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장모님이 어머니 이상으로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신 탓에 어려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부르며
자랐다. 내가 장손이면서 막내삼촌과는 동갑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막내삼촌에게 쌍둥이처럼 같은 옷을 입혔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고, 그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둘째 작은아버지께 초등학교 2학년 10살때 처음 들었다.
그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외할아버지가 당시 면소재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중이셨는데
어머니는 '설교장댁 셋째딸'로 불리셨다고 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 얼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몰래 행랑채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앨범을 뒤져보았지만 과거 결혼사진은 모두 치워버린 탓인지
사진을 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사진을 내가 입수한 것은 결혼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처음 본 사진 속 어머니는 참 낯설었고 어머니란 단어는 많은 기간
홀로서기에 익숙했고 살기에 힘든 탓인지 그리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운 단어로는
기억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말을 더듬었던 탓으로 이응자로 시작하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단어가 '어머니'였다. 중학교때인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새어머니가
내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여 야단맞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안부른 것이 아니고 말더듬 때문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정말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또한 초등학교 6학년 3월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로 나가 자취하면서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왠지 낯설었다.

그런데 결혼하니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생겨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결혼과 함께 1년은 바로 집 옆에서 그 이후는 지금까지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
생소하고 어색한 어머니라는 단어보다는 장모님이 휠씬 나에게는 정감있고 좋았다.
집사람과 장모님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장모님이 훨씬 더 부르기
쉽고 친근하고 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그냥 장모님이라 계속 불렀다. 중풍과 고혈압으로
17년째 투병중이시던 장인어른은 결혼후 2년 7개월동안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은 평소 "여자 팔자는 두레박 팔자이다"라고 말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광주에서
주조장을 하던 유복한 부모 밑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장모님이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장인어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장인어른은 결혼당시
고대법대에 재학중이었는데 6.25전란중 군대를 가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느라
졸업후에도 반듯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겁이 많고 입대시기를 놓쳐 나이가 들다보니
군대를 가면 힘들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았다. 주머니에는 항상 비상금을 넣고
다니며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돈을 쥐어주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미군부대
PX관리원 자리가 나왔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 둘째 동생을 취직시켜 주었고 은혜를 꼭
갚겠다던 둘째동생은 그것을 기반으로 백조관광이란 회사를 차려 갑부가 되었지만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수씨가 회사를 인수하여 시댁과는 일체 내왕을
끊어버렸다.

장인어른이 직장이 없어 장모님이 쌀가게를 운영하시며 40킬로그램이 넘는 쌀을
머리에 이고 용산 보광동 비탈길을 배달하며 가계를 꾸리며 사남매를 키우셨는데 병으로
남편을, 가장 든든하게 믿었던 딸자식을 유방암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큰처남은
이혼하고 연락을 끊고 사는 등 굴곡많은 힘든 과정을 지켜보며 사시려니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셨겠는가? 집사람도 나에게 유언으로 "우리 엄마를 잘 부탁해!" 하고
장모님께는 "엄마! 나를 생각해서 김서방과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장모님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집사람이 장모님 성격을 그대로 빼어닮아 사람 잘 챙겨주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불의와는 타협을 모르고 카리스마가 강해 살림을 놓고 장모님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나는 아예 살림을 모두 장모님께 맡기고 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시고 사위인
내가 일주일에 10만원씩 드리는 용돈조차도도 모두 쌍둥이들 간식에 모두 쓰실 정도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시고 빈틈이 없으셔서 일을 두고 쉬지도 못하신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이사 이후 짐 정리도 쉬엄쉬엄 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일을 두고 쉬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집안 청소며 주방가구 정리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 오늘 낮에는 집사람 사진을 보며 "힘들다"고 푸념을 하셨다고 하신다.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직장에,
일에 전념하는지 모른다. 이번 이사 때 좀 더 넒은 평수로 이사하고 침대를 사는 것을
기대했는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다음 이사 때는 꼭 더 넓은
평수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고 침대도 장만해 드려야겠다.

