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성격이 비슷하면 싸우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더 싸우고 싸우면
수습이 힘들다. 집사람 생전에 집사람과 장모님은 성격이 비슷했다.
카리스마가 강했고, 리더십도 있었고 남에게 잘 베풀고, 고집고 쎄고,
혈액형도 O형으로 한마디로 호방한 남자 성격이었다.

반면 나는 A형으로 적극적인 리더형보다는 참모형에 가까웠다. 집사람과
내가 의견 충돌이 생기면 일찌감치 승패는 결정되었고 내가 거의 져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사람과 장모님이 다투면 항상 크게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그 중간에 끼인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꽤나 불편했다. 집사람 편을
들자니 장모님이 걸리고, 장모님 편을 들자니 집사람의 불같은 성격에 가만히
있을리는 없고 그러다보니 느는 것은 눈치라고 대충 눈치를 보며 해결이 될
때까지 관망하는 편이었다. 그러면 집사람에게 가장인 남편이 적극적으로
중간에 화해시킬 생각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고, 무책임하고
무심하다고 야단맞고.... 내 의견을 들어주고 존중해 주어야 화해고 뭐고
이루어지는데 무조건 본인 말이 옳다고 우기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의견충돌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다. 집안살림의 주도권 때문이었다.
우리는 신혼 때부터 맞벌이를 했고 신혼초 1년 4개월을 빼고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계속 살았기 때문에 퇴근하고 만나 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장을
보아왔고 장모님은 그 재료로 반찬을 만드시곤 했는데, 매번 사오는 식재료로
반찬을 만드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장모님도 며칠 냉장고에 묵히다보면
그만 유통기한을 넘겨 버리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면 집사람은 "왜 비싼 돈을 주고 사온 식재료를 냉장고에서 묵혀 먹지도
못하게 만드느냐? 엄마는 살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요?", 그러면 장모님은
"네 자식 키우는 것도 힘든데 그럼 살림은 네가 해라!"하시며 방으로 훽 들어가
버리신다. 회사에서 종일 일에 시달리다 집으로 돌아온 집사람이나 종일 당시
어린 큰애를 키우느라 장모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던 터라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감정싸움으로 발전하곤 했다. 더 진전되면 "아들 밥상은 앉아서 받고,
딸 밥상은 서서 받는다던데 그 말이 딱 맞는 말이네. 어이구 박복한 내 신세~~"
하며 신세 한탄을 하면 "아니 엄마는 내가 뭘 구박했다고 그러는 거요?"하며
더 감정대립의 골이 깊어지곤 했다.

이론상으로는 어느 한쪽이 참으면 되련만 서로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이 비슷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하도 답답하여 내가 집사람에게 한마디 하곤 했다.
"자기가 조금만 참으로 될 것을 장모님을 기어이 이겨야 되겠는가? 그러다
나중에 장모님 먼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하려고...살아계실 때 맘 편히
사시도록 잘 해드립시다."

집사람을 보낸 후 장모님은 그래도 그때 딸자식과 기싸움을 하며 아웅다웅
다투며 지내던 그때가 그리우신 모양이다. 그러게 사람들은 곧 후회할, 아픔을
남길 말과 행동을 왜 하는걸까? 집사람과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나는 집사람을
먼저 보낸후 살림 일체를 장모님께 맡겨 버렸다. 시장도 함께 가고, 필요한 것은
같이 함께 상의해서 골라 구입한다. 혹시 빠진 것이나 애들 필요한 것은 사시라고
매주 별도로 10만원씩 용돈을 드리며 살림은 전적으로 맡겨버린다.

노인분에게는 일을 맡겨주는 것이 치매를 예방하고 육체나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노인분들에게는 치매예방을 위해 고스톱을
치라고 일부러 권유하기도 한다. 보다 일찍 역할분담에 충실했던들,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던들 집사람이 이렇게 일찍 허무함을 남긴체 먼저
가지는 않았을 것을...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일요일 쌍둥이중 형인 재명이가 팬티를 갈아입는데 여지껏 장모님 앞에서
잘 갈아입었는데 이제부터는 화장실에서 갈아입겠다고 슬쩍 방을 나선다.
장모님은 그러는 재명이 행동이 싫으신 모양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녀석에게
드디어 사춘기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자라면서 그런 시기가 있었지... 식구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 창피해
골방으로 들어가 갈아입고, 갈아입은 팬티도 누가 볼새라 세탁물 속 깊숙이
숨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일기도 누가 볼까봐 나만이 아는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비밀이 많아졌고,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내 하고 싶은대로 해보고
싶은 그런 시기가 나도 있었지...

