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왜고너)가 CEO가 된 2000년 6월 60달러였던 GM 주가는 지난 1일 현재 2달러 아래로
폭락했다. 자동차 판매가 순조롭던 2005년조차 GM은 106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했고,
주가도 왜고너가 CEO로 취임했을 때에 비해 75% 폭락했다. 지난해 GM은 사상 최대인
310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왜고너는 왜 실패했을까. 전문가들은 왜고너의 실패 이유를 크게 3가지로 꼽는다.

유가(油價) 급등 같은 외부 경영 변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연료 다(多)소비형 차량에
지나치게 의존한 게 첫 번째 실책이다. GM은 연비가 낮은 트럭과 SUV 차량을 주력으로
내세웠지만, 지난 2~3년 동안 국제 유가 급등으로 미국 내 대형 차량 수요가 급감하면서
GM의 판매량은 곤두박질쳤다.

두 번째는 높은 노동 비용을 개선하지 못한 점이다. GM 차량 1대 생산에 필요한 노동비용은
경쟁업체보다 수천 달러나 높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비용 감소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일례로 지난 2005년 노동비용 감축 논란이 벌어지자,
왜고너는 "잡스뱅크(JOBS bank·해고 근로자에 대한 실직수당 지급 프로그램)의 축소 같은
급진적 조치는 고려하지 않겠다"고 비용 논란을 일축했다.

세 번째는 너무 많은 브랜드를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점이다. 여기에는 막대한 마케팅 비용이
들어갔다. 그러나 왜고너는 구조조정에 미온적이었다. 미국 최초의 자동차 브랜드였던
'올즈모빌(Oldsmobile)'을 생산 중단한 것 정도만 빼면 대부분 브랜드의 경우 지난해
금융위기 이전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왜고너 스스로는 1990년대 세계 최초의 양산용 전기자동차였던 'EV-1'의 개발 중단을 최대
실수로 꼽았다. 왜고너는 "그 차종은 수익은 없었지만, 우리 회사가 환경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만들어줬다"면서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후회했다.

<조선일보 土日섹션 Weekly BIZ  2009.4.4-5>
 
 
기업이나 사람은 한 때의 잘못된 선택이 전체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른 선택과 결정을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고뇌한다. 최윤식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글로벌미래전략포럼
대표는 기업의 생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섯가지 능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파도(특성)를
볼 줄 아는 모니터링능력과 파도를 탈 수 있는 네가지 능력(진화, 속도, 지식생산능력,
네트워트생산능력)이 그것이다. 이는 기업에만 국한된 능력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사회의 변화속도와 진화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 속에 엄청난 위기가 있고
기회가 있다. GM의 왜고너 전회장의 실패는 나와 모든 이의 실패가 될 수 있기에 현재에
만족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기업과 개인의 생존능력을 높이기 위한 자기계발에 대한 투자와
노력에 더욱 힘써야 한다.  
2009.4.7.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열정만 있다면 나이 들어서도 그 열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연극 무대에
도전하게 됐다"
 
"53세의 나이로 연극배우가 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연습 중간중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개그맨 김형곤 형이라는 사실이 특히 부담스러웠다"
 
"나처럼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열정이 있고, 두려움만 떨칠 수
있다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개그맨 故 김형곤 친형 김형준씨가 53세에 연극배우에 도전했다. 김형준씨는 현재
대학로 라이프씨어터에서 공연중인 연극 '수요일의 연인들'에서 주인공 존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연극배우로 변신하기 전, 김형준씨는 국내 굴지 대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일하고 있었는데 1월 삼성전자를 퇴직하고, 연극 무대에 도전하며 1월 11일부터
정식으로 '수요일의 연극들' 무대에 올라 성공리에 공연을 마쳤다.
 
-  뉴스앤뉴스 2009.2.4 보도자료 중에서...
 
53세의 나이로, 더구나 우리나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다 선망하는 국내 최고기업인
삼성전자에서 임원(상무)으로 일하다 180도 다른 삶인 연극배우로 도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고 열정이
있다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천적은 미칠 정도로 좋아함과 열정이다.
 
제1의 인생이 가장으로써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교육시키고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인 책임과 의무로 보낸 삶이었다면 제2의 인생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이 시대 가장 행복한 사람들' 대열에 끼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고 꿈꾸는 진정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2009.2.4.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멕시코에서  88세의 할머니가 이 나라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
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됐다고 일간 레포르마가 24일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콘셉시온 토레스 할머니. 23일 UNAM에서 박사학위 과정의 마지막 관문인 1시간에 걸친
면접심사를 끝내고 최종합격판정을 받았다. 논문 제목은 자신의 거의 50년에 이르는
생물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고등학교 과정에서 생물학 교육론'.