장모님! 그때까지 건강하십시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통장을 조회해 보니 입금자가 아버지 이름으로 20만원이 찍혀 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께서 전화를 주시어 이사는 잘 했는지, 가까이에
있으면 어찌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은데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들여다보지
못하신다고 미안하다며 이사하는데 식사비에 쓰라고 돈을 조금 보내시겠다고
하시기에 그만 두시라고 했는데 기어이 20만원을 보내주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5월, 어버이날 때 내려가 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내가 송금해드린 돈 20만원을 아버지가 안쓰고 아껴 두셨다가 도로 나에게
보내신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너무 안타까운 모양이다. 작년 추석 때는
큰애 규와 쌍둥이 손주를 앞에 앉혀놓고 "너희 아빠는 학교 다닐때 하나도
성가시게 하지 않고 자랐다. 집안이 어려워 학교를 보낼 처지도 되지 않아
남들 가는 학원도, 과외도 시켜주지 못했는데 혼자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갔고,
대학을 다닐 때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집 도움없이 스스로 학비 벌어서
대학을 마쳤다"하시며 장황하게 내가 자라고 공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나를 무척이나 대견스러워 하셨다.

그런 자식이 어버지의 불행한 전철을 그대로 따라 닮아가고 있으니 아버지
마음이 오죽 아프시겠는가? 집사람과 사별을 하고, 어린 자식들 데리고 살고,
아버지는 염전 때문에 기획사기꾼들에게 민사소송을 당해 고생하셨고 나는
개인회생을 신청해 이행 중에 있으니... 다른 자식들은 일을 벌리며 손을
내미는데 나는 결혼할 때 달랑 100만원 보태준 것 이외 집사람이 암투병
중일 때도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도 네째동생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큰며느리가 투병중인데도 병원비 한푼 도움을 주지
못하시고 집사람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전화를 하였는데도 큰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고 집사람 장례식 때도 올라오지를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기에 오시면 충격을 받고 건강을 해치실까봐 나도 오시는 것을
말렸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돈은 세상의 20만원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돈이고
소중하다. 아버지의 눈물과 사랑, 피끓는 父情이 스며있는 돈이기에 나에게는
수억원보다도 더 가치있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버지 저는 반드시 일어섭니다.
저에게 닥친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자식들도
훌륭히 키워낼 것입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토요일에 집 이사를 하고 나니 소소하게 들어가는 돈이 많다. 아파트 현관에서부터
주방, 욕실, 베란다 등 곳곳에 손보아야 할 곳 투성이다.

오늘 수도 절수기를 사기 위해 이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면서 큰맘 먹고 내 샌달
을 샀다. 자식들 샌달은 매년 또는 격년에 사주면서 정작 내 샌달은 사지를 못했다.
8년전에 산 내 샌달이 바닥이 갈라져 2년전에 버리고 큰 애가 중학교때 신던 샌달이
있기에 내가 신고 다녔는데 그 마저도 작년 여름에 끈이 떨어져버려 작년에 사려다
조금만 더 참자 하며 버텼는데 올해는 새로 사야할 것 같아 몇번 고민하다가 드디어
오늘 저렴한 것으로 하나 구입해 버렸다.

