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쌍둥이자식 스물네번째 생일이다.

동시에 지 어미 15주년 기일이다.

아들 셋에 만 아홉 살의 쌍둥이자식을 두고

뭐가 급하다고 그것도 쌍둥이자식 생일날에 서둘러

하늘나라로 갔다.

 

어제 논현동성당에 들러 쌍둥이자식을 위해

생미사를 올렸다. 애비가 자식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기도.

오늘도 출근길에 논현동성당에 들러 성모님상에

초를 올리며 자식들을 위해 기도한다.

 

내가 지금 건재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부모님의

기도 덕인 것 같다.

 

내가 만 두 살 하고도 23일만에 어린 나를 혼자 두고서

훌쩍 하늘나라로 가신 얼굴도 모르는 우리 어머니도

나를 위해서 하늘나라에서 내 수호천사가 되어 나를

지켜보시면서 지켜주시고 계시겠지.

 

밤이 되니 날씨가 더 추워지는구나.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어머니를 고양시 고봉산푸른솔공원 모셨다.

54년 8개월전 돌아가신 어머니.

나는 얼굴도 본 적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보려,

기억을 해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은 어머니.

어머니 시신은 온전하였다.

 

그동안 혹시나 수맥이나

나무뿌리로 인해 훼손이 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아담하신 체격,

54년 8개월이 지났음에도 어머니 시신은 온전하였다.

장례도우미분 말이 어머니께서 묻히셨던 묘가 명당이었다는

말에 비로소 안도하였다.

 

아버지나 친척분들에게 탐문하여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는 동갑,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조부모께서 서둘러 결혼시키셨고,

고등학교 3학년때 새신랑이라고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받으셨 아버지는 나를 낳고 고등학교 졸업 후 군입대......

군에서 신상명세서에 창피하여 미혼이라 기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나를 낳고 연년생으로 내 동생을 임신하여 나와

막내시동생이 동갑이어서 한 집안에서 세 자식을 키우기가

부담이 되어 내 동생을 유연하다 잘못되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는 어제 처음으로 이장을 앞둔 어머니 묘 앞에서

"여보 미안하오"를 외치며 어머니와 내 동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함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어제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

꿈에서도 한번 뵙고싶던 어머니를 서울 근처 납골당에 모셨다.

어머니를 납골당으로 모시고나서 아버지께 앞으로는 자식인

제가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고 전화를 드렸다.

이제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결정이 있기까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음력으로 어제가 내 생일~

내 짝이 나와 함께 멋드러진 시간을 보내 보고자 모처럼 휴가를 내었다.

물론 박사과정 중에 있으니 논문 준비로 국회도서관을 가야 하는 일이

휴가의 가장 큰 취지였지만.....

 

웬걸, 아침부터 사내근로복지기금 실무자들에게서 문의 전화가 온다.

약간의 여유를 부리며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시간 정도 늦은 아침을

먹었다.

 

둘째 아들이 제일 먼저 전화가 온다.

"오마니! 생신 축하 드리옵니당~~~"

"오냐! 고맙다!"

 

"건강하시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래 그래..... 마음만 받으마! 공부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는 넘이

어미생일이 뭐 대수일꼬! 걱정말고 니가 지금 처한 것에만 최선을

다하거라. 사실 내가 뭐 고생이냐 날 낳아주신 니 외할머니가 고생

하셨지!"

"ㅋㅋㅋ~~! 역시 우리 오마니스런 말씀이십니다!"

"그래 걱정말거라! 마음만 받으마~~!"

딸 인이는 일요일 오전에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더니 밤새워서 또 과제물

마무리 한다더니 지 코가 석자나 되는지 연락도 없다. 하기사 내 생일을

이틀 앞두고서 호두파이케익을 사주어 촛불부터 밝혀 버렸으니 오늘아침

내 생일날 축하메시지를 전해오지 않는 것쯤은 애교로 봐줘야징....

 

나는 오후 1시부터 있는 양천문화회관 강의를 들으러 출발하였고, 내짝은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내짝답다. 자료 찾느라 홀딱 정신이 빠져 연락이 없다.

양천문화회관에서 강의를 듣고서 집에 오니 4시가 가까웠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었는데.... 기다리다 잠시 낮잠이 들어버렸다.