토레스 할머니는 면접심사에서 "생물교육은 단순히 동식물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생명
존중의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이라며 당국이 생물 교육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토레스 할머니는 지난 1989년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했으나 건강 악화로 1991년에 과정을
중단했다가 불굴의 의지로 2년 전부터 다시 학업을 계속해 햇수로 10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게 됐다. 2년 전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박사학위를 끝내겠다고 밝혔을 때 아들
라파엘은 "이 연세에 공부를 계속하시는 것보다는 노후를 즐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렸으나 토레스 할머니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토레스 할머니는 "아주 젊은 시절에 인생의 전체 계획을 세웠다. 내 인생의 사이클을
끝내고 싶었다. 병을 앓기도 했으나 박사학위를 받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만큼 중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외동딸로 태어나 엔지니어였던 부친의 사랑을 받으면 성장한 토레스 할머니는 26세부터
교편을 잡기 시작해 74세에 퇴직했다. 4년 전에 남편과 사별했다는 할머니는 3명의 자녀
그리고 15명의 손자 및 증손자가 학업을 계속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좋은 의미에서 집요함과 광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토레스 박사의 후배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 연합뉴스 2009년 1월 25일 보도자료
 
보도기사를 읽으면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토레스 할머니가 아주 젊은 시절에 세웠다는
인생의 전체 계획이었다. 그런 인생계획이 있었기에 토레스 할머니는 남들은 자기계발을
포기하고 조용히 노후를 준비하는 68세에 박사과정 학업을 시작했고, 병도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지난 1월 21일 한국과학기술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내려가는 학습] 세미나에서 한양대
유영만교수는 "요즘은 박사가 너무 넘쳐나 발에 걸리는 것이 박사들이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나도 박사과정에 뜻을 둔지 벌써 9년째에 들어선다. 2000년 석사과정을
졸업후 곧장 박사과정을 계획했지만 집사람의 암판정, 이후 힘겨운 투병생활과 사별 등
재정사정이 여의치 못해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토레스 할머니는 68세에 박사과정을 시작해 20년에 걸쳐 졸업을 했는데 그에 비하면
나의 경영학박사 도전은 늦은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확고한 삶의 비전과 목표는 삶에
열정을 선물로 줌으로써 살아가는데 닥치는 많은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진하게
해준다. 마치 미사일에 공격지점 좌표를 입력하고 발사하면 미사일은 지형과 기상여건을
따라 비행하여 비록 시차는 있을지라도 정해진 목표에 도착하여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게 된다.
 
오직 한번 뿐인 삶! 대충 살며 보내기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시도 조차도 하지 않고
나중 생을 마감하면서 후회하기 보다는 후회없이 도전하며 시도한 후 결과를 평가받는
후회를 남기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2009.1.25.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귀한 고명딸은 두 살이 지나도 걸음마를 떼지 하고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저 다른 아이들
보다 조금 늦으려니 생각했던 부모님은 그녀가 신생아 황달 때문에 뇌성마비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중략) ‘울릉도 트위스트’로 유명했던 가수‘이시스터즈’
멤버였던 그녀의 어머니(김희선)는 그 후 은퇴를 하고 딸을 뒷바라지하며 지냈다.(중략)
 
어머니가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돌봐야 할 만큼 어린 시절 정유선씨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몸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든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는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휘청거리고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교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놀려댔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기소개를 마쳤다.
아이들의 놀림 때문에 펑펑 울어야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녀는 절대 자신의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운동회가 되면 “너는 안 뛰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만 특별하게
대하는 것이 싫었다. 걷는 것도 힘든 그녀에게 달리기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항상
결승선까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그녀는“그래도 꼴찌는 거의 한 적이 없었다”며 웃어 보였다.
곁에서 딸의 손을 잡고 토닥거리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런 딸애의 모습을 볼 때면 전 항상 두 번 울었어요. 장한 마음에 울고, 안쓰러운 마음에 또
울었죠. 유선이는 항상 적당히 하는 법이 없어요. 밤새도록 연습을 해야만 겨우 남들만큼 할
수 있었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배운 응급처치 연습을 한다면서 저를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붕대로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어찌나 귀찮게 굴었는지 몰라요(웃음).”

“공부 잘하지, 요리 잘하지, 제가 남편보다 부족한 게 있나요? 오히려 저희 부모님의 결혼반대가
더 심했어요. 남편이 교포라서 미국에서 살아야 하고, 나이가 저보다 여섯 살이나 더 많다고요”
 
“첫째인 하빈이가 ‘엄마는 왜 남들과 다르게 말하냐’고 물었을 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어렸을 때 뇌에 작은 상처가 생겨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죠.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갖고 있다고요. 그 말을 듣더니‘많이 아프냐’며
고사리 손으로 제 머리를 만지더라고요.”
 