한달전, 뉴코아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여름 양복이 하벌 있었는데 60% 세일을
해준다고 사라고 해도 금액이 39만원이나 되어 부담되어 선뜻 사지를 못하고 그냥
나왔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때 세탁물을 맡기러 갔다가 다시 들렀더니 현금가로 사면
4만원을 더 깎아주겠다며 양복을 자꾸 입어보라고 권한다. 못이기는척 입어보니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곧 이사를 해야 하고 자금 사정이 어찌될지
몰라 이사를 마치고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나와버렸다.
외부 강의를 해야 하기에 여름 양복이 필요하지만 요즘 자식들 교육비에, 이사에 돈이
많이 들어가기에 정작 내 양복을 구입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인가 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자식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기호품 앞을 그냥 지나치려면 왠지 서운하다. 오늘도 이마트를 갔다가 올해
막 나온 햇옥수수를 7개 골라 2,780원에 세일을 하기에 골라서 구입했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자식들 얼굴이 떠올라 오늘 저녁에는 햇옥수수를 쪄서 함께 먹으면 되겠구나,
옥수수를 먹으며 행복해 할 녀석들 얼굴을 떠올리며 여러 아줌마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좋은 것으로 7개를 골랐고, 바로 옆에서는 바나나도 세일을 하기에 매일 쥬스를
해드시는 장모님이 생각나 집어들었고, 알로에 음료가 눈에 띄기에 "아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가 알로에라는 것 아시죠?"하며 알로에를 사달라고 애교를 피우는
막내 재윤이 얼굴이 떠올라 또 알로에 음로수까지 카트기에 담아 사가지고 왔다.

이런 것들이 모두 행복이리라! 비록 생활이 넉넉치는 못하지만 자식들이나 가족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가벼운 발길!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고 고생하면 그만큼 가족이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이를 능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가족들을 데리고 근처 목욕탕을 갔다.
탕안에서 눈을 감고 긴장을 풀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되어보이는 사내 애가 탕안에서 장난치고 놀다가 내 다리를 밟고 넘어져 물을
몇모금 먹은 모양이다. 애는 곧장 일어나 아빠에게 갔는데, 나는 다리가 아프다고
말을 했는데도 애 아빠는 자식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사과를 시킬 생각은 않고
자기 자식이 물을 한두모금 마신 것에만 호들갑을 떨며 자기 자식만 챙기며
자식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가
버린다.

나는 평소 자식들이 잘못을 하여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면 꼭 가서 사과를
하도록 시키는데 오늘 애 아빠의 태도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행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자신으로 인해 물적 또는 심적 피해나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에게는 사과를 함으로써 서로가 화해하는 하는 참교육인 것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는 따끔히 지적을 하고 사과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식당이나 극장, 백화점, 할인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중장소에서 애들이
뛰면 부모들은 말려야 함에도 그냥 두며 바라보고 있고, 이를 나무라는 사람들을
오히려 애들 기죽인다고 역정을 내곤한다. 이렇게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지적하지 고치지 않고 잘못한 점에 사과를 하도록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자식은 성장해서도 잘못을 하고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참회할 줄도 모르고 남이 잘못하여 사과를 해도 용서할
줄도 모르게 된다.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정이 없어지고
각박해진다.

요즘은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면 곧 자신의 체면이 크게 깎이거나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것이며, 자존심이 상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생각들은
용서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이다. 자연히 사람들을 대할 때,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경쟁이나 파워게임,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개념
으로 대함으로써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한달전 큰애가 10년전 자신이 잘못했을 때 아빠가 버릇을 고친다고 자신더러
19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으라고 말했다고 나에게 아빠로서 그럴 수 있느냐고
그 이후 공포감으로 가위눌리며 살아왔다고 눈을 부릅뜨고 내게 대들었을 때
나는 "아빠가 너 버릇을 고친다고 그런 방법을 썼는데 당시 아빠 교육방법이
잘못되었구나. 그로 인해 네가 10년동안 심적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다니 정말
미안하다. 아빠를 용서해주렴"  하고 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었다.
그 이후 큰애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고 아빠와 자식의 좋은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에 때론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 용서는 실수를 줄여가며,
실수에 대해 관계를 회복시켜 조화로운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용기있는
행위이다. 용서의 의미를 생각하고 생활에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 퇴직하신 선배님들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어느 선배님이 자식들을 화제로
떠올리며 딸을 둘 가진 사람은 금메달, 딸과 아들(순서대로)을 가진 사람은 은메달,
아들과 딸을 가진 사람은 동메달, 아들만 둘인 사람은 목메달이라 하여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그럼 쌍둥이를 포함하여 아들만 셋 있는 저는 뭐라 부릅니까?"
"가만있자 그럼 금, 은, 동, 목 밑에 뭐가 있나? 흙 토? 토메달, 흙메달?"
모두들 파안대소를 한다. 나만 아들이 셋이다.