어제 저녁에 재명이에게 취침시간이 되었다고 인터넷을 그만하고 자라고 했더니
친구와 싸이월드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게 한다고 서럽게 울며 30분간을 혼자
짜증부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이제는 두 녀석들이 고집을 피우면 여간해서는
꺾지를 않는다. 장모님도 이제는 녀석들 고집을 어찌 해볼 재간이 없으신 듯 모든
것을 나에게 떠밀어 버린다. 내가 조금이라도 퇴근이 늦으면 녀석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어 하신다.

한참 어미에게 응석을 부리며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시기인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도 저만한 나이일 때 어머니 품이 참 그리웠지... 동생들이 새어머니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모습과 새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젖을 먹는 동생들 모습이
너무도 부럽고 질투까지 느껴졌었지. 동생들이 잘못하여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을 때는 어머니가 달려들어 온 몸으로 막으며 얼른 동생들을 감싸고 피신시키는
모습에서 "저런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고 그늘이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도 재명이가 학교에 일찍 가야 하는데 6시에 깨워달라고 했는데 6시
30분에 너무 늦게 깨웠다고 장모님께 계속 짜증을 부리며 징징거리며 눈물을
짜기에 내가 버럭 화를 내며 야단쳤지만 왠지 마음이 편치 못하고 녀석이 쨘해
보인다. 이내 달래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재명이와 재윤이를 불러놓고 어제
치른 시험결과를 놓고 칭찬을 해주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우리 재명, 재윤이가 수학에서 좋은 성적을 내서 아빠는 참 기쁘다.
수학과 영어는 지금 5학년 때가 중요하니 계속 기초를 잘 다져 놓도록 해라".

칭찬을 하니 금새 녀석들 기분이 좋아지며 얼굴이 밝게 펴진다. 어려서 받은 상처와
자라면서 받은 고통과 역경이 이렇게 나를 성숙시키고 상처를 보듬고 한단계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주었나 보다.
 
그래, 이 애비도 자라면서 속상한 때도 많았고 마음의 상처가 많이 받았지...
너희도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야 하니 얼마나 힘들고 마음아프고 외롭겠니?
상처 많은 우리 가족 서로 아픈 상처 건드리지 말고 서로 부둥켜안고 감싸며 사랑으로
부족함과 외로움을 채워가며 살자꾸나~~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회사 체육행사의 날이었다.
부서 식구들과 강화도에 있는 석모도를 다녀왔다. 서울과 바로 가까이에 강화도가 있는데도
나는 석모도는 처음이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고 평일인 금요일이었기에 부담도 없어
그만큼 가슴이 설레이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는 안성마춤이었다.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이용하여 건너며 배 안에서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면 갈매기가 달려들어 이를
낚아채가는 모습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모두들 가족들과 자주 놀러를 다니며, 강화도에는
그동안 몇번씩 놀러 와서 지리에도 밝고 어디에 가면 식사하기 좋은 지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석모도에도 그동안 수차례씩이나 다녀갔다는 이야기에 그만 나는 죄인이 되고
만다.

가벼운 마음에서 출발했던 나의 마음은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슴이 찢기는
회한으로 가득찼고 나도 모르게 후회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평소 집사람은
나에게 휴일이면 어디 놀러가자고 먼저 말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많이 섭섭해 했다.
그렇다! 나는 결혼이후 20년에서 5개월이 모자란 온랜 기간동안 살면서 지금껏 내가
먼저 집사람에게 야외로 놀러 가자고 말을 해본 적이 없다. 그동안 몇번 간 것도
집사람이 회사에 콘도를 신청하여 배정되면 마지못해 따라가는 식이었다.