하빈이는 공립학교를 다닐 때 버지니아에 있는 학생들의 상위 1% 안에 들어 영재반
(Gifted Talente)을 다닐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아이를 갖기 전, ‘혹시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으면 어쩌나’‘나중에 아이가 나 때문에 놀림을 받으면 어쩌나’하는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마지막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나를 키워준 어머니처럼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의 편견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엄마는 저런데, 아이는 멀쩡하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는“어릴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받는 상처가 옅어지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엄마를 당당하게 소개하고 티 없이 밝은 아이들을 보면서 그녀는 다시 기운을 냈다.
 
요즘 그녀는 아이들의 학교를 찾아가고, 강의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뿐이지만, 2시간 40분 강의를 위해서 그녀는 나머지 6일을
꼬박 준비해야 한다.
 
하루 종일 바쁜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인지 궁금했다.
“아이들을 다 재우고 수업 준비까지 마쳐놓은 다음, 새벽 2시쯤에 맥주 한잔을 마시는 순간”
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저절로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란다.
 
“돌이켜 보면 내 발목을 붙잡았던 걸림돌들이 모두 내 인생의 디딤돌이 돼준 것 같다”,
 
- 중앙일보 2009.1.17.

 
뇌성마비 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4년째 보조공학을 가르치고 있는 정유선 교수(38)와 그녀를 오늘에 있게 한 그녀의 어머니
김희선씨의 감동적인 기사를 읽는 내내 그동안 겪었을 마음고생과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왔다. 집사람이 유방암으로 하늘나라로 가던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쌍둥이들이
나에게 와서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 학교 선생님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리지
마세요. 친구들이 엄마없는 애라고 놀려요"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나도 어려서 심한 말더듬을 앓았었다. 수업시간에 발표나 읽기를 할 때 말이 나오지가 않아
얼굴을 찡그리고, 말을 더듬었을 때 나를 향했던 그 많은 친구들의 웃음과 조롱이 큰 상처가
되어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았던 적이 있었다. 만약 말더듬이라는 장애물 앞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뇌성마비의 장애물을 성공의 디딤돌로 활용하고 극복한 정유선교수와,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를 끊임없이 심어주고 곁에서 지켜준 어머니 김희선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낸다. 남들보다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는 길은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는 수 밖에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에 정유선씨의 당당한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또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이 없었는지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며 장애를 가진 사람을 품어주고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나도 세 자식을 밝고 건강하게, 어려움과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도전하여
이겨낼 수 있는, 역경을 디딤돌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열정맨으로 키워낼 것을 다짐하게 된다.
2009.1.18.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하루 연습을 안 하면 자신이 알고, 이틀 연습을 안 하면 주위가 알고, 사흘 연습을 안 하면
모두가 안다고 하잖아요. 힘들 때일수록 연습에만 매달렸습니다. 오직 볼을 치기 위해
집중하다보면 힘든 생각이나 쓸데없는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어지거든요."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저도 힘든 시절을 겪었습니다. 당시에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제가 그분들의 사랑에 대해 보답할 때라고 생각해요."

"기부는 결국 작은 관심과 실천이잖아요. 막연하게나마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를
참고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재단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선수로서의 생활을 충실히 한 후 앞으로 시간을 갖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정식으로 하는 LPGA 첫 도전인 만큼 신인왕을 노리고 있습니다. 평생에 한 번 있는
타이틀이니 놓칠 수 없잖아요. 세계 무대는 넓고 좋은 선수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분발해서 선의의 경쟁을 펼쳐 보일 겁니다."

"골프선수로서 세계 랭킹 1위와 명예의 전당 입성도 제 목표예요. 그러나 무엇보다 존경받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ADT챔피언십 때 소렌스탐을 보면서 존경받는 선수란 무엇인가를
느꼈습니다. 가족에게도 충실한 줄리 잉스터처럼 인자한 인상으로도 남고 싶어요. 많은
사람에게 베풀면서 주위의 고마운 분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싶거든요. 뛰어난 골퍼이자
'인간 신지애'로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것이 제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 헤럴드생생뉴스 2009.1.2.


프로 데뷔 첫 해인 2006년 시즌 3승으로 다승왕, 상금왕, 신인왕, 최저타수상, 대상 등 5관왕
수상, 이듬해 2007년엔 25년 묵은 KLPGA 시즌 최다승(5승) 기록을 넘어 9승 달성, 시즌상금
6억원 돌파 등 우승과 상금 관련 국내 최연소 기록을 경신했고, 작년 2008년에는 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 미즈노클래식, 우승상금 100만달러가 걸린 ADT챔피언십까지
석권하며 LPGA투어 비회원 사상 첫 3승을 거두고 한국, 미국, 일본, 유럽투어에서 모두
퀄리파잉스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투어에 직행한 최초의 선수, 국내 대회에서 7승을 포함해
올해만 11승 달성, 3년 연속 상금왕에 국내무대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상금 7억원 돌파...