요즘은 딸들이 부모를 더 잘 챙긴다. 장모님만 보아도 처남들보다는 처형이 멀리
서울 장안동에서 일산까지 매주 우리집에 들러 장모님과 점심 식사도 하고,
말상대도 되어주곤 하지 아들자식들은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경우만 해도 시골
아버지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를 드리는 것으로 때우고 있다.

그 선배님도 딸자식 둘 모두가 명절이면 모두 시집이 아닌 친정에 와서 3일간을
죽치고 버티고 먹고 자고 살다 간다고 엄살 섞인 자랑(?)을 한다. 최근에는
막내 딸과 사위 내외가 일주일간을 버티고 살다 가는 바람에 생활비가 배로
들었다고 자랑아닌 자랑을 한다. 제주 출신 사위를 얻으니 50분 거리라 명절에도
금새 돌아오고, 부산이나 목포 등 먼 지역 출신 사위를 얻어야 명절에 편히 쉴 수
있으며 가장 최악인 경우는 사돈이 미국이나 해외로 이민을 간 경우라고 한다.
시집이 해외라 갈 곳이 없으니 명절 내내 친정 집에서 비비고 있으니 아주
불편하다고 자랑 섞인 농담을 하신다.

나는 노후에 자식들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다.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후 직장에 들어가 결혼을 하면 그때는 분가시키고 홀가분하게 여행도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풍요롭게 보내리라! 올해 67세인 모 퇴직 선배님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그 선배님의 어느 동창은 자식이 S대 체육학과 출신인데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만 31켤레라고 한다. 신발장에는 자식의 골프화, 농구화,
축구화, 조깅화 등 갖가지 운동화와 사시사철 구두가 모두 차지하고 있고, 가장인
자신의 신발은 신발장 맨 밑 칸 한쪽편에 여름과 겨울 것 구두 달랑 세 컬레와
운동화 한 켤레가 그것도 위아래로 두겹으로 포개져 있다고 한다. 부인이 자식
신발은 매일 닦아주면서 남편인 자신의 구두는 한번도 닦아준 적이 없어 며칠전
크게 부부싸움을 했다고 한다.

자식에게 희생하고 나중에 소외당하는 그런 선배님의 모습이 바로 17년 후의
내 모습일 수 있다. 나는 다 큰 자식들에 치여 절절 매며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노후 경제력을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평생직업을
가지고 안정된 수입원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다. 내가 고통 속에서도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평생직업과 노후대책을 찿고 준비하는데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그동안 쌍둥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칭찬만 하리라던 나와의 약속을 깨고
나는 오늘 아침 막내인 재윤이 녀석에게 매들 들고야 말았다.

그제와 어제는 일산 지역에 단수로 물이 나오지 않아 학교 급식을 실시하지
않은 바람에 학부모들이 학생들 점심을 가져다 주느라 한바탕 법석을 떨었다.
내가 회사를 가니 그 몫은 장모님이 맡아서 하시는데, 요즘 몸이 좋지 않은
장모님이 아프신 몸으로 종종걸음으로 김밥집에 들러 김밥을 사가지고
쌍둥이들에게 갔다주려고 백마초등학교를 갔는데 형인 재명이는 반갑게
나오며 "할머니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하며 인사를 하는데,
막내인 재윤이는 짜증을 내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라져 교실로 들어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재윤이가 아침에 카레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장모님은 한참 크는
애들이라 그래도 든든하게 김밥을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김밥으로 사가지고
갔던 것이 아마 녀석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왕 지난 일이라 서운해도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녀석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김밥을 가지고 와서 먹은 것은 반에서 자신 뿐이었으며
다른 친구들은 모두 카레며 맛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먹었다며 연신
불평을 쏟아내 장모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밤 9시 20분, 학원에 갔다와서도 재명이에게 계속 시비를 거며 다투기에
장모님이 더이상 참다못해 재윤이에 대해 느꼈던 섭섭했던 감정을 토해내신다.
내가 황급히 수습에 나서 재윤이가 오늘 잘못한 것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할머니께 사과드리라고 했더니 한사코 거부하며 고집을 피우다 매를 들려는
시늉을 하자 마지못해 할머니께 건성으로 사과를 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뭐가 못마땅한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러다 아침
밥상에서 또 별 것 아닌 것으로 고집을 피우며 밥 먹기를 거부하고 있기에
조심스레 마지막으로 경고를 했다.
"재윤아! 오늘 아빠가 하루 종일 한국생산성본부에서 강의를 하는 날이다.
아빠가 기분좋게 집을 나서야 멋진 강의가 되지 않겠니? 아빠가 매를 들지
않도록 도와주겠니? 그리고 어제 할머니께서 재윤이를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키워주셨는데 그런 은공도 잊고 짜증을 부리고 몸도 불편하신 할머니를
섭섭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재윤이 잘못이니 더 이상 우리 집 분위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하렴"

