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프로게이머가 되거라"

쌍둥이자식이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공문믄 뒷전이고 게임에 몰입해

있을 때 내가 쌍둥이자식에게 했던 말이다.

당시 게임 만랩을 찍을 정도로 게임중독이 될 정도로 게임이 그렇게 미치도록

좋고 하고 싶으면 아예 전문으로 해라.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

솔직한 내 진심이었다. 앞으로 시대는 공부만이 전부가 아니다.

운동이면 운동, 게임, 예능, 예술 등 그 분야에서 독보적이면 살아남을 수 있다.

박세리, 박찬호, 류현진, 박지성, 김연아, 이세돌, 이강인, 송가인, BTS..... 

 

그랬더니 녀석들 왈~ 게임을 전문으로는 않겠단다. 프로게이머가

될 실력과 자신은 없고 그저 심심풀이고 취미란다.

오늘 모 신문기사에 프로게이머가 SKY대학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물론 천에 하나 공부도 잘하면서 게임도 무지 잘하는 사람이 있다.

둘째가 그 케이스이다. 이런 녀석들을 보고는 친구들이 부러우면서도

질투심에서 재수없는 XX라고 한단다. 아무튼 남자는 뇌구조가 단순해서

공부와 게임을 동시에 양립하기가 힘들다.

 

예전에 내가 어릴 때는 무조건 공부, 공부였다.

공부 잘해서 명문대 들어가거나, 시법시험에 패스하거나,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하면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했고 마을 입구에는 어김없이 플랑카드가 걸렸었다.

그렇게 명문대 들어가고, 사법시험 패스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가? 봉급쟁이로 일하다 중도에 회사를 나왔거나

직장에 오래 다녔다해도 정년을 피하지 못하고 지금은 대부분 white hand이다.

한때 잘 나갔던 사람들도 나이 60넘으면 도토리 키재기이다. 

 

이제는 세대가 변했다. 미디어가 그 중심에 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서 교수가 되고, 대기업에 입사해도 TV에 한번 나오기 힘들다.

그런데 연예인이 되면 거의 매일 TV에서 질리도록 얼굴을 보게 있다.

요즘은 재방송이 있고 유튜브가 발달되어 인터넷이 터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접속하여 공연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 어릴 때 박병천씨는 우리 고장에서 씻김굿을 하는 무당이었다.

지금 뜨는 미스트롯 송가인의 경우도 그렇다. 가수 송가인이 태어난 곳이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다. 송가인 어머니도 무속인이고 지금은 진도씻김굿

전수자로로 무형문화재가 되어 신분상승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지금처럼 대접받는

신분은 아니었다. 가수는 딴따라라고 천시하고 무시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무형자산과 컨텐츠가 돈이 되고 브랜드가 되고 파워가 되는 시대이다.

트롯 열풍으로 뜬 가수 송가인은 귀하신 신분이 되었고 방송에서도

서로 모시려고 안달이고, 팬카페 회원만 수만명에 이르고 노래에 한곡마다

온 국민이 열광하고 있다. 나도 송가인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좋아 팬이 되었다.

 

이제는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어느 분야이든 독보적이면 살아남을 수 있고,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 나도 사내근로복지기금에 27년째 올인하며

우리나라에서 제1호 경영학박사에 도서 5권 단독 집필, 고용노동부장관 표창만

4회를 수상했고 올해가 환갑인데도 지금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창업하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지난 1993년 8월,

일산으로 이사간 후 휴일이면 늘 집에서 호수공원까지 걷곤 했다.

운동 겸 휴식, 그리고 아픔을 치유하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18년, 그동안 쌍둥이자식들이 태어나고,

먼저 간 아내의 유방암 말기판정과 투병생활,

그리고 사별,

쌍둥이들의 게임중독....

한 남자로서 감내하기 힘든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하얀 눈은 세상의 더러움을 덮는다.

하얀 눈은 세상의 아픔을 덮는다.

하얀 눈은 사람의 고통마저 덮어준다.

 

눈오는 추운 겨울날에도

휴일이면 두툼한 겨울파카를 입고

목도리에 장갑,

모자에 마스크까지 무장하고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추위에 호수 수면이 얼고

그 위에 하얀 눈이 내려 덮히면

드넓은 호수면이 하얀 평원처럼 펼쳐진다.

마치 다른 나라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작년 3월에 재혼과 함께

일산을 떠나왔다.

겨울이면 보고 싶었던 추억의

눈덮인 호수공원을 어제 다시 보았다.