3년째 무서운 기세로 국내 여자골프계를 평정하며 여자골프계의 역사를 갈아치우고 있는
올해 21살의 프로 여자골퍼 신지애 선수의 우승 비결은 혹독한 연습이다. 손과 손목 힘을
기르기 위해 아령과 완력기를 하루에 400번 반복했고 매일 100번씩 타이어를 때렸다.
연습장 앞 20층 아파트 계단을 매일 7번씩 반복하여 뛰어서 오르내려 '무쇠다리'가 되었다.

신지애 선수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신체적인 열악한 조건(키 156㎝, 작은 손)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연습에 매달리며 극복했다. 드라이버샷 연습을 하루에 1000회 이상 반복했고
퍼팅 연습을 7시간 동안 내리 했다. 비거리 270야드에 이르는 호쾌한 드라이버샷과 홀 바로
옆에 꽂히는 정교한 아이언샷은 이러한 혹독한 연습으로 얻어진 선물이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인해 큰 시련(2003년 중학교 3학년때 교통사고로 어머니가 사망하고,
두 동생은 중상을 입고 입원. 이로 인하여 200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합숙소를 나와 프로 전향)과 절박한 가정형편은 신지애를
멀리있는 명예보다 먼저 눈앞의 돈을 택하게 했고 동생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은 최고가 되고자 하는 꿈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고, 연습에 몰입하도록 하여
자신감과 자신만의 전매특허인 과감한 퍼트로 승화시켰다. 연습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신지애 선수는 고등학교 동창의 딸이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들었을 고난이었고, 자랄 때의
가난으로 인해 꿈을 접고 상처도 많이 받았었텐데 매년 불우청소년 장학금이나 불우이웃돕기에
억대의 기부를 하며 선행을 묵묵히 실천해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지난해 9월엔 경기 용인의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2400만원어치의 쌀과 지원금을
건네며 "금액이 많지 않아서 죄송하다"고 말했다는 신지애 선수는 분명 이 시대 역경을 연습을
통해 승리로 바꾼 진정한 인간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기부천사의 모습이다.
2009.1.3.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그렇죠. 지난해 초에는 유가 때문에 어려웠고, 하반기에는 환율과 금융위기로 어려웠습니다.
올해도 어려운 건 분명하죠. 사실 저희는 2007년부터 미국 경제를 보면서 세계 경제가 나빠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그룹은 지난해부터 미리 유동성을 확보해 뒀습니다.
2007년 에쓰-오일의 지분(28.41%)을 인수한 것도 이런 상황변화에 대처한 것입니다. 유가가
급속히 오를 것으로 보고 항공유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해외에 나가 공부했기 때문에 배낭여행을 많이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컸는데 외국에서는 한글의 존재가 없더라고요. 하루는
바티칸에 갔었는데 당시 일본 기업이 바티칸 성당 개·보수에 몇 억 달러를 기부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야, 우리는 언제쯤 국제적인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스폰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루브르에서 관람객 음성안내 기계를
현대화하겠다면서 우리에게 스폰서 할 수 있냐고 물어왔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넣어주는
조건으로 스폰서 하겠다고 다시 제의했습니다. 물론 돈은 좀 더 들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죠.
최소한 우리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갔을 때 ‘어, 여기에도 한국어가 있구나!’ 하면서 내가
젊었을 때 갖지 못했던 자신감을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데 기여해 우리 대한항공과 한진은 물론 한국의 위상도 올리고 싶었고요.
그래서 시작한 일입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관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이 떴느냐, 몇 개
노선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많이 태우느냐가 경영에 중요한 점이었죠. 요새는 수익이 날 수
있느냐, 서비스 질이 일관되게 유지되느냐 이런 것들에 중심을 둡니다.  관점만 바뀐 게 아니라
경영하는 방법도 많이 발전했어요. 이제는 제가 혼자 결정하는 것이 별로 없어요. 부서장,
본부장들이 알아서 판단해 줍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이 ‘trust but verify’입니다.  믿고 맡기되
확인하라는 거죠. 이게 요즘은 정착돼 있어서 제가 사진 찍을 시간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게 글로벌입니다. 한국적인 것도 좋지만 항공이나 물류산업은 근본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입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한국 손님이 40%를 넘는데 더 성장하려면 한국
손님만으로는 안 됩니다. 외국 손님을 더 끌어 와야죠. 한국 손님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면 글로벌
항공사가 못 됩니다. 한국 옆에 일본(2억 명), 중국(13억 명) 등 거대한 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셔야 살길이 생기는 거죠.”