그래도 묵묵부답!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회초리를 들고 엉덩이를 몇대 때려
주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할머니 은혜를 잊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녀석의
행동을 한번은 바로 잡아주고 싶었었다. 아침에 했던 체벌의 탓인지 저녁때
학원으로 가서 가방을 들어주며 오면서 녀석과 대화를 나누는데 언행이 많이
변해져 있다. 애들은 애들인가? 때론 체벌도 꼭 필요한 때가 있으며 체벌
후에는 꼭 대화나 사랑, 관심으로 감싸고 껴안아 줄 필요가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요즘 며칠째 쌍둥이 녀석들이 다투고 싸우는 바람에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야단도 치고 화도 냈다. 아침부터 자식들에게 화를 내고 목청 돋구어 야단치고
나서 회사에 출근하면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고 에미도 없이 자라는 녀석들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것은 아닌지 반성도 되고 손에 일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으려 해도, 아침부터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두 녀석이 다투며 징징
눈물을 짜고 우는 것을 보면 울화가 벌컥 치밀어 올라 목청이 높아진다. 바쁜 아침
식사시간에 막내인 재윤이는 눈치가 빨라 재빨리 밥을 먹어치우지만 재명이는
눈치가 없어 밥도 편식을 하지 게다가 밥을 먹는 속도도 밥알을 하나하나 씹어먹듯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고 빨리 먹으라고 지적을 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빤히 쳐다보는 나쁜 버릇이 있어 답답하여 매번 지적을 해도 고치지
못하는 녀석에게 매번 짜증을 부리게 된다.

반복된 지나친 질책이나 꾸지람은 위축을 낳게 되고 부정적인 자아의식을 심어주게
되고 고착화시키게 된다는 것을 내가 잠시 잊었나 보다. 더구나 녀석들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내가 어른인 내 기준으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이제는 마음을 느긋히 가지기로 했다.

오늘 아침부터는 무조건 칭찬모드로 나가기로 했다.
"재명이와 재윤이가 아빠보다 더 일찍 일어났네"
"어~~ 부지런한데다 양말까지 신었네?"
"재윤이는 아빠보다 빨리 식사를 했네~~"
"재명이는 어제보다 더 빨리 먹었네..."

열심히 칭찬을 한 덕분인지 오늘 아침은 큰소리 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
재명이와 재윤이도 오늘은 기분 좋게 밝은 모습으로 학교를 등교했다.

가족은 세상 어느 존재나 가치기준보다도 보다도 소중하다. 자식을 양육하면서
비판이나 역정보다는 칭찬이, 단점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발견해
이끌어 내는 것, 자식들 눈높이에서 생각을 하고, 자식들 의사를 존중해 주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임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지만 막상
우리는 실 생활에서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기대와 욕심, 비교가 때론 자식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백가지 이론보다는 단 한가지라도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하루이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열정과 도전이 나를 지탱하는 내적 버팀목이라면 가족은 나를 지탱하는 또 다른 외적
버팀목이다.