결혼할 때부터 넉넉하지 못했던 살림살이 때문인지 나는 빚으로 놀러다니는 생활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일단은 남의 빚과 은행 빚부터 다 해결해 놓고, 우리 아파트도
사놓고 나서 그 뒤에 마음 편히 놀러 다니고 싶었고, 영화나 연극, 놀이공원 등 여유
있는 삶도 미래를 위해 유보하고 나중에 보상해주고 싶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는
계속 자신에게 투자하고 자기계발 노력의 기간으로 생각했고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여지껏 단 한번도 내가 먼저 놀러가자는 제안을 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집사람을 먼저 보내놓고 보니 뚜렷히 이루어 놓은 것도 없으면서 집사람 마음만
불편하게 한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람과 시간은 결코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다음에 빚을 다 갚고, 애들도 키워놓고,
우리 집도 사서 노후에 둘이 손잡고 여행도 다니고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큰애 집에,
다음 날은 둘째 집에, 그 다음날은 막내 집을 들러보며 알콩달콩 살자고 했건만 나에게
큰 짐과 더 이상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남겨놓은채 훌쩍 떠나버린 한 여인을 그리며
나는 석모도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제 석모도에서 집사람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내일 당장 이 자리에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집에 돌아와 내일 강화도를 놀러가지고 하니 가족들이 깜짝 놀란다. 한번도 먼저
놀러가자고 한 적이 없던 내가 그런 제안을 하니 다들 반신반의하며 놀란다.
장모님은 그렇지않아도 10월 31일에 절에서 방생법회를 간다고 연락이 왔는데 가고는
싶은데 몸이 불편하고 사찰까지 오고 갈 일이 까마득하여 포기했는데 잘되었다며
기뻐하며 따라나섰다.

이렇게 나는 석모도를 어제 부서 체육행사로 한번, 오늘은 가족과 함께 한번 연거푸
두번이나 가게 되었다. 마침 집사람 제사를 앞두고 어제 집에 온 큰애까지 데리고
함께 다녀오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하다. 앞으로는 조금씩 경제적인 어려움이
하나 둘 잘 풀려나가고 있으니 큰 비용부담이 없는 범위 내에서 자주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며 살고 싶다. 앞으로는 뒤에 후회를 남기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매일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하여 업무시작전 30분과 점심시간 후 40분이 나에게는
꿀맛같은 휴식시간이자 칼럼을 쓰는 시간이다. 아침에는 사내근로복지기금이야기를,
점심시간에는 일찍 식사를 하면 40분정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소중한
개인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이 시간을 이용하여 열정과도전 칼럼을 쓴다.

오늘은 쌍둥이 녀석들 기말시험을 치르는 날이다.
며칠전부터 애들이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백마초등학교는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는다고 중간고사를 치르는 정발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고 떼를 쓰던 막내
재윤이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학원에서는 선생님들이 더 난리이다. 학원수강생들이 학교에서 1등을 했다고
하면 학원 위상이 올라가므로 학생들을 늦게까지 보충을 시키며 정성을 쏟고
있다. 학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전교 1등이나 반에서 1등을 하면 학원비 1개월
분을 탕감해주는 당근책도 쓰고 있다. 자연히 쌍둥이들끼리 경쟁도 치열하다.

쌍둥이형제이고 지어미 뱃속에서 열달을 함께 있다 나왔는데도 녀석들 성격은
각자 다르다. 재명이는 성격이 나를 닮아 끈기가 있고 고지식하며 하지 말라고
해도 숙제며 준비물을 스스로 잘 챙기고 공부도 알아서 잘한다. 막내인 재윤이는
지 어미 성격을 그대로 쑥 빼닮았다. 리더십도 있고, 친화력이 좋아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한번 하겠다고 결심하면 열심히 한다. 애교도 만점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니
잘한 점은 칭찬을 해주면 더 열심히 한다. 한동안 나와 할머니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 불량식품을 사먹고 다기기에 걱정을 했는데 6월부터 용돈을 주고나니
이제 지갑에는 손을 대지 않아 다행이다.

쌍둥이들은 경쟁심이 강하다. 서로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내겠다고 보이지
않게 경쟁이 치열하다. 올 3월까지만 해도 재명이가 공부를 더 잘했는데 4월에는
비슷하더니 5월에는 재윤이 성적이 더 좋았다. 특히 지금껏 학원에서 1등을 하고
다른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던 여학생을 앞지르고 나서는 자신감이 부풀어
있다. 반면 재명이가 위축되기 시작한다. 동생이 치고 올라가자 공부를 소홀히
하고, 숙제도 해가지 않고 게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내 속을 태우고 있다.
어제 밤과 아침에는 기도를 해달라고 하여 시험을 잘 치르라고 특별기도를
해주었다.