“구조조정이란 건 내실을 기하는 거고, 인력 차원에서는 제가 인사부에 오히려 사람 더 뽑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취직하기 힘들 때 유능한 사람이 더 많잖아요. 제 경험으로도 힘들 때
채용한 사람 중 유능한 사람이 많아요. 회사의 엘리트들도 그 층에 제일 많습니다. 이번에도
유능한 지원자가 더 많이 있다면 목표에 구애 받지 말고 더 뽑으라고 했습니다.”

“선친 때부터 ‘모르는 사업은 하지 마라’는 게 좌우명이기 때문에 물류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과 (주)한진이 주력이죠. 여기서 좀 확장하면 항공기 지상조업회사인
(주)한국공항과 한진해운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다 이 회사들을 지원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들은 늘렸다, 줄였다, 합쳤다 할 수 있죠. 항공은 이미 어느 정도 와 있고, 육상은
아직 한국 위주지만 이제 세계 각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육상운송 분야를 좀 더
키워야죠. 민간 항공기 부품 제조업도 하고 있고, 이것도 이미 보잉, 에어버스와 공동개발할
정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몸집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분야로 확장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GM을 보세요. 항상 포춘 500대 기업에서 1, 2등 하던 기업이 지금은 없어지게
생겼잖아요? 서열이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잘하는 곳에서 깊이를 추구할
겁니다.”

“경제는 사이클입니다. 사업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요. 내려왔으니까
올라갈 때가 있다는 걸 보고 해야지 내려온 것만 보고 하면 안 돼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지금 저렇게 된 것도 월스트리트 중심의 단기주의 때문이라고 나는
봐요. 그에 비해 한국은 과감한 투자, 장기적 투자가 많이 있어서 미국과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가 미국과 똑같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은 월급쟁이 CEO들이 주인보다
더 주인 행세를 하지만 우리나라 CEO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몇 천억원씩 연봉 받는 사람도
없고, 자가용 비행기 타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저만 해도 회사 주식이 오르면 뿌듯하고
좋지만 그거 뭐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람들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봐요. 어려운
한 해가 되겠지만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 이코노미스트 969호(2009.1.6) 중앙일보사,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의 신년특집 인터뷰가 이코노미스트 969호에 실렸다. 글로벌 마인드,
사업은 단순한 몸집 늘리기가 아닌 핵심역량을 가진 부분에 집중한다, 힘들때 채용한 사람
중에 인재가 더 많다, 경영은 단기 실적에 매이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구구절절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들이다.

2009년이 밝았다. 경기가 어렵고, 구조조정의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요즘,
경제는 사이클이고,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 내려갈 날이 있으면 반드시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 배낭여행을 하면서 국제적인 문화재에 기부를 하겠다는 것을
꿈꾸었는데 그 꿈을 이루었다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님의 말에 희망을 걸어 본다.

2009년은 위기를 기회로 반전하는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그런 해를 내 스스로 만들기
위해 꿈을 잃지 않고 이전보다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 본다.
2009.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힘들지만 아직까지 밥은
굶지 않고 잘 견뎌왔어요.”

남들은 손으로 글을 쓰지만, 황원교(49) 시인은 입으로 쓴다. 마우스 스틱을 입에
물고 컴퓨터 자판을 톡톡 건드려 한자 한자 쳐넣는다. 20년 전 교통사고로  경추
4, 5번 사이의 척수가 끊어졌다.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됐다. 목숨만 붙어있을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단 5분간, 한 손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지체없이
목에 칼을 꽂고 싶었단다. 그러나 1996년 등단한 데 이어 시집을 두 권 냈다.
이번엔 산문집 『굼벵이의 노래』(바움)를 펴냈다. 58편의 이야기로 270쪽을
채우기까지 그는 몇 번이나 고갯짓을 했을까.

죽는 게 낫겠다며 곡기를 끊었다가 병세가 악화돼 공연히 가족들만 고생시키기도
했다. 아들의 수족 노릇을 하던 어머님이 병수발 7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인생관이 달라졌다.
“세상도 싫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며 자포자기하듯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정신이 들더군요. 이러다가 나도 정말 풀잎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가겠구나….”

