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기 전에 차례상을 앞에 두고, 큰애와 쌍둥이들이 베란다 밖에 있는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느라 자꾸 들락거렸다. 보다 못해 "너희들은 엄마 차례상, 조상님들 차례상보다 고양이에게 밥 챙겨주는 것이 더 소중하니?"하며 나무랬다.

이윽고 설날 가정예배를 마치고 세배를 드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먼저 장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드리고나서 자식들 세배를 받으려는데 큰애가 자신은 아빠에게 세배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싫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고 쌍둥이들만 세배를 받고 지나갔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어릴 때(여섯살까지) 고집이 무척이나 쎈 울보대장이었다. 심사가 뒤틀려 아침에 울기 시작하면 저녁때까지 하루종일 그치지 않고 울었다. 주위에서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울면서 발가락을 비볐는데 나중에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나도 멈추지 않고 비볐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 엄지발가락은 보통 사람들보다 배 이상 크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의 이런 유치했던 행동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람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어머니는 내가 태어난지 1년 2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그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얻고자 갈구했던 또 다른 표현수단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울고있는 나를 회초리로 엄청 때리렸다(나는 당시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처음에는 아파서 울었고 나중에는 반항심에서 더 크게 울었다. 울면 울수록 아버지의 회초리는 더 아프게 종아리며 엉덩이 내 온 몸을 때렸다. 결국은 내가 울음을 그치는 것으로 사건은 종료되고 그 이후 나의 울음을 그쳤다. 대신 처음으로 죽도록 맞아본 공포,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가 살아오는 내내 내 잠재의식 속에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큰자식은 의무감으로 엄하게 키운다. 나도 큰애를 키우면서 회초리를 참 많이 들었다. 리더십이 강했고 행동이 앞섰던 아내의 성격 때문에 아내 대신 내가 매를 들 때가 많았다. 큰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집에서 키우던 병아리가 병이 들어 시름시름하자 나에게 동물병원에 데려가겠다고 10,000원을 달라고 하였는데 나와 아내는 집에서 병아리를 키우는 것이 못마땅했고 그렇지 않아도 곧 죽게 생겼는데 무슨 동물병원이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사실 카드 돌려막기를 하느라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큰애는 장모님께 15,000원을 빌려 병아리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살리지 못하고 곧 죽고 말았다. 큰애는 울면서 아파트 화단을 파고 병아리를 묻어주며 나에게 원망과 적개심의 싹을 키워왔던 것 같다.

그렇게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큰애에게는  따스한 애비의 정을 제대로 주지 못한체 훌쩍 시간이 흘렀고 늦둥이 쌍둥이동생까지 태어나는 바람에 큰애에게는 더욱 관심이 줄어들게 되고 큰애에게 회초리와 병아리사건은 고스란히 상처로 남게 되었다. 지금 큰애가 그때 받았던 상처로 힘들어한다. 나와 대화도 거부하며 산지 4개월이 지났다.

자식이 아파할 때 부모는 마음 속으로 그보다 수십배 아니 수백배는 더 아파한다. 세배를 거부한 큰애에게 섭섭함 보다는 그렇게 마음먹게 된 상처를 내가 좀 더 일찍 감싸주지 못함에 마음이 애리고 미안핟. 아파트 베란다 밖에는 매일 아침이면 밥을 달라고 열마리도 넘는 고양이들이 모인다. 내가 그 어릴적 집안 식구들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울었고 흘렸던 눈물처럼 어쩌면 큰애도 애비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고양이를 돌보며 위로받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어미는 하늘나라로 가버려 어미의 사랑은 더 이상 받을 수도 없는데, 애비가 잠재되어 있던 큰애의 역린을 건들어 세배를 거부하게 된 것은 아닌지 어제와 오늘 내내 큰애를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3주전 시골을 가서 뵌 아버지 얼굴에서 그 옛날 무섭던 아버지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제는 너무도 많이 늙으신 모습만 남아있는 것을 보고 죄책감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내 좀 더 일찍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용서하고 다가갔더라면.... 세상에 이유없이 자식을 미워하고,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나를 거부하면서도 막상 집을 나가서 독립을 하지도 못하는 여린 큰자식, 아버지가 무서워 그동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가 지금 내가 하는 후회를 내 큰자식이 또 되풀이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정작 가장 큰 수혜자는 자기 자신인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내고향 시골마을에는 명절이면 마을 스피커에서 하루 종일 남도민요나 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가구수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내가 어릴적에는 마을에 250가구 이상이 되는 시골마을치고는 큰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민속전수관이 건립되어 있고 상시 공연이 이루어지는 민속마을로 유명하다.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이 수시로 도시로 나와 공연을 하곤 한다. 나의 감성은 이런 고향에서 훌륭하신 우리 가족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많이 영향을 받았다. 어릴적 자라면서 할아버자와 할머니가 다투시는 것은 딱 한번 보았다. 마을 어르신을 불러 논일을 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에 (힘든 노동이니) 아침에 쌀밥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당시 쌀밥은 무척 귀했다) 그만 할머니께서 며느리와 자식들이 팥죽을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뜻을 거스리고 팥죽을 끓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저녁에 논일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팥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자 팥죽그릇을 마당에 던져버리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을 어르신이 오히려 괜찮다며 수습을 해주어 겨우 넘어갔다. 그 사건 전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순종하였고 두 분은 서로 존중하며 사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한살 위셨는데(당시는 여자는 조혼풍습으로 서너살 위가 보통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하대하거나 반말을 하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고 꼭 서로 존대말을 쓰셨다. 나도 결혼해 아내에게 단 한번도 하대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존대말을 했던 것도 할아버자와 할머니 두 분 영향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께 직언을 하시는 분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할아버지와 할버니는 서로 안방 끝에 주무시면서도 밤이면 매일 자식들 일이며 재산문제, 집 대소사, 마을에 관련된 문제들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국악을 매우 좋아하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레코드가 있어서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집 안방으로 모여 당대에 유명한 명창과 국악인들 판소리며 민요를 매일 들으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특히 김소희 명창의 열렬한 팬이셨다.