쌍둥이들은 잘 다툰다. 오늘 아침에도 전과를 서로 가져가겠다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티격태격 밥도 먹지않고 두녀석이 싸웠다. 월요일부터 재명이가 전과를
학교에 두고 다니는 바람에 재윤이가 공부를 못하였다고 불평을 했는데 오늘은
사회와 국어, 과학 전과를 서로 학교에 가져가겠다고 다투는 것이었다. 전과가
한질에 25,000원인데 각자 사주면 좋겠지만 부담이 되고 똑같은 것을 두개씩이나
사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한권만 사주고 대신 사이좋게 공부하겠다고 다짐을
받았는데 소용이 없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서로 꼭 가져가겠다는 오기와 자존심
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다투고 있다. 장모님은 그러니까 지난 4월에 전과를
사줄 때 각자 사주라고 했는데 하나만 사니 이런 일이 생겼다며 "자네가 알아서
정리하게"하며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

7시 10분까지 식사를 마치라고 했는데도 그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재명이의 밥상을 모두 치우고 재명이는 사회를, 재윤이는 국어와
과학 전과를 가져가라고 겨우 정리해주고 허겁지겁 통근버스를 타러 집을 나왔다.
통근버스를 타고나서도 두녀석들 기분을 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에 집으로
전화를 하여 재명이와 재윤이에게 시험을 잘 치르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녀석들이 시험을 잘 치렀나 걱정이
된다. 형편이 허락되면 팍팍 밀어주고 어려움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자식을 둔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겠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에게는 장모님이 어머니 이상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신 탓에 어려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내가 장손이면서 막내삼촌과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막내삼촌에게 쌍둥이처럼 같은 옷을 입혔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둘째 작은아버지께 초등학교 2학년 10살때 처음 들었다.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외할아버지가 당시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는데
어머니는 '설교장댁 셋째딸'로 불리셨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몰래 행랑채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지만 과거 결혼사진은 모두 치워버린 탓인지
사진을 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사진을 내가 입수한 것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본 사진 속 어머니는 참 낯설었고 어머니란 단어는 많은 기간
홀로서기에 익숙했고 살기에 힘든 탓인지 그리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단어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탓으로 이응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단어가 '어머니'였다. 중학교때인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새어머니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여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부른 것이 아니고 말더듬 때문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정말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또한 초등학교 6학년 3월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로 나가 자취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었다.

그런데 결혼하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생겨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1년은 바로 집 옆에서 그 이후는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
생소하고 어색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장모님이 휠씬 나에게는 정감있고 좋았다.
집사람과 장모님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장모님이 훨씬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장모님이라 계속 불렀다. 중풍과 고혈압으로
17년째 투병중이시던 장인어른은 결혼후 2년 7개월동안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평소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이다"라고 말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주조장을 하던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장모님이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장인어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어른은 결혼당시
고대법대에 재학중이었는데 6.25전란중 군대를 가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느라
졸업후에도 반듯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겁이 많고 입대시기를 놓쳐 나이가 들다보니
군대를 가면 힘들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았다.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을 넣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돈을 쥐어주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미군부대
PX관리원 자리가 나왔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둘째 동생을 취직시켜 주었고 은혜를 꼭
갚겠다던 둘째동생은 그것을 기반으로 백조관광이란 회사를 차려 갑부가 되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수씨가 회사를 인수하여 시댁과는 일체 내왕을
끊어버렸다.

장인어른이 직장이 없어 장모님이 쌀가게를 운영하시며 40킬로그램이 넘는 쌀을
머리에 이고 용산 보광동 비탈길을 배달하며 가계를 꾸리며 사남매를 키우셨는데 병으로
남편을, 가장 든든하게 믿었던 딸자식을 유방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큰처남은
이혼하고 연락을 끊고 사는 등 굴곡많은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시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셨겠는가? 집사람도 나에게 유언으로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하고
장모님께는 "엄마! 나를 생각해서 김서방과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장모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장모님 성격을 그대로 빼어닮아 사람 잘 챙겨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고 카리스마가 강해 살림을 놓고 장모님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나는 아예 살림을 모두 장모님께 맡기고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사위인
내가 일주일에 10만원씩 드리는 용돈조차도도 모두 쌍둥이들 간식에 모두 쓰실 정도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시고 빈틈이 없으셔서 일을 두고 쉬지도 못하신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이사 이후 짐 정리도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일을 두고 쉬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집안 청소며 주방가구 정리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집사람 사진을 보며 "힘들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하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직장에,
일에 전념하는지 모른다. 이번 이사 때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다음 이사 때는 꼭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고 침대도 장만해 드려야겠다.