컴퓨터를 들여놓고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을 입에 물었다. 어머님을 여읜 이듬해인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2000년엔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머님 무덤에 시집을 놓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관절염을 앓는 칠십대 중반의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에게 밥을 떠먹인다. “목구멍에서 ‘아버지, 차라리 제게
밥을 주지마세요.’란 말이 곧장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145쪽)


그에겐 아내가 있다. 10여 년 전 자원봉사자로 찾아와 그가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줬던 유승선씨. 그녀는 7년의 봉사 끝에 수녀가 되겠다던 꿈을 접고 그에게 왔다.
공교롭게도 아내는 결혼 후 유방암 판정을 받아 병마와 싸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한다.
아버지는 그런 며느리를 위해 유방암에 좋다는 방울토마토를 손수 기른다. 제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와 아내이건만, 그를 위해 자다가도 두세 번은 일어나 자세를 바꿔준다.
욕창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

내년쯤엔 소설을 한 편 내어 놓을 요량이다. 산문집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또 기나긴 시간, 그의 입은 자판을 콕콕 누르고 있겠다.


- 중앙일보 2008.12.24.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내 몸, 내 안위부터 챙긴다.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 불편은 2차적인 문제이다. 자신의 불편과 아픔이 더 크고
더 아파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둘러보면 분명 자신보다 더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삶에 대한 진지함과 경건함이 느껴지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을 이용하여 산문집 270쪽을 채우기 위해 10년이 걸렸으며,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저는 아직 밥은 굶지 않았으니..."라는
장애를 뛰어넘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주변을 더 걱정하는 황원교 시인의
기사를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닻을 올려 안전한 포구를 떠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안고
출발하여 탐험하라. 꿈꾸라. 그리고 발견하라" - 마크 트웨인

황원교 시인이 이를 악물고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으로 산문집 270쪽을 채우고
있었던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지냈고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키지 못하고, 방황하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당장의 편안함과 즐거움에 익숙하여 도전과 변화를
거부하고 살았던 삶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보다
진지하게 임하자.


2008.12.26.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본문

“일의 값어치를 따지지 않고 찾아서 하는 성실함, 고객뿐 아니라 주변 직원에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친화력이 고비마다 빛을 발한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기회라도 그게 내 앞에 왔을 때 어떻게 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적성 운운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어떤 때는 '이런 걸 하라고 엄마가 공부시키지는 않았는데'라는 자괴감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외부 고객 못지않게 내부 직원과의 융화가 중요하더라”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누가 뭘 시키더라도 ‘4년제 대학까지 나와놓고는 내가 고작 이런
아르바이트나 해서야 되겠어’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항상 성심성의껏 일하는 자세가 오늘을 있게 한 것 같다”

최근 경제위기로 취업길이 막혀 고통받는 후배들에게
"‘힘들다’고 말하기에 앞서 ‘너 스스로 그만큼 노력했는가’를 먼저 질책하라"
“후배들은 물론 나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낄 때 항상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며
“아무리 어려워도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결국 길이 열리게 돼 있다”고 조언한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하나은행 월곡지점에 번듯한 서울의 4년제 여자대학
전산통계학과 졸업반이었지만 경기침체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일단 비정규직
대학 출신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이서원(33·당시 23세)씨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8년 하나은행 본점 차세대 인수지원부 과장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한파로
공채 출신 정규직 은행원들조차 속속 사표를 쓰고 쫓겨나가던 시절에 들어온 아
르바이트생이 계약직·정규직을 거쳐 책임자급(과장)까지 오른 것이다.

아르바이트 신분일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종일 서서 차 심부름하고
설거지하면서 한 달에 쥔 돈은 50만~60만원이 전부. 훨씬 나이가 어린 여상 출신 정규직
행원들 월급의 반의반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만 그저 묵묵히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항상 누구한테나 웃었다. 실적은 물론 고객들로부터 평판도 좋아 비슷한 또래의
4년제 대학 졸업 공채들보다 승진이 더 빨랐다. 고객 만족을 인정받아 받는
‘이달의 우수 행원상’인 별도 아홉 번이나 받았다. 하나은행 6800여 명의 행원 중 별 9개를
받은 사람은 100명도 안 된다.
 .
이 과장은 98년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초과근무를 밥 먹듯이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시급이 나왔지만 늦게까지 일했다.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선배들이
퇴근할 때까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는 일은 더욱
아니었지만 “아무리 아파도 은행에 와서 아팠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99년 4월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금융회사 경력이 최소 2년 이상
필요했지만 지점장이 강력하게 추천해 준 덕분에 이례적으로 1년도 안 돼 기회를 잡았다.
당시 하나은행에선 보람은행과의 합병으로 많은 사람이 명퇴했다. 하지만 이 과장에겐
거꾸로 새롭게 기회가 열린 셈이다.

