다닌 셈이어서 바늘방석인데
봉투까지 받으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더이다. 아마 당신이 있었다면
계산서를 빼았어서라도 계산했을텐데...

당신이 회사를 떠났는데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또
봉투까지 받으니 당신의 그림자가 이토록 컸고 짙은 줄 미처
몰랐었습니다. 박상섭부장이 빚정리는 대충 되었느냐고, 용기 잃지
말고 잘 살라고 하며 쌍둥이자식들 안부도 묻기에 잘 자라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봉투 속에는 네명의 직원 이름과 함께
1,020,219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보통 직원들 경조사 때에도 5만원을 하기가 부담스러운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선뜻 내놓은 당신이 근무했던 부서의 동료들이
눈물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부서 일이나, 체육행사, 직원들 애경사에
팔 걷어부치고 앞장서서 일하던 당신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고,
당신하고 일 할 때가 정말 좋았고 그립다고 하더이다.

당신의 육신은 비록 나를 떠났지만 당신이 뿌린 열정과 사랑의 씨앗은
아직도 1년이 지났는데도 내 가슴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나와 우리 자식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2007.12.6.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호수공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산  대하마트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트 앞에는 장두감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습니다.

장두감은 대봉이라고도 합니다.
장두감을 보자마자 사랑했던 아내가 생각납니다.

매년 늦가을이면 당신은 순천이 시골집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장두감 두박스와 단감 두박스를 주문하곤 했지요.
내가 과일 중에 유독 감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겨울내내 두고 익으면 하나씩 꺼내 먹으라고
결혼하면서부터 작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을 줄곧
장두감을 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장인 내가 잘 먹고 건강해야 한다고
한사코 말리는 데도 당신의 황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에 먹는 대봉감은 정말 달고 맛있습니다.
함께 먹자고 해도, 당신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사코 마다했지요. 같이 먹으면 줄어드니 나에게만
주려는 그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중 유방암투병하면서 그제야 대봉감을 받아먹는
당신을 보며 지난 18년 동안 우겨서라도 지금처럼
당신과 함께 먹지 못한 나를 많이도 자책했습니다.

작년에는 당신이 생각나서 대봉감을 일체 사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트 앞을 지나오면서 당신 생각이 나서
대봉감 한박스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에게 주지 못했던 장두감을 이제는 익으면 우리
쌍둥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들,
당신에게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후회와 아쉬움을
큰애, 쌍둥이자식 세자식들에게 쏟아 주렵니다.
2007.1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한국방송통신대의 졸업논문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그 속에 며칠전 이미 하늘나라에 간 사랑하는 아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지난 1981년에 한국방송통신대에 등록후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며 학점을 모두
이수하였으나, 결혼과 출산 등으로 졸업시험을 치르지 못해 졸업이 아닌 수료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부의 적극적인 구제정책으로 기존 이수학점을
모두 이수한 사람에 한하여 논문을 제출하여 합격하면 졸업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생겨 그 수혜를 받게 되었다.

평소 자식들 개인신상기록카드 부모의 학력란에 대학수료라고 쓸 때마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마음 아파했던 아내였다.

유방암 투병 중이던 지난 3월, 뒤늦게 학점 수료자에 한해 논문제출 자격을 부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잘하면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고
어린애처럼 들떠 기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본인 육신 추스리기도 벅찰텐데, 논문 작성한다고 자료 찿고
컴 앞에서 힘들게 졸업논문을 쓰던 아내!

논문을 작성하면서 불쑥 "내가 살아서 졸업장을 받아볼 수 있을까?"라고 물으며,
"그때까지 내가 꼭 살아 있으면 좋겠는데...." 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했었다.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시한부 삶 앞에서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과 열정을
논문 작성에 불사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경건함에 앞서 그토록 원하던 대학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제대로 뒷바라지 해주니 못한 미안함에 복받치는 회한의 논물을
흘려야 했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동안 집사람 대학졸업장 하나 챙겨주지 못한 못난 남편,
직장과 가사에 쫓기느라 그토록 염원하던 대학 학업을 접을 때 그 애타는 심정을
왜 진즉 헤아리지 못했을까? 그런 구제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오늘 당신이 생전 그토록 뜨겁게 열망하던 한국방송통신대 졸업논문 합격 소식을
당신 앞에 전합니다.

사람들은 착각 속에 산다.
공부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로 미루고 산다. 사랑도 나중에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공부도 때가 있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사랑도 인생에서 기회도 모두 때가 있다고...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고 되돌릴 수가 없다고...  
그것은 삶에 대한 자만이고 오만이라고...
또한 시간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았으니,
있을 때 잘 하고,
다 보내고 나서야 뒤에 가슴을 치고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2006.11.24.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퇴근후 매일 저녁밥을 먹고 공원 산책을 나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냥 나섭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우산과 파카잠바를 뒤집어 쓰고,
바람이 불면 장갑과 잠바를 뒤집어 쓰고 나섭니다.

