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남진이 부른 DJ추모곡이 20년만에 세상에 알려지게되어 화제이다.

서울경제신문 2009년 8월 28일자 기사에 따르면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직후 이도화씨가 작곡하고 가수 남진이 부른 ‘님오신 목포항’이 그것인데 이 노래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반려되며 빛을 보지 못했고 제작자인 김성일씨는 심의도 내지 못한 채 정보당국에 끌려가서 ‘왜 이런 노래를 만들려 하느냐’고 혼났다고 한다. 가수 남진씨도  당시 재야인사를 상징하는 ‘인동초 노래’로 지목 받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던 사연을 뒤늦게야 소개했다.

김성일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이나 직후에도 음반을 낼까 생각해봤지만 핍박 받던 시절에 만든 곡이라 이미 대통령이 된 뒤 조정된 화해무드에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서거하신 지금은 자연스럽게 추모곡 형태로 불릴 수 있을 것 같아 남진씨와 협의해 음반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사무곡이 추모곡으로 바뀐 '님오신 목포항'노래가 참 궁금해진다. 그토록 모진 핍박을 받고도 보복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몸소 실천하고 가신 분이라 왠지 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더 아프고 그분의 빈자리가 더 커보일 것만 같다.

아내도 생전에 DJ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겠지.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제 꿈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0) 2009.10.12
배우 장진영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0) 2009.09.01
그냥 눈물이 나네...  (0) 2009.07.02
쥐눈이콩  (0) 2009.05.27
돕는 배필  (0) 2009.05.17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ㅇㅇ씨에게 메일이 왔네.
당신이 그토록 아꼈던 후배인데,
ㅇㅇ씨에게 큰 부담을 주어 미안하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안터까워했지. 당신 하늘나라에서도  이 글 보고 있겠지?


잘 지내시죠...^^

언제나 밝아 보이는 모습이 좋아보여요.. ^^

   

언니가 돌아가신지도 꽤 시간이 지난것 같지만

형부 많이 힘드시죠...혼자서 아이들 키우기가..쉽지 않죠...


형부에게 마음으로 사과드리고 싶어 편지를 씁니다.

언니 아플때 아파트 찾아가서 언니와 형부에게

심적으로 고통을 주었던 점이 아직도 제 마음에 걸립니다.

그 맘때 저의 모든 개인적인 사정이 좋지가 않을때였습니다.

언니를 많이 의지했었고, 언니처럼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언니에게 직접 물어보고 듣고 싶었던 나는 언니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찾아가서는 안될 행동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언니와 몇 번 얼굴을 보았지만,

병원에 입원했을때 간다간다하면서 가보지도 못하고

언니를 보낸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청아공원 시아주버님 옆 방에 언니가 있습니다.

언니가 하나님 만나서 천국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빨리 가버린 언니가 그립기도 하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안쓰럽기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형부에게 이 말을 해 드리고 싶어요.

저의 작은 마음으로 했던것들 용서하시고,

쌍둥이들과 형부 모두가 행복하게 좋은 시간들을 보냈으면 합니다.

언니가 열심히 살았기에 좋은 추억만 간직하시고요.


오늘도 행복하시고 다음에 또 뵐께요...^-----^


지금은 힘들지만, 내 당신과 한 약속 꼭 지킬께.
개인회생이 끝나면 내 여력이 허락되는 한 꼬~~~옥.
이제는 ㅇㅇ씨도 마음이 풀렸으니 나도 마음이 편하구먼...
그런데 왜 자꾸 내 눈에서 눈물이 날까?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우 장진영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0) 2009.09.01
남진, DJ 추모곡 '님오신 목포항' 20년 만에 화제  (0) 2009.08.30
쥐눈이콩  (0) 2009.05.27
돕는 배필  (0) 2009.05.17
체면도 버린다.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부르르' 저녁식사를 하는데 진동으로 해 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린다.
멀리 지방에서 상경한 회원사 직원들과 업무관련 논의를 하며 저녁식사를 하는데 시골
둘째작은아버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이다. 요란한 주변 사람들 말소리 때문인지 금새
밖에서 식사중이라는 것을 눈치채신다.
"승훈이냐! 밖에서 직원들과 식사를 하는 모양이구나. 오늘 쥐눈이콩을 택배로 보냈는데
잘 도착했는지 확인차 전화했다."
"일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 식사 중입니다. 그냥 집에서 밥에 놓아 드시기 번거롭게 저희
집에까지 보내주셨어요"
"쥐눈이 콩을 보니 쌍둥이엄마와 쌍둥이들 생각이 나더구나. 보내주면 쌍둥이들 잘 먹을 것
같아서 조금 보냈다"
"아직 집에 들어가지를 못했는데요 집에 도착하면 확인해보고 전화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께요"