계약직 창구직원으로 일할 때 이 과장은 ‘푼돈’을 가져오는 고객도 다 기억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고객을 기억하니 예금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를 찾았다.
특별히 상담 기술이 좋지 않아도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밝은 성격과 친화력은 조직생활에서 항상 큰 경쟁력이었다. 그는 계약직 채용
이후 정식 업무교육이나 연수 없이 곧바로 창구에 앉다 보니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은행업무가 끝나고 정산을 하면 늘 계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 언니들이 그를
위해 항상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노하우를 알려줬다.
 
<중앙일보 2008년 12월 11일>

흘린 땀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장애도,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던
일들도 하고자 하는 열정과 도전 앞에서는 길이 열리고 일이 풀리게 된다.
혹독한 IMF구제금융하에서 은행 아르바이트로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참으며 오직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 친화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행원보다 더 일찍 과장
직위에 오른 이서원과장의 입지전적인 성공사례를 보며 아직도 세상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일한만큼 대우받는 공정한 곳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IMF금융위기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는 요즘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공존하며,
어려울수록 위축되지 말고 나도 어려우면 남들도 똑같이 힘들다는 마음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가까운 내부 동료들을 감동시키며 그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그녀의 생존전략과
성실함, 땀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2008.12.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는 식품영양학 전공에다 국내 박사예요. 그런 사람이 하버드 나온 교수보다 더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어요. 그것도 몇십만 부씩…. 고현정(탤런트)도 아닌데, 이 나이에
시청률을 30%까지 끌어올렸고요. 회장님, 사장님,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암환자…
누가 내 강의를 듣든 다들 몰입하세요. 사람들이 그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나는 독서에서
나온 생각하는 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와 스토리를 생각하는 힘이 있으면 엿장수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생각하는 힘이
없으면 대학을 나와도 아무 데도 쓸 곳이 없는 사람이 되는 시대입니다.”

“문제에 기반을 둔 교육을 시작할 겁니다. 교수는 강의하고, 학생은 리포트를 제출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발표하고 교수와 함께 토론해서 해답을 찾는 방식이지요. 1~2학년 때
교양과목에서 고전 50권을 의무적으로 읽도록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이번 가을 학기
교양과목에 ‘키워드로 읽는 오늘’이란 강좌를 만들었는데요. 자연과학·인문학·법학 등 각
분야 교수가 돌아가며 강의를 합니다. 여러 각도에서 사회적 이슈를 풀어가다 보면
중앙SUNDAY에서 제시한 ‘다빈치형 인재’가 나오지 않을까요.”

“우리 학교가 여자 대학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대한민국 여자가 아니라
세계 속의 인간을 가르치는 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었어요. 노동력 중심의 사회에서 근력이 강한 남성이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앞으로 열리는 융합시대에선 달라요. 여자라고 해서 남자보다 못할 게 없어요.”

“총장 취임 후 우리 학교 멘토를 맡고 있는 기업 최고경영자(CEO) 20명과 돌아가며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여성들을 사원으로 쓸 때 무엇이 문제냐.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어요.
여대생이 취업할 때 핸디캡이 뭔지 알아야 하잖아요. CEO들은 ‘책임감이 좀 떨어지고 이기적’
이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조직을 위해 몸을 던지지 않는다는 거죠. 남자들은
‘부하를 위해 내가 죽겠다’고 달려드는데, 그러니까 밑에서 ‘보스’ 하고 따라가는데, 여자들은
‘난 몰라요’ 하니까 부하들이 여자 상사 모시기 싫어하고,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신입사원일
때는 우수한데 이사급, 임원급으로 올라가는 확률이 낮다는 것, 그 이유가 뭐냐? 바로
팀워크 부족이라는 겁니다.”

“권리는 똑같이 요구하면서도 ‘난 여자니까’ 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이것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해결책도 역시 교육밖에는 없더군요. ‘뭐든지 훈련이다.
방위보다 특수부대가 센 것은 훈련의 강도가 세서 그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팔기(취업시키기)
위해선 특수부대 요원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OK, 남자가 여자보다 더 훈련을 받은 것은
축구하고 군대 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교수들에게
‘축구 하고 군대 가는 여대생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교수들이 농담하는 줄 알고 웃더군요.
나는 진담인데….