오늘 퇴근하여 집에 와서 식사를 마치고 칼럼을 쓰고 있는데 재명이가 갑자기
생각난듯 나에게 묻는다.
"아빠! 우리집에 4절지가 있어요?"
"없는데, 왜?"
"내일 아침에 학교갈 때 가져가야 해요?"
"진즉 이야기하지 그랬니?"
"깜박 잊었어요"
"학교에서 어디에 쓸건데?"
"내일 수업시간에 교통안전 표어와 포스터를 그려야 해요"
"재윤아! 너도 내일 같이 필요하니?"
"네!"

늦은 밤, 비가 내리는데 부랴부랴 문구점까지 걸어서 4절지 4장(여유분으로 한장씩 더)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 오니 재명이가 또 말한다.
"아빠! 포스터물감과 붓도 있어야 해요"
"포스터물감과 붓? 집에 없니?"
"예, 없어요"
늦은 밤, 집안을 뒤졌으나 포스터물감은 없다.
다시 문구점에 가서 포스터물감과 붓, 그리고 붓을 넣어서 잘 간수하라고 아예 붓통까지
사가지고 와서 유성매직으로 포스터물감과 붓, 붓통에 각자 이름까지 써서 담아준다.

올해 대학생이 된 큰아들 동규는 이제는 손이 가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걱정해주며 어제
추석명절을 마치고 지방에 있는 기숙사로 떠나면서 쌍둥이 동생들을 조용히 불러 아빠가
열심히 일하시도록 아빠 힘들게 하지 말고, 점점 건강이 안좋아지시는 할머니도 힘들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어제밤에는 오랜시간 운전하고 온 나에게 피곤한데 일찍
주무시라고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왔다. 큰 녀석은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준다. 반면 쌍둥이들은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이라 그런지 만나면 싸우고 다투는
시간이 더 많다. 두달전에 비싸게 사준 멀쩡한 우산도 벌써 고장을 내 놓았다. 사내들이라
고집도 세고, 매사가 건성건성이라 아직은 손도 많이 가고 신경도 많이 쓰인다.

제 학용품도 자주 잊어버려 책가방 검사를 할 때마다 제 물건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고 매번 나에게 주의를 듣는다. 혼을 내도 혼날 때 그때 잠시 뿐이다.

밤 11시가 되어 숙제를 다 마치고 곤히 잠자고 있는 쌍둥이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니
엄마를 잃었음에도 그래도 건강하고 티없이 자라주는 모습이 고맙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엄마를 작년에 잃고나서 나에게 빨리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세녀석들 성화가 심한데
드디어 회사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 일자가 잡혀 내일 아침에 여의도 성모병원에 들러
건강검진을 받는다.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집사람이 나에게 남겨준 사랑하는 내 가족인데, 세 자식들을
생각하면 책임감과 강한 삶의 의욕이 솟아나곤 한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남겨진 세
자식들을 생각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할텐데, 멀쩡하던 집사람이 하룻만에
유방암 말기로 판정받고 1년 6개월만에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일을 겪은 탓인지
건강검진을 앞두고 괜히 마음이 심난하고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로서 크레벤 칼럼이 400회를 맞이했다.
400이라는 숫자는 수 많은 숫자 중에서 399와 401 사이에 낀 하나의 작은 숫자에 불과하기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만은 많은 개인적인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서 일구어낸
숫자이다보니 나 자신에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부여하고 앞으로도 계속 일관되고 열정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을 제공받기 위한 최소한의 요식행위 일 수도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만의 혼이 담긴 글을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이혼이 급증하면서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싱글대디 가정이라고 한다.
지난 5월 모 방송사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싱글대디 가정이 전국적으로 무려 28만가구에
이른다고 하며 그 수치는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하긴 주변을 보면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나 많다. 이 중에는 나처럼 배우자와의 사별에 의해 본의 아니게 싱글대디가
된 가정 또한 많으리라.