집에서 나서 마두역까지 그냥 걷습니다.
당신이 지난 2005년 5월말 국립암센터를 퇴원하면서
항상 당신과 같이 걸었던 코스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같이 다녔던 그 길입니다.

겨울과 비오는 날만 빼고는
강촌공원 지압공원을 들러
맨발로 두바퀴씩을 돌았지요.
뾰족한 자갈길과 촘촘히 돌맹이가 박힌 그 길을
유방암을 이기겠다는 집념 하나로 돌고 또 돌았지요.

하루 만보를 꼭 채우겠다며
만보기를 허리에 차고
만보기에 10,000이라는 숫자가 찍힐 때까지
걷고 또 걸었지요.

오늘도 당신과 유방암투병중 걸었던 그 길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던
당신의 향기와 살고자 처절하리만큼 투쟁했던 의지를
느끼고 결심을 새롭게 하고 왔습니다.

나는 현재의 위기를
꼭 극복해낼 것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우리 세 자식을 자랑스럽게 키우고,
집도 장만하고,
당신이 못다 이룬 일
내가 모두 이루고 당신 앞에
당당히 설 것입니다.

세상 수많은 남자 중에서 나를 선택한 당신입니다.
당신은 비록 먼저 떠났지만
당신이 못이루고 간 꿈
그것을 내가 꼭 이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내 삶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2007.11.27.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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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11월 10일 사랑하는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습니다.
발인하는 13일 월요일 아침 6시 40분,
하늘도 우리 가족의 아픔을 느낀듯
거짓말처럼 10분간 비가 내리며 대지를 적셨습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지난 1988년 4월 23일 저와 결혼하여
꼬박 18년 6개월 18일을 같이했던 제 생애 최고의 길벗이자
제 인생 여정의 멋진 반려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규, 명, 윤을 저에게 맡기고
뭐가 그리 급한지 훌훌 먼저 떠나갔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집안에서는 장손며느리로서,
세 아이의 어미로서,
직장(KBS)에서는 사원으로서,
KBS노동조합에서는 여성중앙위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바쁜 삶을 살다 갔습니다.

눈을 감기 3일 전만해도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 아들 명, 윤이가 눈에 밟혀
1년만 더 살아서 쌍둥이자식들을 키워놀고 가고 싶다고
어미로서의 간절한 애정도 보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이 너무 많았기에
하늘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불러 데려간 것으로
혼자 위안삼는 것으로 아픔을 달래봅니다.

삶은 투쟁입니다.
2005년 5월 8일,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유방암 말기와 6개월 시한부 진단을 받고도 흔들리지 않고
그동안 암과 당당히 싸워 삶을 1년 더 연장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장학생이 아니면
대학을 진학할 수 없었기에 대학 진학에 실패 후
1978년 6월 KBS 시청료 징수부서에 일당 아르바이트요원으로 들어가
일용직을 거쳐 업무직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정규직으로까지 신분을 개척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직장에서는 비일반직 여성 사원들의 대모로서
초대 여성협회 부회장으로서,
비일반직 사원들의 모임체인 지원협회의 간부로,
노동조합 대의원과 여성중앙위원까지 맡으며
어렵고 힘든 비일반직, 여성사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습니다.

국립암센터에서 유방암 투병 중에서도
유방암을 앓고 있는 병상 환자들에게
유방암에 관한 자료와 새로운 신약 개발 정보를 검색하여
출력, 복사해 나누어주며 용기를 잃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자고
그러면 신약이 개발되어 모두 살아날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시 간호사나 의사에게 찍히면 불이익을 받는다며
불편함도 그대로 감수하며 생활하는 환자들을 대신하여
'환자는 고객이다'며 불편 부당함은 과감히 따지기도 하며
고충과 애로사항은 개선을 건의하는 등 환자들의 가려운 곳을
곧잘 대변함으로써 병동 내무반장, 환자 대표라는 닉네임도 얻었습니다.

아내는 빈틈이 없었습니다.
평소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약속 장소에도 정한 시간보다 항상 미리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현재의 인력 구조조정 시대를 미리 예견하였던지
1993년 2월 당시 미원 기획실 관리과장으로 근무하던 나에게
보다 고용이 안정된 현재의 직장으로 전직할 것을
권유한 것도 아내였습니다.

평소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고
향후에는 지식사회가 도래할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앞으로는 공부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며
1997년 저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흔쾌히 학비를 마련해 주었던 아내였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는 미리 수산물시장이며 농협을 들러
틈틈히 과일이며 생선을 구입하여 미리 보내주거나
가지고 내려가 시골에서는 별 준비없이도 명절이나 제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큰애 동규를 가졌을 때 군소리없이 만삭의 몸으로
셋째 동생 일구의 대학입시 뒷바라지며,
입시원서까지 사다주며 대학을 합격시켰습니다.
네 시동생 모두를 두루 챙기는 큰 형수이기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스스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겼습니다.
일을 사랑하고 삶을 소중히 생각했고
주어진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자 했던 점은
저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둘도 없는 동지였습니다.

그런 선이 굵었던 아내였기에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고나니
아내의 빈자리가 더 커보입니다.