한 총장의 ‘악바리 근성’은 유명하다. 두 자녀를 낳았을 때 산전·산후 휴가를 하루도 쓰지 않았다.
둘째 딸을 낳았을 때는 1월 9일 출산 후 3월 2일 정상 출근했다. 한 총장은 “내 얼굴이 부어서
엉망인 것을 보고 교수들이 일주일만 더 쉬라고 했지만, 수업을 다 마치고 퇴근했다”고 한다.
“내 사전에는 결석, 휴강, 결강이란 단어가 없어요.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는 오후 6시 집에
가서 저녁 먹이고 숙제 봐주고, 다시 밤 9시 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에 퇴근했지요.
다시 6시30분 기상…. 그렇게 하루에 4시간 반 자는 생활을 하니까 책을 10권, 11권씩 쓸 수
있었던 겁니다. 옛날 사진들 보면 머리를 뒤로 묶은 것밖에 없어요. 마흔다섯까지 드라이를
해본 적이 없어요. 머리카락 한 오라기 빗는 시간도 아까워….
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벌 대학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이화여대란 대답을 원할 텐데, 나는 이대가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이대가 많이,
많이 앞서 갔으면 좋겠어요. 이대를 견제하고, 교수 뺏어오고, 좋은 프로그램 베껴서 장사하고,
그러면 소경이 자기 닭 잡아먹는 거예요. 대학 운영을 백화점식, 뷔페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것을 해야 해요. 자기 특성화를 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나라도 잘됩니다.”

<중앙SUNDAY 2008.12.7.>


숙명여대 한영실(51) 총장. KBS TV 건강 프로그램(비타민 ‘위대한 밥상’)에 고정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스타 교수’ 반열에 올라 올해 숙명여대 총장까지 올랐다. 메스컴이 낳은
최고의 '스타교수' 출신이지만 그가 내 뱉는 한마디 한마디 말에는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담겨져 있고 강렬한 신념을 느낄 수 있다.

한총장이 강조하는 키워드 '융합과 변화, 그리고 특성화'는 진정 학교나 회사 뿐만 아니고
개인들 생존이나 발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개인들은
'특성화'대신 '전문성'으로 바꾸어주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의 요건이 되지 않을까.
한영실 총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실험이 조직에, 교직원에게,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교육계에 어떤 변화의 바람과 결과를 가져올 지 사뭇 기대되는 바가 크다.
2008.12.7.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김명민의 연기 인생에 분수령을 이룬 작품을 연출한 PD들은 연기자 김명민을 어떻게
볼까? 김명민의 연기 인생에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재발견하고 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 바로 '
불멸의 이순신'이고, 그가 대단한
배우임을 입증한 것이 '
하얀거탑'이다. 그리고 김명민의 대중의 가슴속에 훌륭한
배우라는 것을 확연하게 심어준 것이 '베토벤 바이러스'다.(중략)

과연 '불멸의 이순신'의 이성주PD, '하얀거탑'의 안판석PD, 그리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재규PD는 연기자 김명민을 어떻게 말할까.

"김명민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 이순신 역에 캐스팅했다. 김명민이란 배우 때문에 드라마가
살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김명민은 동료 연기자 뿐만 아니라 연출자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연기자다. 그러한 노력이 연기의 스펙트럼을
무한정 확장시켰다고 본다"<'불멸의 이순신'의 이성주PD>

"김명민의 눈빛이 좋아 캐스팅을 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이라는 인물을 기가 막히게
소화해냈다. 정말 놀랄 정도로, 기대 이상으로,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싶게 너무 잘했다.
진짜 좋은 배우라는 생각이 작업을 하는 내내 들었다. 김명민씨는 일단 연기에 열심히
임하는데다가 머리가 비상하고, 배우로서 꼭 필요한 감성이 발달해 있다"
<'하얀거탑'의 안판석PD>

"김명민씨는 완벽을 추구하며 완벽에 다가가는 연기자다.
개인 스태프랑 농담도 잘 하지
않을 정도로 계속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다. 생활 전부를 드라마에 쏟아 붓는
사람이고, 치열하게 준비하며 연기에 임하는 연기자이다"<'베토벤 바이러스'의 이재규PD>

오늘의 김명민의 원동력은 바로 상상을 초월한 노력과 훈련, 준비라는 사실이 그와 작업한
세PD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 마이데일리 2008.11.22

오랜 무명생활로 힘들어서 연기를 포기하고 이민을 떠나려고 했던 배우, 김명민이 이제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최고의 연기파 배우 그것도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단한 연기자로 성장했다. 그 비결은 다름아닌 치밀한 준비와 노력, 그리고
훈련이라는 사실을 그와 함께 작업한 세PD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세PD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실물경기가 바닥이고, 공장은 멈추어 섰고,
종업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모두가 위기라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침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위기의 시기에 잘나가는 기업과 사람이 있다. 그런 기업과 사람들의
비결도 김명민의 성공비결과 별반 다르기 않을 것이다. 어려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래변화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고, 열정으로 훈련과 혼신의 노력을 집중하는 자는
결국 살아남는다. 나는 오늘을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고 훈련하는데
부끄럼없이 보냈는가? "당신은 오늘 하루를 후회없이 보냈습니까?"라고 누가 질문한다면
자신있게 "네!"하고 대답할 수 있는가?


2008.11.22.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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