눈 덮힌 호수공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세월이 간다. 하얀 눈 속으로 쌓여서 세월이 간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 : "정말 후회없겠니?"
명 : "네, 가겠습니다"
나 : "윤이 너는?"
윤 : "저도 가겠습니다"
나 : "이번에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괜찮겠니?"
명, 윤 : "알고 있습니다"
나 :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마음이 변하거든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명, 윤 : "여기보다야 공부하기에는 나을 것 같아요. 그냥 가겠습니다"
나 : "알았다. 결심이 그리 확고하다면 떠나거라"


10월말, 여권과 중국 비자를 만들며 쌍둥이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쌍둥이들과 7개월동안 지긋지긋한 컴게임중독과의 전쟁도 끝나가던 무렵, 아내가 평소 알고 지내던 주변 교회의 어느 집사님의 소개로 중국 정주국제학교를 소개받았다. 우리나라 제주도도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중국이라니?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말로만 듣던 유학! 그것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 돈도 돈이지만 처음으로 쌍둥이들을 그것도 너무도 빨리 애비 품안에서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이 두려웠다.

문득, 내가 어릴적 할아버지와 부모 곁을 떠나 자취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이 떠올려졌다. 1970년 3월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나 처음으로 낯선 진도읍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대학을 마칠때까지 장장 11년간이나 기나긴 자취생활은 하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전기밥솥도 없었고, 가스렌지나 냉장도, 선풍기, 에어컨도 전기장판도 없던 시기였다. 취사도 근처 산에 올라가 소나무 잎을 긁어다가 또는 억새풀을 베어다가 만든 땔감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처 우물에서 물을 길러 쌀과 보리를 씻어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해먹는데 겨울에는 손이 시려 호호 불며 쌀과 보리를 씻었다. 겨울에는 냉골인 방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데 추우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그나마 중학교 2학년 초에 광주로 전학을 오니 연탄을 피우고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을 수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다.

내가 지닌 지금의 강인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열정이 어쩌면 지난 그 힘들었던 시절을 헤쳐오며 몸에 배인 결과물인지 모른다. 고생도 때론 선물이라고 했던가 일찍부터 나는 홀로서기를 통해 나를 관리하며 스스로를 추스리며 경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참고 기다리는 법도 배웠고, 돈의 소중함도 느꼈고, 결국은 내가 내 자신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쌍둥이들이 중학교 2학년이면, 나는 그때 다시 광주로 전학하여 공부하던 때인데....

'자식들이 자라면 언젠가는 내 품에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그 시기가 빨리 왔구나~', '쌍둥이들을 지금 이 상태로 두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일까?', '녀석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10년 이후에 우리나라 인력시장이 어떤 모습일까?'와 우리나라의 무너진 공교육을 고민해보니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래 보내자! 좁은 우리나라에서 아웅다웅하기 보다는 더 큰 중국으로 보내 녀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꿈을 키워주자! 한 녀석이 아닌 쌍둥이들이니 서로 도우며 힘을 합쳐 잘 이겨내겠지! 

10월 31일 국제정주학교 이사장님과 통화를 하고, 곧바로 쌍둥이들 여권사진을 찍고 여권서류를 준비해서 11월 3일, 여권과 중국비자를 발급받았고 11월 17일 중국 하남성 정주국제학교로 쌍둥이들을 보냈다. 마음이 결정되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쌍둥이아빠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 스스로 절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끝까지 절망하지도 포기하지 않았어!"

지난 11일 마포아트센터에서 마을친구들과 연말 송년모임으로 보았던 '노인과 바다' 연극에서 바다로 나가 2박 3일의 사투를 벌여 대어를 낚아서 가지고 오다 상어떼에게 모두 뜯기고 뼈만 앙상히 남은 고기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노인이 내뱉은 말이다.

2011년은 참 많은 일들이 내 신변에 일어났었다. 1월 중순에 결혼 후 22년 8개월간 모시고 살다시피 했던 장모님과의 결별, 이후 두달간 쌍둥이자식들을 데리고 싱글대디로 홀로서기 생활, 3월 중순 18년간 살았던 일산에서 목2동으로 이사, 4월 중순에 재혼, 4월말에는 지난 5년간의 힘들었던 채무가 정리되고 7월에 면책판정을 받았다. 

올해 초에는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3월부터는 일과 학업을 병행해 나갔고 5월부터 9월까지는 고용노동부 제3기 근로복지TF에 참석하여 업무 활동영역을 넓혀나갔으며, 4월부터는 지난 3년간 게임중독에 빠져지냈던 쌍둥이자식들과 본격적으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한 끝에 마음을 돌리게 하여 11월 17일 중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힘들 때는 여유를 가지고 한발 물러나 쉬어가면서 일을 하라는 조언과 격려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나이에 무슨 박사과정이냐고, 이제는 그만 편히 살지 그리 아둥버둥 사느냐고, 생활하기도 힘들텐데 무슨 돈으로 자식들을 중국까지 유학을 보내느냐, 그것도 둘씩이나......

그래도 지금껏 중도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처음 계획한 바대로 살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힘들었던 시간만큼 이상의 보람이 늘 느껴졌다. 힘들 때마다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내 스스로를 위안삼으며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10년 뒤 쌍둥이들이 애비의 결정을 감사하게 생각할 날이 있으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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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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