어제는 쌍둥이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날이었다. 당초에는 화요일에 운동회를
하려고 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수요일로 연기했는데, 운동회를 시작한지 한시간
만에 또다시 비가 내려 내일로 또 연기했다고 한다. 월요일에는 운동회 열기 하루
전에 하얀 츄리닝과 하얀 티를 입고 오라고 하여 장모님이 하얀 츄리닝과 하얀 티를
사느라고 일산에 있는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갈고 다녔다고 한다. 마침 처형이 쉬는
날이라 집에 와주어 함께 택시를 타고 다니며 겨우 샀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행운의 싱글대디인 셈이다.

화요일 밤 7시 부터는 또 재명이의 야간가족도서관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밤에 학교 도서관에 나가 책을 읽는 날이다.
지난 주에는 막내 재윤이의 야간가족도서관행사 날이었는데 이번주에는 다시 재명이
차례가 되었다. 쌍둥이이고 지어미가 없다보니 내 혼자서 이쪽 저쪽 쫓아다니려니
몸은 하나인데 갈수록 힘들어진다.

지난주 사내근로복지기금 교육을 한다고 눈치를 보아가며 이틀 연차를 사용했는데,
이번주에는 쌍둥이들 가을운동회라고 또 외출 허락을 받았다가 이미 두번이나
펑크를 냈는데, 매일은 또 무슨 핑계로 자리를 비우나? 학교에서 가을운동회를
세번씩이나 연기했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애들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니 회사에서 직원들 얼굴 보기가 너무 민망스럽다. 그렇다고
운동회날 둘 씩이나 학교를 다니는데, 지어미조차 없는데 애비로서 나몰라라 할 수도
없고...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다보니 다른 집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와서
응원도 하고 점심도 싸가지고 와서 그늘 밑에서 가족이 오손도손 식사도 할텐데,
우리 쌍둥이들은 엄마도 없는데 애비마저 운동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를 생각하니 없는 시간 쪼개어 쫓아다니게 된다.

엄마라도 있으면 둘 중 한명이 번갈아 휴가를 내던가 아님 조퇴라도 하면 표시도
나지 않으련만, 나 혼자이니 보니 매번 행사 때마다 쌍둥이들 핑계로 직장에서 자꾸
자리를 비우기가 눈치보이고 미안해진다. 아직도 우리나라 직장문화는 가부장적이고
남자가 애들이나 집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터부시하다보니 더욱 위축되고
신경이 쓰인다. 개다가 중간관리자 위치가 되다보니 더더욱 그렇다. 늦둥이 쌍둥이
자식을 둔 싱글대디의 처신에 많은 갈등이 생긴다.

집사람은 이미 국립암센터에서 유방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 생존이
어렵다고 최종 통보를 받고, 본인도 더 이상 살기 어렵다고 마음의 정리를 끝낸
작년 10월말, 나에게 울면서 말했다.
"미안해 여보! 당신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나 혼자 떠나게 되어 미안해!
그렇지만 우리 애들 잘 부탁해~"
나는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은 기적처럼 일어날테니 약한 마음 먹지 말라고...
그리고 나는 씩씩하니 우리 애들 잘 키울거라고, 당신은 집안일 걱정 말고 병 치료에만
전념하고 빨리 훌훌털고 일어나라고...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줄 알면 빨리 나아야
나중에 우리 쌍둥이들 대학 가고, 합동결혼식까지 하는 모습까지 보아야 할 것
아니냐고 자신있게 말했는데, 집사람이 간지 인제 10개월이 조금 넘었는데도 벌써부터
지치고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막내 재윤이는 개성이 강하다. 형 재명이는 아무 음료수나 사주어도 아무 소리않고
잘 가져가는데, 막내 재윤이는 꼭 '파워에이드'라는 음료수만 고집을 한다. 어제만해도
재윤이가 출근 전에도, 방과후에 다시 회사로 전화를 걸어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수는
'파워에이드'라고 나에게 몇번을 주지시킨다. 퇴근길에 내일 운동회에 가져갈 떡과
음료수를 사러 갔는데 세군데를 들렀는데도 '파워에이드'라는 음료수는 없다. 네번째
슈퍼에서 겨우 '파워에이드'를 발견했는데 PET병은 모두 나가고 알루미늄캔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것을 사가지고 왔는데 싫다고 꼭 PET병으로 사달라고
조른다.