딸인이에게 보낼 겨울옷 택배박스를 우체국에 가져가는 중에 내짝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 그냥 집에서 먹자 나 낮잠을 잤더니 피곤하네...!"

"아니야! 오늘이 당신 생일인데 그럴 수는 없지 약속장소에서 만납시다!"

약속장소로 가는 중에 큰아들 규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아빠한테 말씀 들었습니다. 엄마생신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금 가도록

할께요 저녁식사 제가 사드릴께요!"

 

'아이구~ 아니야! 그냥 너의 그 마음만 받으마, 오늘이 월욜이고 할 일도 밀렸을텐데 걱정말거라! 올것 없다.담에 니가 직장에 안정적으로 뿌리 내리고 너의

자리를 튼실하게 만든 다음에 밥 사줘라, 그땐 마음 편히 먹으마!"

 

"엄마 그래도 오늘 생신이신데.....!"

말은 다 안해도 직장생활 뻔할테고 월요일 무리하고 나면 일주일이 힘든 법.....

"아들! 니 마음만 받으마, 고맙다! 열심히 살아줘서~~!"

 

내짝과 손을 잡고 우리가 처음 만난 그 곳을 잠시 들른 다음 오붓하게 저녁식사를 하였다. 다섯자식이 있어도 각자 모두들 바쁘니 함께 하는 이는 내짝이다.

 

부모는 되도록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억지 쓰고 고집피워 자식 힘들게 하는 부모들 얘길 가끔 들을라치면 난 한숨

부터 나온다. 자식이 힘든 건 곧 내가 힘든 것이지 않을까!

나는 내 다섯자식들이 각자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데 되도록이면 방해를 주고

싶지 않다. 무탈하게 묵묵히 건강한 모습으로 공부면 공부, 직장일이면 직장일을 차근차근 성실히 해 나가는 자식이면 족하다.

 

해마다 오는 생일, 누구나가 다 맞이하는 생일!

너희들의 마음만 받으마!

나는 오늘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기린다. 날 낳아주신 내 어머니를!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 저녁 마을 친구들 모임을 치르고 나서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 아내의 아침밥을 먹자는 채근에 못이겨 눈을 떴다. 아내가 시골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나를 바꾸어 준다. 꼼짝없이 일어나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어버이날인데도 찿아가 뵙지도 못함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아버지는 연신 허허~ 웃기만 하신다. 아내를 바꾸어주니 수화기를 타고 아버지의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형제는 5남. 딸자식이 없는 탓인지 아버지는 며느리를 이뻐해 주신다. 지난 설날에 아내와 결혼소식을 전하기 위해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흡족해 하시며 喪妻한 후 혼자가 되어 자식을 키우는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며 매우 좋아하셨다.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고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도 효도이겠지....  

어려서 엄마를 잃으면 평생 슬프고, 어려서 아버지를 잃으면 평생 외롭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나를 낳고 나서 1년 2개월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나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반반씩 섞여 있다. 오늘 한소망교회 류영모담임목사님 주일설교도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은혜를 상기시키는 내용이 많다. 막내 재윤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요즘 전도사가 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부모와 대립각을 세우며 속을 태우고 있다. 좀 더 공부에 집중하여 큰 인물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받았으면 좋겠다고 설득을 하지만 요지부동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전도사가 되겠다는 녀석의 꿈이 못마땅한 것이 아니고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찬양팀에 올인하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녀석이 안타깝다. 일주일 중 토요일과 이틀을 서울 목동에서 파주에 있는 교회까지 왕복하며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그렇게 찬양팀에 시간을 보내면 언제 공부를 할꺼니?" 물어도 찬양팀에서 활동하고 싶단다. 재윤이의 거듭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부에 대한 도피처로 전도사가 되겠다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구심이 든다. 오늘 셀모임에서 김민숙집사가 고3인 딸 성적 때문에 요즘 자주 다투게 된다며  속상하다는 울먹임을 듣고 나서일까 나도 공부를 해야 할 시기에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녀석에게 꺾이고 싶지 않다.  
 