내가 문화재단을 세워 한글과 우리 국악발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아마 이런 풍부한 정신적인 문화유산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500미터만 나가면 갯벌이 있고 망둥이며, 게, 조개, 고막, 장어들이 많았던 자연의 보고인 전남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오늘이 설날인데 아내와의 약속때문에 22년째 설날에 고향을 가지 못했다. 아내와는 설날은 우리집에서(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추석은 시골 고향집에서 지내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철저히 지켜오고 있다. 이제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고 없어 이제는 자유스럽게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을 가도 되지만 아직 장모님을 모시고 사니 내려가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욱 깊어지고 안타깝고 부모님께 죄송하기만 하다. 부모님 생전에 자주 찿아뵈야 하는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내일부터 설날 연휴가 시작된다. 친구들은 오늘 고향을 출발한다, 내일 새벽에 출발을 한다, 부모님과 가족들과 만난다, 시골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술 한 잔 하자는 등 들떠있지만 나는 도통 명절 기분이 나지를 않는다.

우리집은 할아버지 형제분이 삼형제(고모할머니도 계셨지만 잘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아버지 형제가 5남 2녀, 우리 형제가 5남이나 동생들은 나이 차가 있고 어릴적 나는 항상 삼촌들이나 고모들을 따라다녔다. 명절이면 온 가족들이 다 모이고, 작은할아버지나 사촌 작은아버지들도 차례 때문에 우리집으로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명절이 지나고 삼촌과 고모들이 객지로 다시 떠나버리면 집안 분위기는 왜그리 쓸쓸하고 허전했던고....

설날은 뭐니 뭐니해도 모처럼 새 옷을 입을 수 있고(아마 1년에 새 옷을 입을 수 있던 기회는 설날과 추석 딱 두번이 아니었을까?) 세뱃돈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신권으로 바꾸어 세뱃돈을 주셨다. 그러면 나는 그 신권이 아까워 쓰지도 못하고 그냥 몇날 며칠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보면 손떼가 묻어 헌돈으로 변해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부모님과 장모님, 어른들의 세뱃돈과 자식, 조카들 세뱃돈을 챙겨주어야 하고 작은아버지며 고모, 처이모님 등 찿아뵙지 못하는 분들의 명절 선물을 챙겨드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내가 있을 때에는 선물이며 신권세뱃돈은 모두 아내가 다 알아서 척척 준비했으나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챙겨야 한다. 넉넉치 못한 살림에 가계를 꾸려나간다는 것이 힘든 일임을 실감하며 산다.

명절이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사별한 아내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곤 한다. 유난히도 손이 크고 친척들에게 이것 저것 많이 챙겨주었던 아내였다보니 다들 잊지 않고 한마디씩 거든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만은 그래도 마음이 따스했던 사람이라 사람들에게 정을 많이 남겨놓고 간지라 그 빈자리가 크고 명절이면 나를 향한 연민의 눈길과 말이 오가는 그런 분위기와 자리가 부담스럽고 자꾸 피하게 된다. 명절때면 더 위축되는 싱들대디의 삶~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는 너무 힘들고 외롭게 자랏던 탓인지 자식에 대한 욕심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어머니가 너무도 일찍 돌아가시고(나를 낳은지 1년 2개월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대한 정이, 가족에 대한 따스함이 무언지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집을 떠나 객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삶 속으로 따라들어가 버렸다.

아버지 형제가 칠남매(5남 2녀)여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많은 삼촌들과 고모들을 객지로 보내 학교를 다니시게 하느라 고생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릴적 할아버지께서 삼촌과 고모들에게 보낼 돈이 없어 할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는 싫은 기색없이 마을에서 돈이 있을 만한 집에 가서 돈을 만들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을이자 지역 유지이신 덕분에, 신용이 좋아 비교적 돈 빌리기는 쉬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살다가 시집오신 우리 할머니께서 남의 집에 가서 돈을 빌려달란 말을 하기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을텐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싫은 기색없이 다녀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런 호흡이 자식과 장손자인 나를 시골 어려운 환경에서 모두 고등학교 이상 졸업시킨(고모 한 분만 빼고) 교육열로 승화되었던 것 같다.