당신이 했던 일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우리 부부는 수년전 장기기증서에 서명을 해두었습니다.
장기를 기증하려고 해도,
암에 걸려 더 이상 기증할 장기가 아무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아내였습니다.

가족과 자식들에게 짐이되기 싫다며
화장한 후 뿌려달라는 처음 유언을 설득하여
자식들이 어리니 저식들이 모두 결혼할 때까지만
청아공원에 안치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아내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청아공원에 안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소서....

2006.11.14.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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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갈길 바쁜 나를 시샘이라도 하듯,

믿었던 간병인마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3일 연속 집사람 곁을 지키며 의자에서 세우잠을 청했다.
비가 오고 나서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집사람이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침상이 창가 옆이라 바람소리마저 차갑게 느껴지고,

창가에서 스며드는 참바람 탓인지 창문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찬 기운이 옷 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중병 환자는 면역력이 저하되어 감기는 마치 불에 기름에 붓는 겪이다.
간호원에게 부탁하여 환자복을 몇벌이나 껴입게하여 체온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이제는 독해질대로 독해진 유방암세포가 주는 고통 때문인지 평소 밤에는 1시간 내지 1시간 간격으로 잠을 깨는 집사람이
어제는 두시간에 걸쳐 관장을 실시한 탓인지 아주 푹 잠을 잘 이룬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새벽 4시...

창밖은 칠흙같이 어둡다.
누군가가 말했다.
하루 중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현재의 고난이 결코 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

현재의 고난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인내해야 한다. 이겨내야 한다.
강철은 수천도의 용광로 속에서 나온 쇳물을 가지고 수십번의 연마와 냉각을 거치며 탄생한다.
결국 온도와 반복되는 연마와 냉각이 철의 강도를 결정하는 법이다.

미국의 광물학자 죤 메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기 재산을 다 팔고 친척과 친구 돈까지 끌어들여 폐광촌에 석유를 캐내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100피트, 200피트, 300피트...

시간이 흐를수록 수중의 돈은 점점 바닥이 나는데 석유는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이자를 갚은 돈조차 없었다.
이자조차 갚지 못하고, 사업 또한 비전이 보이지 않자 채무자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여기저기 채무자들로부터 빚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사업은 엉망이 되었고, 이제는 죽는 길 밖에 없었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교회로 가서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나를 믿고 투자한 친척과 후배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제발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간절함이 통했는지 그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종아, 정상 1보 직전에서 포기한 삶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친척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마련한 돈으로
70피트를 파 내려가는 순간, 하루 12,000배럴의 석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상의 문턱 95% 지점에서 대부분 포기한다.
정상 5%를 더 오르지 못함으로써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지금 포기하는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
행운이 여신이 저 멀리서 미소를 지으며 나의 골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운명의 여신이 내 손을 들어주는 그 순간까지 나는 끝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희망을 잃지 않고 오늘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한다.

내 인생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숙아! 그때까지 내곁에 있어야 한다.
힘들게 살아왔던 우리의 지난 삶
내 꼭 당신에게 그런 멋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

2006.11.8.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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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 : "요즘 가계부 안써?"

집사람 : "응"

나 : "쓰기 싫어서?"

집사람 : "항상 마이너스여서 재미가 없어 쓰다가 치웠어... 당신이 써볼래?"

나 : "가계부를 재미로 쓰는 거야?"

집사람 : "그러면 당신이 쓰면 되겠네"

나 : "싫어. 남자가 무슨 가계부를 쓰냐?"

집사람 : "남자라고 가계부 쓰지 말란 법 있나?"

나 : "에이, 그래도 싫어"

19년전 남자가 무슨 가계부를 쓰냐고 큰소리쳤는데,
집사람이 국립암센터에 유방암으로 입원하여 투병을 시작하던 작년 7월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봉급을 받아도
법원에 매월 개인회생부담금과 개인채무를 갚고나면 휑하다.
그나마 강의나 글을 기고하며 받는 돈으로 부족함을 메꾸어 나간다.

마이너스 가계부를 쓰는 일이 재미없어 안쓴다는
19년전 집사람 말이 시린 가슴을 파고 든다.
이런 적자 가계부를 안고 19년간 살아왔던
집사람에게 한 없이 미안해진다.

가계부를 쓰다보니 수입과 지출별로 세무항목을 만들어
수입과 지출 규모와 수준을 체크할 수 있고,
수입범위를 넘지 않도록 지출 항목과 욕망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도 부족함 속에서도 청약저축과 연금저축도 꾸준히 넣고 있으며
조금씩이나마 늘어가는 금액에 위안을 삼는다.
집사람이 살아 있었으면 청약저축과 연금저축 통장도 보여주었을텐데,
그러면 환하게 웃을텐데...

수입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궁리하고 새로운 도전고 계속 하게 된다.
한시라도 빨리 흑자 가계부를 만들고
우리 식구가 마음놓고 살 보금자리 집도 장만할 것이다.

2007.11.22.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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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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