애비는 퇴근길에 그넘의 '파워에이드'를 사가지고 오느라 힘들게 네군데나 들러 겨우
하나 사가지고 밤 8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건만, 속도 없이 고집을 피우기는...
언제나 쌍둥이들이 철이 들려나... 철이 들면 그때는 이 애비와 대화도 하지 않으려
들텐데, 나는 그때 쯤이면 누구와 말 상대를 하나?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연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궁창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 아닌가?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룬 성공, 설사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다 해도 한점 후회를
남기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늘은 사내근로복지기금 업무와 관련 그랜드코리아레저 관계자 세분과 함께
저녁 식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퇴근시간이 막 지난 6시 20분 내 전화기에서
요란스레 벨소리가 울려댄다.

전화기 수화기를 드니 큰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지금 빨리 집으로 오셔야겠어요. 재명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지금 일산
제일정형외과에서 X레이를 찍고 있어요"
"알았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전화기를 끊자마자 즉시 그랜드코리아레저
차문영과장에게 전화를 하여 방금 우리 애가 교통사고가 나서 오늘 저녁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양해를 구하고 즉시 가방을 챙겨 통근버스를 타러 뛰어갔다.
통근버스가 6시 30분에 출발하는데 우리 사무실에서 통근버스를 타는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만 7분정도 걸린다.

오늘따라 휴대폰을 집에 두고 출근하는 바람에 큰애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어
더 답답하기만 하다. 오늘따라 통근차는 왜 이리 더디게 느껴지는지...
큰 사고는 아니어야 하는데... 만약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나중 하늘나라에 가서
집사람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쌍둥이들에게 차조심을
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고 나올껄... 통근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후회감과 함께 자책감, 불길함 등이 어우러져 온갖 상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재명이가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집에 도착하니 집이 텅 비어있다. 큰애에게 전화를 하니 지금 병원에서 X레이를
찍고 약을 조제하여 받아 지금 집으로 오는 중이라고 한다. 즉시 오는 길 쪽으로
뛰어가니 저만치서 큰애와 재명이, 뒤이어 장모님과 재윤이가 걸어온다.
재명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홈플러스 바로 옆
커브길에서 홈플러스 화물차와 부딪쳤다고 한다. 다행히 화물차가 재명이를 보고
급브레이크를 잡아 차가 재명이 바로 앞에서 멈추면서 재명이 얼굴 눈 옆 얼굴 뼈와
살짝 부딪쳤고, 그 반동으로 재명이가 넘어져 팔뚝이 까졌다고 한다.

넘어지면서 머리가 흔들려 X레이를 찍고, 의사가 약 처방을 해주며 3일 정도
경과를 치켜보자고 한 모양이다. 가해자측에서는 자동차보험회사로 사고 신고를
하고 보험처리를 한 모양이다.

왜 그 먼곳까지 갔느냐고 물으니 쭈빗쭈빗하며 말을 하지 못한다. PC방을 갔다
왔던 모양이다. 사고가 난 그 와중에서도 재명이 녀석은 가족들이 알면 혼날 것이
두렵고 아빠가 아시면 걱정한다고 괜찮다고 한사코 병원 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혼나고 아빠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면 가지나 말지...

그나마 불행중 다행으로 이 정도로 경미한 사고로 끝난 것을 감사하게 된다.
지금껏 너무 힘들게 버티어오고 있는데 자식들에게까지 시련이 온다면 정말
이겨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아마도 하나님과 집사람이 우리 재명이를 지켜준
것 같다. 하늘은 내가 견디어 낼 만큼의 시련을 주는 것 같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