형인 명이는 이제 수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확실히 새기고 차근차근 공부를 하는데 방황하는 막내가 안타깝다. 주일만되면 꼭두새벽부터 교회를 혼자라도 가겠다고 고집부리며 도끼눈을 하고 빨리 하라고 채근하는 녀석 때문에 온 가족이 바늘방석이 된다. 자식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가겠다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잡아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어버이날인 오늘 오후에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정신 차리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좀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라고, 전도사가 되고 싶으면 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네 결정이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라는 것을 성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아내도 "재윤이 네가 앞으로도 공부를 등한시 한 체 계속 교회 찬양팀을 기웃거린다면 다음주부터 한소망교회를 나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버이날에 부모 속을 뒤집고 제고집을 피우는 막내 윤이도 나와 아내가 사랑과 원칙을 가지고 임한다면 시간이 흐르면 결국은 삐걱거림도 바로잡아지겠지. 끝없이 나와 아내를 시험하려 드는 막내녀석..... 나중에 실패한 자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나와 아내는 오늘도 머리를 맞대고 녀석과 신경전을 벌인다. 훗날 윤이와 웃으면서 추억이야기로 2011년 중2학년 때의 전도사의 꿈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겠지... 

쌍둥이아빠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에게는 장모님이 어머니 이상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신 탓에 어려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내가 장손이면서 막내삼촌과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막내삼촌에게 쌍둥이처럼 같은 옷을 입혔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둘째 작은아버지께 초등학교 2학년 10살때 처음 들었다.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외할아버지가 당시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는데
어머니는 '설교장댁 셋째딸'로 불리셨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몰래 행랑채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지만 과거 결혼사진은 모두 치워버린 탓인지
사진을 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사진을 내가 입수한 것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본 사진 속 어머니는 참 낯설었고 어머니란 단어는 많은 기간
홀로서기에 익숙했고 살기에 힘든 탓인지 그리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단어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탓으로 이응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단어가 '어머니'였다. 중학교때인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새어머니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여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부른 것이 아니고 말더듬 때문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정말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또한 초등학교 6학년 3월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로 나가 자취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었다.

그런데 결혼하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생겨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1년은 바로 집 옆에서 그 이후는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
생소하고 어색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장모님이 휠씬 나에게는 정감있고 좋았다.
집사람과 장모님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장모님이 훨씬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장모님이라 계속 불렀다. 중풍과 고혈압으로
17년째 투병중이시던 장인어른은 결혼후 2년 7개월동안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평소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이다"라고 말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주조장을 하던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장모님이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장인어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어른은 결혼당시
고대법대에 재학중이었는데 6.25전란중 군대를 가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느라
졸업후에도 반듯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겁이 많고 입대시기를 놓쳐 나이가 들다보니
군대를 가면 힘들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았다.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을 넣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돈을 쥐어주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미군부대
PX관리원 자리가 나왔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둘째 동생을 취직시켜 주었고 은혜를 꼭
갚겠다던 둘째동생은 그것을 기반으로 백조관광이란 회사를 차려 갑부가 되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수씨가 회사를 인수하여 시댁과는 일체 내왕을
끊어버렸다.

장인어른이 직장이 없어 장모님이 쌀가게를 운영하시며 40킬로그램이 넘는 쌀을
머리에 이고 용산 보광동 비탈길을 배달하며 가계를 꾸리며 사남매를 키우셨는데 병으로
남편을, 가장 든든하게 믿었던 딸자식을 유방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큰처남은
이혼하고 연락을 끊고 사는 등 굴곡많은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시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셨겠는가? 집사람도 나에게 유언으로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하고
장모님께는 "엄마! 나를 생각해서 김서방과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장모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장모님 성격을 그대로 빼어닮아 사람 잘 챙겨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고 카리스마가 강해 살림을 놓고 장모님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나는 아예 살림을 모두 장모님께 맡기고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사위인
내가 일주일에 10만원씩 드리는 용돈조차도도 모두 쌍둥이들 간식에 모두 쓰실 정도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시고 빈틈이 없으셔서 일을 두고 쉬지도 못하신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이사 이후 짐 정리도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일을 두고 쉬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집안 청소며 주방가구 정리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집사람 사진을 보며 "힘들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하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직장에,
일에 전념하는지 모른다. 이번 이사 때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다음 이사 때는 꼭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고 침대도 장만해 드려야겠다.

장모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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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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