지난 2005년 5월, 집사람이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쥐눈이콩이 암 치료에 효험이 많은
항암식품이라는 기사를 보고 시골집으로 쥐눈이콩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5월
하순이면 쥐눈이콩은 이미 수확철이라 그 해에는 쥐눈이콩을 파종하지 못해 결국 마을에서
이집 저집 부탁하여 겨우 구해서 보내주셨다. 이듬해 2006년 시골 우리 논두렁에는 온통
쥐눈이콩으로 삥 둘러쌓이게 심었고 집사람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까지 끊이지 않고
쥐눈이콩을 보내주셨다.

밤 11시 15분에 집에 도착해보니 조그만 박스에 막 수확한 듯 싱싱한 쥐눈이콩이 박스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장모님이 이미 1/4쯤 까서 놓아두셨다. 요즘 몸도 좋지
않으신데 그냥 주면 상해서 버린다고 그 아픔 몸으로 일부러 까신 모양이다. 저녁 6시 30분에
회사 일로 늦는다고 전화를 했을때 서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럴줄 알았으면 양해를 구하고 좀 더 일찍 들어올껄....

대충 씻고 밤 11시 40분부터 콩깍지를 까지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란 탓에 이런
콩까기는 잘 하는데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것들이 많아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조금만 까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장모님이 내일 또 아픈 몸으로 손대실 것 같아
한줌만 더, 이번 한줌만 더...하고 까다보니 어느덧 열줌이 되고 스무줌이 되고....조금만
더 하며 계속 까다보니 나중에는 큰애까지 합류하여 도와주어 결국 밤 1시 45분에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두시간 넘게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콩깍지를 깠더니 눈도 시리고 허리도
아프고 팔다리도 쑤신다. 그래도 나는 젊으니(?) 괜찮지만 장모님은 저만큼을 까시느라
오늘 얼마나 힘드셨을까?

모두 마치고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거실에 걸려진 가족사진 속 집사람 얼굴이 오늘따라
나에게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한소망교회 주일 설교 제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였다.
창세기 2장 18절부터 25절까지 읽어내려가는데 첫 18절에서 목이 매이며 가슴이
아려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래 당신은 나에겐 둘도 없는 참된 '돕는 배필'이었지... 내 부족한 점이나 고칠 점은
알려주고 결혼전까지 오직 혼자서 앞만 보고 살아오느라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 챙기지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나 혼자만 살기에 급급했던 지독히도 이기적인 나를 사람답게
살도록, 베풀고 살도록 사랑이란 단어를 내 가슴에 지펴놓고 갔지.

나는 처음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냉정하고 얼음처럼 차갑고
현실적인 사람이었지. 아버지, 어머니 생신 때 선물 챙겨서 보내드리고, 명절 때마다
제사음식 모두 준비해서 내려갈 때, 시골을 내려갈 때는 마을 친척들 선물까지 여유있게
준비할 때마다 내 궁시렁댔지. "우리 형편도 어려운데 무슨 친척들 선물까지 챙기냐고..."
"제사 음식을 왜 우리만 준비해야 되느냐? 동생들도 있는데 함께 나누어 준비하면 되잖소"

그럴 때마다 당신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지.
"나도 좋아서 이런줄 아느냐. 우리 형편껏 가진 것 베풀고 살면 다 이게 당신 덕으로,
당신 복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나중에 자식들이 다 보고 배우게 되요", "지금 시동생들
모두가 어렵잖아요? 우리 형편이 그래도 가장 나으니 우리가 해야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와의 서먹했던 관계, 동생들과의 형식적인 관계를 가족으로 회복시킨
것도 모두 당신 덕분이었지. 어머니 회갑 잔치도 당신이 주도적으로 준비하여 동네 친척들
모셔다 집에서 치르고, 가족들, 동생들, 친척들 대소사에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결국 그
모든 공치사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자식들이 지금껏 아비 어미 말에 순종하고 바르게
자랐던 것도 모두 당신 역할이 컸다는 것을 한참 뒤늦게야 알았지.