장모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통장을 조회해 보니 입금자가 아버지 이름으로 20만원이 찍혀 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께서 전화를 주시어 이사는 잘 했는지, 가까이에
있으면 어찌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들여다보지
못하신다고 미안하다며 이사하는데 식사비에 쓰라고 돈을 조금 보내시겠다고
하시기에 그만 두시라고 했는데 기어이 20만원을 보내주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5월, 어버이날 때 내려가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내가 송금해드린 돈 20만원을 아버지가 안쓰고 아껴 두셨다가 도로 나에게
보내신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너무 안타까운 모양이다. 작년 추석 때는
큰애 규와 쌍둥이 손주를 앞에 앉혀놓고 "너희 아빠는 학교 다닐때 하나도
성가시게 하지 않고 자랐다. 집안이 어려워 학교를 보낼 처지도 되지 않아
남들 가는 학원도, 과외도 시켜주지 못했는데 혼자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갔고,
대학을 다닐 때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집 도움없이 스스로 학비 벌어서
대학을 마쳤다"하시며 장황하게 내가 자라고 공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나를 무척이나 대견스러워 하셨다.

그런 자식이 어버지의 불행한 전철을 그대로 따라 닮아가고 있으니 아버지
마음이 오죽 아프시겠는가? 집사람과 사별을 하고, 어린 자식들 데리고 살고,
아버지는 염전 때문에 기획사기꾼들에게 민사소송을 당해 고생하셨고 나는
개인회생을 신청해 이행 중에 있으니... 다른 자식들은 일을 벌리며 손을
내미는데 나는 결혼할 때 달랑 100만원 보태준 것 이외 집사람이 암투병
중일 때도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도 네째동생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큰며느리가 투병중인데도 병원비 한푼 도움을 주지
못하시고 집사람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전화를 하였는데도 큰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고 집사람 장례식 때도 올라오지를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기에 오시면 충격을 받고 건강을 해치실까봐 나도 오시는 것을
말렸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돈은 세상의 20만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돈이고
소중하다. 아버지의 눈물과 사랑, 피끓는 父情이 스며있는 돈이기에 나에게는
수억원보다도 더 가치있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버지 저는 반드시 일어섭니다.
저에게 닥친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자식들도
훌륭히 키워낼 것입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토요일에 집 이사를 하고 나니 소소하게 들어가는 돈이 많다. 아파트 현관에서부터
주방, 욕실, 베란다 등 곳곳에 손보아야 할 곳 투성이다.

오늘 수도 절수기를 사기 위해 이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면서 큰맘 먹고 내 샌달
을 샀다. 자식들 샌달은 매년 또는 격년에 사주면서 정작 내 샌달은 사지를 못했다.
8년전에 산 내 샌달이 바닥이 갈라져 2년전에 버리고 큰 애가 중학교때 신던 샌달이
있기에 내가 신고 다녔는데 그 마저도 작년 여름에 끈이 떨어져버려 작년에 사려다
조금만 더 참자 하며 버텼는데 올해는 새로 사야할 것 같아 몇번 고민하다가 드디어
오늘 저렴한 것으로 하나 구입해 버렸다.

한달전, 뉴코아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여름 양복이 하벌 있었는데 60% 세일을
해준다고 사라고 해도 금액이 39만원이나 되어 부담되어 선뜻 사지를 못하고 그냥
나왔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때 세탁물을 맡기러 갔다가 다시 들렀더니 현금가로 사면
4만원을 더 깎아주겠다며 양복을 자꾸 입어보라고 권한다. 못이기는척 입어보니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곧 이사를 해야 하고 자금 사정이 어찌될지
몰라 이사를 마치고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나와버렸다.
외부 강의를 해야 하기에 여름 양복이 필요하지만 요즘 자식들 교육비에, 이사에 돈이
많이 들어가기에 정작 내 양복을 구입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인가 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기호품 앞을 그냥 지나치려면 왠지 서운하다. 오늘도 이마트를 갔다가 올해
막 나온 햇옥수수를 7개 골라 2,780원에 세일을 하기에 골라서 구입했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자식들 얼굴이 떠올라 오늘 저녁에는 햇옥수수를 쪄서 함께 먹으면 되겠구나,
옥수수를 먹으며 행복해 할 녀석들 얼굴을 떠올리며 여러 아줌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좋은 것으로 7개를 골랐고, 바로 옆에서는 바나나도 세일을 하기에 매일 쥬스를
해드시는 장모님이 생각나 집어들었고, 알로에 음료가 눈에 띄기에 "아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가 알로에라는 것 아시죠?"하며 알로에를 사달라고 애교를 피우는
막내 재윤이 얼굴이 떠올라 또 알로에 음로수까지 카트기에 담아 사가지고 왔다.