지금껏 살면서 당신이 나를 일방적으로 돕는 배필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당신을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당신이 내 곁에 없으니 나는 이제 어이 해야
하나요? 그동안 당신에게 진 빚을 내 어찌 갚아야 하나요?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눈물이 나네...  (0) 2009.07.02
쥐눈이콩  (0) 2009.05.27
체면도 버린다.  (0) 2009.04.26
명절에도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0) 2009.04.26
그리고 2년이 흘렀다.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이 한가족처럼 지내는 서사장님 생신이라 넥타이를 선물하기 위해
영등포 모 백화점을 나갔다.
 
넥타이 매장을 들러 가격을 살펴보니 젠장, 가격들이 넘 비싸다.
괜찮은 것은 죄다 10만원이 넘으니....평소 내 지론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넥타이는 자기 돈으로는 못산다. 누가 선물해주면 몰라도...)
 
판매원이 추천해주는 넥타이 세개를 앞에 놓고 흥정을 한다.
남자들은 흥정이라봤자 건성이다. 판매원이 부르는 가격에 대충 구입해 버린다.
그넘의 체면 때문에 깎아달라는 말 한마디가 도통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거 얼마예요?"
"네, 105,000원인데요"
"너무 비싸네"하며 한발짝 슬쩍 물러난다.
그러자 판매원 아가씨가 한발 다가선다.
"얼마정도 예상하고 오셨는데요?"
"7~8만원정도 예상했는데..."(얼굴을 찡그리며 자못 심각하게...)
(잠시 판매원의 고민하는 얼굴 표정이 연출되며)
"지난주까지 20%할인행사를 했었는데, 그럼 20% 할인한 가격으로 드릴께요"
 
일순간 밀려드는 후회감...
(흐미~~~ 그런줄 알았으면 6~7만원이라고 말할껄.. 그랬으면 만원을 더 깎는건데...)
 
카드를 넘겼으니 흥정은 끝난 셈이다.
결국 105,000원서 21,000원 깎은 84,000원에 넥타이를 사가지고 왔다.
 
다시 한번 아내의 빈자리가 그리워진다.
집사람은 물건값을 너무도 기술적으로 잘 깎는 바람에
"혹시 장사하세요?"라는 소리를 너무도 많이 들었다(실제로 완구가게도 1년반 했고)
덕분에 나는 옆에서 흥정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3년전 집사람이 국립암센터에 입원해 유방암 투병중일때 이런 내 성격을 알고선
안타까운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며 말하곤 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물건 값도 제대로 깎을 줄도 모르는 물러터진 당신에게 우리
쌍둥이자식들과 엄마를 맡겨놓고 먼저 가려니 내 마음이 놓이지를 않네"
 
이제는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야지,
집사람이 했던 것처럼 물건 값도 제대로 깎고 살아야지...
 
2009.1.30.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쥐눈이콩  (0) 2009.05.27
돕는 배필  (0) 2009.05.17
명절에도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0) 2009.04.26
그리고 2년이 흘렀다.  (0) 2009.04.26
변치않은 사랑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결혼하게 되면 명절은 어디서 보낼거예요?"
"설과 추석 명절 중 한번씩은 우리집(처가)과 시골집에서 보내려고
합니다. 추석날이 할아버지 제사이니 설은 우리집서, 추석은 시골에서
보내면 되겠군요"
 
1887년 8월 집사람과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집사람이 당돌하게 나에게
묻기에 나는 내 의견을 말했고, 결혼후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22년간 그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집사람은 손위 처남과 손아랫 처남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도 혼자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장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명절 두번 모두 남편따라 시댁으로 내려가면 친정부모님이 적적할 것 같아
끊고 맺는 확실한 성격에 미리 단도리를 해두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살아있는 사람과의 약속도 약속이고, 이미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과의
약속도 약속이기에 이번 설명절에도 나는 올해도 시골 고향을 내려가지
않고 세자식들과 장모님을 모시고 살며 집을 지키고 있다.
 
무정한 사람같으니라고... 나를 만난 첫자리에서 나에게 그런 다짐을 받았으면
함께 설을 보내며 맺어진 부부의연 사랑하며 백년해로 오래도록 잘 살아야지
나만 혼자 두고 이렇게 일찍 훌쩍 가버리면 나는 어찌 하라고....
 
덕분에 설명절 연휴 4일동안 2월에 열리는 한국생산성본부와 CFO아카데미
교육원고 작업을 할 수 있어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내린 폭설로
귀성길 고생하지 말고 힘들게 세 자식 키우고 살려면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멈추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고 생전에 그런 약속을 받아두지않았나 생각하고
위안을 삼는다.
 
다음카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운영자님이 용산참사에서 희생된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전체메일로 보내준 박병천님의 넋풀이를 듣고
있으니 그 애절함에 가슴이 미어지고 저려온다. 넋풀이를 부르는 박병천님도
작년에 생을 달리했지만 박병천님은 이렇게 음반이라도 남아있어 소리를 듣고
싶을 때 몇번이고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으나 당신은 목소리 하나 남겨놓지를
않았으니 그 맑고 고았던 음성을 어디서 다시 들을 수도 있을까?  
 
오늘따라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에서 남편인 폭군 광종이 폐홍을 앓고
있으면서 부인과 피붙이 어린 자식을 지키주기 위해 애쓰다 믿었던 최지몽에게
오히려 배신을 당하자 더 이상 지켜줄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황주원군을 불러
황제자리를 선위해 주는 조건으로 부인과 어린 자식의 신변을 지켜줄 것을
다짐받고 황위를 선위하고 죽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광종이 죽기전 했던 말이 내 가슴을 울린다.
"당신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내 진즉 성군이 되었을텐데 왜 이리 늦게
만났단 말이오. 당신에게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의 남편으로서 나를
기억해 줄 수 없겠소."
 
2009.1.24.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돕는 배필  (0) 2009.05.17
체면도 버린다.  (0) 2009.04.26
그리고 2년이 흘렀다.  (0) 2009.04.26
변치않은 사랑  (0) 2009.04.26
우리는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리!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집사람이 내곁은 떠난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월 참 무심하기도 하지...벌써 집사람이 내 곁을 떠난지가 2년이 되었다니...

집사람을 보내고 그동안 앨범을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쁘기도 했지만 앨범을 보면 자꾸만 아내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지난 아픔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오는 17일 방송되는 Q채널 '선물'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에서 애들 어릴적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제 밤 늦게 부랴부랴 세자식들 사진을 챙기느라
앨범을 펼쳐보게 되었다.

집사람의 어릴적 사진, 나와 교제하면서 찍은 사진, 결혼 사진, 신혼여행 사진,
신혼집에서 큰애를 얻었을 때 사진, 애들 어릴때 목욕사진, 여행 사진들을
속의 행복했던 시절을 보고 있으니 그리움이 복받쳐 온다. 사람은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지만 우리 부부는 어찌 이다지도 일찍 헤어지게 되었는가?
세 자식, 특히 어린 쌍둥이 자식과 연로하신 장모님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병상에 누워 마지막으로 나에게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
"우리 엄마 잘 부탁해!"하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하던
모습이 다시 눈가에 어른거리며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것이 모정이고,
먼저가는 불효여식이 어미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효도라는 것을 알기에...

무정한 사람! 이렇게 일찍 갈거면 차라리 나와 만나지 말고 더 좋은 사람
경제적으로 더 여유있는 사람과 만나 하늘에서 주어진 수명 누리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다가 가지 어쩌다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한 나를 만나 사내 애들만
셋, 게다가 쌍둥이자식까지 낳아 이토록 고생만 하다 갔는지... 내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나는 어이하라고...

지난 10월 18일 Q채널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청아공원의 집사람이 안치된
곳에서 한참을 있었더니 김승희PD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느냐고 짖굳게
질문을 한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지난 21년 4개월전 집사람을 처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들 셋을 낳아 키우며 행복하면서도 힘들게 살아왔던, 그리고 집사람 유방암
말기판정, 지긋지긋한 유방암 투병생활, 끝내 아내와의 사별, 싱글대디로 애들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과정이 그저 꿈만 같다. 꿈이라면 깨어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지만 이건 돌이킬 수도 없으니...