이런 것들이 모두 행복이리라! 비록 생활이 넉넉치는 못하지만 자식들이나 가족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가벼운 발길!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고 고생하면 그만큼 가족이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이를 능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퇴직하신 선배님들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어느 선배님이 자식들을 화제로
떠올리며 딸을 둘 가진 사람은 금메달, 딸과 아들(순서대로)을 가진 사람은 은메달,
아들과 딸을 가진 사람은 동메달, 아들만 둘인 사람은 목메달이라 하여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그럼 쌍둥이를 포함하여 아들만 셋 있는 저는 뭐라 부릅니까?"
"가만있자 그럼 금, 은, 동, 목 밑에 뭐가 있나? 흙 토? 토메달, 흙메달?"
모두들 파안대소를 한다. 나만 아들이 셋이다.

요즘은 딸들이 부모를 더 잘 챙긴다. 장모님만 보아도 처남들보다는 처형이 멀리
서울 장안동에서 일산까지 매주 우리집에 들러 장모님과 점심 식사도 하고,
말상대도 되어주곤 하지 아들자식들은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경우만 해도 시골
아버지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를 드리는 것으로 때우고 있다.

그 선배님도 딸자식 둘 모두가 명절이면 모두 시집이 아닌 친정에 와서 3일간을
죽치고 버티고 먹고 자고 살다 간다고 엄살 섞인 자랑(?)을 한다. 최근에는
막내 딸과 사위 내외가 일주일간을 버티고 살다 가는 바람에 생활비가 배로
들었다고 자랑아닌 자랑을 한다. 제주 출신 사위를 얻으니 50분 거리라 명절에도
금새 돌아오고, 부산이나 목포 등 먼 지역 출신 사위를 얻어야 명절에 편히 쉴 수
있으며 가장 최악인 경우는 사돈이 미국이나 해외로 이민을 간 경우라고 한다.
시집이 해외라 갈 곳이 없으니 명절 내내 친정 집에서 비비고 있으니 아주
불편하다고 자랑 섞인 농담을 하신다.

나는 노후에 자식들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다.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후 직장에 들어가 결혼을 하면 그때는 분가시키고 홀가분하게 여행도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풍요롭게 보내리라! 올해 67세인 모 퇴직 선배님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그 선배님의 어느 동창은 자식이 S대 체육학과 출신인데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만 31켤레라고 한다. 신발장에는 자식의 골프화, 농구화,
축구화, 조깅화 등 갖가지 운동화와 사시사철 구두가 모두 차지하고 있고, 가장인
자신의 신발은 신발장 맨 밑 칸 한쪽편에 여름과 겨울 것 구두 달랑 세 컬레와
운동화 한 켤레가 그것도 위아래로 두겹으로 포개져 있다고 한다. 부인이 자식
신발은 매일 닦아주면서 남편인 자신의 구두는 한번도 닦아준 적이 없어 며칠전
크게 부부싸움을 했다고 한다.

자식에게 희생하고 나중에 소외당하는 그런 선배님의 모습이 바로 17년 후의
내 모습일 수 있다. 나는 다 큰 자식들에 치여 절절 매며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노후 경제력을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평생직업을
가지고 안정된 수입원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다. 내가 고통 속에서도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평생직업과 노후대책을 찿고 준비하는데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그동안 쌍둥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칭찬만 하리라던 나와의 약속을 깨고
나는 오늘 아침 막내인 재윤이 녀석에게 매들 들고야 말았다.