그렇지만 슬픔에 빠져있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남겨진 나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세 자식들이 자라고 있고, 집사람과의 약속,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꿈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2008.11.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카페 한줄메모장에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책상위를 보니 박카스 한병과 피로회복제가 포장되어
올려져 있더군요~! 들여다보니 메모에 "XX오빠 잘 부탁합니다!!"... ㅋㅋㅋ
xx님 밑에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의 여자친구가 보낸거더군요~ ㅋㅋ
어찌나 귀여운지...

안보아도 눈에 선하다. 남친이 입사를 했는데 여자친구가 미리 직장 상사에게
잘 보아달라고 선물로 애교공세를 펼치는 모습.

사랑할 때는 상대의 모든 것이 장점으로 보인다. 사랑은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위대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왠만한 결점이나 단점도 쉽게 극복이 된다.

그러나 사랑이 식었을 때는 감성보다는 이성의 힘이 크게 작용하여 따지게
되고 비교하게 되면서 불평과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리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집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서 나에게 '살면서 손찌검 한번 하지 않고, 항상
존댓말을 써서  애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내 기를 살려줘서 고마워' 했던
것처럼 나도 집사람이 다른 집 남편과 비교하여 '봉급을 많이 받아오라,
집안 일에 자상하지 못하다'는 등 불평하지 않고 내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배려한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살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유연한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사람에게 결혼전이나 신혼 초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고 무리이다.
자식을 낳는 순간 여자는 몸이 망가지게 되어 있고, 영양분을 자식에게 빼앗겨
피부도 거칠어지고 얼굴에 기미도 끼게 된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때로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도 참아야 하고, 남는 밥이나 반찬이 아까워 먹다가
몸매도 망가지고 체중도 불게 되고, 화장에 들이는 돈도 아까워 치장에도
소홀하게 된다.

오늘 올려진 글을 보면서 지금 사랑할 때 그 마음이 나중 결혼을 하고 나서도
변치 않고 계속되기를,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후 6시 20분. 내 휴대폰 벨이 연신 울린다. 우리 집이다.

장모님 : "난데, 오면서 떡집에 들러 동규엄마 제사상에 놓을 떡좀 사가지고 오소!"
나 : "네. 알겠습니다."

장모님은 내가 당연히 통근버스를 타고 오시는 줄 안다.
그런데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 때문에 통근버스를 타지 못했다.
택시를 타든지 아님 일산가는 직원차 편에 편승을 하든지...
아시는 선배님 자리에 전화를 했다.  선배님이 센터장님실에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문자메시지를 넣었다. 일찍 가시면 태워달라고...
한참 후에 온 전화는 7시 40분경이 되어야 퇴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영등포에 나가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조금 기다렸다 선배님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매한가지일 것 같아 선배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6시 50분부터 선배님 사무실에 올라가 기다리는데 도통 회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7시 40분이 다 되어 회의가 끝나고 그제서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서강대교를 지나 강변북로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7시 50분이 되니 집에서 또 전화가 걸려온다. 쌍둥이 목소리인데 장모님께서 내가
늦으니 애를 시켜 전화를 한 것 같다.

재명 : "아빠 지금 어디세요?"
나 : "응, 집에 가는 길인데 30분 정도 늦겠구나!"
재명 : "알았어요"

일분 일초가 바늘방석이다. 성격 급하신 장모님의 성화가 눈에 선하다.
차라리 6시 45분에 곧장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출발할껄~~ 후회가 밀려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 자유로에서 삼중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길이 온통 차들로 꽉 막혀 있다. 백석역에 내리니 8시 20분이다. 허겁지겁 인절미에
약식을 사들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오니 8시 55분이다.

집에 오니 처형과 동서, 처남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처형은 직장에서 하루
휴가를 내고 오늘 집사람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장만을 도와주셨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처형에게 도움을 청하면 항상 말없이 도움을 주시곤 한다.

우리집은 나와 쌍둥이자식들은 기독교, 장모님과 큰애 동규, 처형, 처남은 불교,
손위 형님은 뚜렷한 종교가 없으시다. 장모님이 차려놓으신 제사상과 상위에
놓인 집사람 영정사진을 보니 갑자기 참았던 그리움이 밀려든다. 영정사진을
보며 혼자 주절거려 본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당신 두번째 맞이하는 제사네. 참 세월 빨라,
당신이 나와 우리 가족을 떠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기 제사라니...
남겨진 세 자식 데리고, 장모님 모시고 좌충우돌 1인3역, 4역 정말 정신없이
살다보니 요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네.

당신에게 집안 살림 다 떠맡겨 놓고 편하게 살다가 당신이 유방암 말기 판정 받고
그제서야 허둥지둥 살림 하나하나 넘겨받아 꾸리며 남겨진 빚 갚아가며 살다보니
마음 편히 쉬어본 날이 없었지.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짐이 너무 무거워서
다리 쭉 뻗고 쉴 겨를이 없었지. 누군가는 그랬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산 자는 어떻게든 산다고..."
당신이 나를 떠나고 나서 내가 그 짐을 다 넘겨받아 헤치며 살아나가다보니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어.

결혼때 우리 부부는 꼭 백년해로 하자고 그토록 굳게 맹세했었는데,
어이하여 하늘이 우리 부부를 이다지도 빨리 생과 사로 갈라놓았는지
부부사별이라는 운명이 야속하고 또 야속했지만 살아서 받아야 하는 고통이
이다지도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다면 차라리 그 짐을 나 혼자 다 받아 감내하고
당신은 빚 걱정, 병원비 걱정, 힘든 암투병의 고통없는 곳에서 살게 주어야
겠다고 마음먹으니 그제서야 당신을 홀가분하게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었어.

우리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닐 거야!
그저 잠시, 당신이 주고간 선물인 세 자식을 훌륭히 키워 사회에 내보내 훌륭한
리더로 성장해 갈 그 때까지 아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네.
다시 만나는 날, 그때 나는 아마 훌륭히 성장해 우리나라를 이끄는 리더로 성장해
활약하고 있는 세 자식을 보며 웃는 모습으로 당당히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후회없이 살아갈테니 꼭 지켜봐줘...

2008.10.18.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고 2년이 흘렀다.  (0) 2009.04.26
변치않은 사랑  (0) 2009.04.26
얄궂은 추석차례상  (0) 2009.04.26
당신이 그리워질 때...  (4) 2009.04.26
사랑만 하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올 추석은 짧아서 시골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또한 작년에 집사람 제사상을 우리 집에서 차리지 않고 작은아버지 집과
동생 집에서 이중으로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모님이 크게 상심하여
은근히 추석때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냐고 묻기도 했었다.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남편이 차려주는 제사밥이 최고라네..."

그동안 집사람이 두 처남들을 대신하여 가장 역할을 하며 처갓집을 이끌어
왔던터라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의지했던 딸이 자신보다 먼저 갔으니 원통함과
안타까움, 그리움이 오죽하랴! 어느 수필가는 부모를 잃은 아픔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고통이 천붕지통보다 더
아픔이 크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기둥같았던 딸자식을 먼저 보낸 후의 세월이
얼마나 장모님을 힘들게 했었을까!

작년 추석때 이중 제사상 사건 이후 나에게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은경이
제사상 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차려주고 싶으니 그렇게 알고 있게" 하시며
단호하게 말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것이 모정이구나!'를 느끼며 콧등이
시큰해진다.

지난주말 시골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주말마다 농협하나로마트를
가면 제수용품을 하나하나 준비하신다. 오늘은 피문어 한마리와 햇쌀,
햇찹쌀을 고르신다. 지난주에는 내가 주신 용돈으로 아파트 장터에서
곶감과 병어를 미리 사두셨다고 귀띰하신다. 자연히 평소보다 시장비용이
훨씬 늘어나고 있다.

매년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집사람 손에 이끌려 미리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 제수용품으로 민어, 숭어, 도미, 장대, 병어 같은 생선을 사서 손질하고
말려서 시골에 가져가 제사상에 올리고 과일은 낱알이 굵고 큰 것으로 골라
차 트렁크에 실어 시골 내려갈 때 가져갔는데 이제는 내 손으로 제수용품을
사서 집사람 제사상을 차려야 하다니, 참 얄궂고 무정한 세월이로고!

추석이 다가오는 요즘 살아있을 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아쉬움이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 한켠에 더 크게 다가옴을 느끼게 한다.

2008.8.3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