그제와 어제는 일산 지역에 단수로 물이 나오지 않아 학교 급식을 실시하지
않은 바람에 학부모들이 학생들 점심을 가져다 주느라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내가 회사를 가니 그 몫은 장모님이 맡아서 하시는데, 요즘 몸이 좋지 않은
장모님이 아프신 몸으로 종종걸음으로 김밥집에 들러 김밥을 사가지고
쌍둥이들에게 갔다주려고 백마초등학교를 갔는데 형인 재명이는 반갑게
나오며 "할머니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하며 인사를 하는데,
막내인 재윤이는 짜증을 내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라져 교실로 들어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재윤이가 아침에 카레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장모님은 한참 크는
애들이라 그래도 든든하게 김밥을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김밥으로 사가지고
갔던 것이 아마 녀석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왕 지난 일이라 서운해도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녀석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김밥을 가지고 와서 먹은 것은 반에서 자신 뿐이었으며
다른 친구들은 모두 카레며 맛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먹었다며 연신
불평을 쏟아내 장모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밤 9시 20분, 학원에 갔다와서도 재명이에게 계속 시비를 거며 다투기에
장모님이 더이상 참다못해 재윤이에 대해 느꼈던 섭섭했던 감정을 토해내신다.
내가 황급히 수습에 나서 재윤이가 오늘 잘못한 것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할머니께 사과드리라고 했더니 한사코 거부하며 고집을 피우다 매를 들려는
시늉을 하자 마지못해 할머니께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뭐가 못마땅한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러다 아침
밥상에서 또 별 것 아닌 것으로 고집을 피우며 밥 먹기를 거부하고 있기에
조심스레 마지막으로 경고를 했다.
"재윤아! 오늘 아빠가 하루 종일 한국생산성본부에서 강의를 하는 날이다.
아빠가 기분좋게 집을 나서야 멋진 강의가 되지 않겠니? 아빠가 매를 들지
않도록 도와주겠니? 그리고 어제 할머니께서 재윤이를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키워주셨는데 그런 은공도 잊고 짜증을 부리고 몸도 불편하신 할머니를
섭섭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재윤이 잘못이니 더 이상 우리 집 분위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하렴"

그래도 묵묵부답!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회초리를 들고 엉덩이를 몇대 때려
주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할머니 은혜를 잊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녀석의
행동을 한번은 바로 잡아주고 싶었었다. 아침에 했던 체벌의 탓인지 저녁때
학원으로 가서 가방을 들어주며 오면서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데 언행이 많이
변해져 있다. 애들은 애들인가? 때론 체벌도 꼭 필요한 때가 있으며 체벌
후에는 꼭 대화나 사랑, 관심으로 감싸고 껴안아 줄 필요가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요즘 며칠째 쌍둥이 녀석들이 다투고 싸우는 바람에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야단도 치고 화도 냈다. 아침부터 자식들에게 화를 내고 목청 돋구어 야단치고
나서 회사에 출근하면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고 에미도 없이 자라는 녀석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은 아닌지 반성도 되고 손에 일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으려 해도, 아침부터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두 녀석이 다투며 징징
눈물을 짜고 우는 것을 보면 울화가 벌컥 치밀어 올라 목청이 높아진다. 바쁜 아침
식사시간에 막내인 재윤이는 눈치가 빨라 재빨리 밥을 먹어치우지만 재명이는
눈치가 없어 밥도 편식을 하지 게다가 밥을 먹는 속도도 밥알을 하나하나 씹어먹듯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고 빨리 먹으라고 지적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빤히 쳐다보는 나쁜 버릇이 있어 답답하여 매번 지적을 해도 고치지
못하는 녀석에게 매번 짜증을 부리게 된다.

반복된 지나친 질책이나 꾸지람은 위축을 낳게 되고 부정적인 자아의식을 심어주게
되고 고착화시키게 된다는 것을 내가 잠시 잊었나 보다. 더구나 녀석들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내가 어른인 내 기준으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이제는 마음을 느긋히 가지기로 했다.

오늘 아침부터는 무조건 칭찬모드로 나가기로 했다.
"재명이와 재윤이가 아빠보다 더 일찍 일어났네"
"어~~ 부지런한데다 양말까지 신었네?"
"재윤이는 아빠보다 빨리 식사를 했네~~"
"재명이는 어제보다 더 빨리 먹었네..."

열심히 칭찬을 한 덕분인지 오늘 아침은 큰소리 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재명이와 재윤이도 오늘은 기분 좋게 밝은 모습으로 학교를 등교했다.

가족은 세상 어느 존재나 가치기준보다도 보다도 소중하다. 자식을 양육하면서
비판이나 역정보다는 칭찬이, 단점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발견해
이끌어 내는 것, 자식들 눈높이에서 생각을 하고, 자식들 의사를 존중해 주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임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지만 막상
우리는 실 생활에서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기대와 욕심, 비교가 때론 자식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백가지 이론보다는 단 한가지라도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하루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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