우리집은 아주 어릴적부터 염전을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는 할머니가 직접 우리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한 광주리 머리에 이고 장에 가서 직접 파시기도 했다. 우리 염전에서 함께 소금을 떼가지고 간 마을 다른 여자분들은 장사에 능해서 오전내에 모두 팔아치웠지만 우리 할머니는 오전에 모두 팔지를 못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가게를 돌아다니며 팔아달라고 사정하시는 모습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역 유지이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께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금을 이고 시장에 나가서 판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형제도 내 밑으로 남동생이 넷, 5형제이다. 아버지도 우리 다섯 형제 모두 고등학교 이상 본인들이 원할 경우 대학까지 진학시켰다. 지금 돌아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은 자식들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하느라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포기한 셈이다. 맛있는 음식, 좋은 옷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자식들, 손자를 먼저 챙기셨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에게 치이며 고생하시고 희생하시는 모습이 싫어 나는 결혼하면 자식을 딱 하나만 낳아야겠다고 일찍이 결심을 했다.

결혼 하자마다 우리 부부는 사주에 손이 귀하니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장모님 성화대로 허니문베이비로 들어선 큰 애를 낳아, 솔직히 큰 애는 정보다는 의무감으로 키웠다. 그 때 큰애에게 아비의 정과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하고 키웠던 것이 지금은 많은 아픔과 회한으로 남는다. 게다가 97년에 아내가 늦게 아기를 가져 그것도 아들 쌍둥이를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을 선언을 하기 일주일 전에 낳아 졸지에 아들만 셋이 되어 눈코 뜰새 없이 키우다가 아내마저 2006년 11월에 많은 빚을 남겨놓고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린 지금, 나 혼자 신용불량 상태에서 개인회생까지 이행하면서 세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무척이나 버겁고 마치 나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왜 나에게 원치 않은 아들을 셋이나 주었을까? 특히 늦둥이는 아들 쌍둥이로 주셨을까? 많은 의문 속에서 살았다. 나는 그 답을 아내가 내 곁을 떠나고 내 나이 오십을 넘긴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야근에,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매일 밤 11시 40분, 큰애와는 냉전 중이라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는다. 불이 꺼진 집,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 뒹글며 이불을 차버린체  곤히 잠들어 있는 쌍둥이 재명이와 재윤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자식은 하나님이, 먼저 간 아내가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구나! 먼저간 아내가 남긴 다시는 받을 수 없는 선물! 나 혼자면 이 세상 살아가는데 외롭고 힘들까봐 서로의 비전을 공유할 자식을 셋씩이나 나에게 선물하고 갔구나! 유난히도 밝고 성품에 구김이 없어 복원력이 빠른, 그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닌 쌍둥이들이 곁에 있어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금새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녀석들 키우고 뒷바라지하고 공부시키려면 잠시도 좌절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즐거움과 행복함으로 굴곡많은 삶에 당당히 맞서고 자식들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끌어안고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나는 부자구나~~ 아들을 셋씩이나 둔 당당한 자식 부자아빠.^^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은 내가 집안청소를 하는 날이다. 일주일에 세미나에 참석한다, 야근이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다보니 틈만 나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집안청소도 더 자주 하게 된다. 예전에 장모님이 건강하실 때는 장모님이 집안 청소를 매일 해주셨지만 이제는 연로하여 청소를 거의 하지 못하신다. 그렇다고 사내자식들이 셋이나 있는데도 집안 구석구석까지 청소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에게 청소를 시키면 그냥 봉걸레로 거실 몇번 왔다갔다 밀고는 끝이다. 결국은 식탁밑이나 책상 밑, 정수기 밑, 구석구석 사각지대는 고스란히 내 청소 몫이다. 50이 넘은 애비가 걸래를 빨아 엎드려 다니며 거실을, 주방 바닥을 닦는데도 자식들 셋은 본체만체 지들 하던 일만 한다. 얄미운 녀석들 같으니라고~~

나는 집안 청소를 우리 할아버지께 배웠다. 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 개기(그것도 군대 내무반 관물정돈 하듯이 매일 아침 이불을 장확히 각을 지게 접어 장롱 위에 차곡 차곡 올려 놓으셨다), 그리고 안방 뿐만 아니라 마루까지 빗자루로 깨끗히 청소를 하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얼른 걸레를 빨아서 안방과 마루를 닦고 마당까지 청소를 하면 할아버지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버지 형제가 5남 2녀, 우리 형제가 5남이었으니(물론 내 밑 동생들과는 나이 터울이 많아 청소는 하지 못했지만) 많은 삼촌과 고모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할아버지 칭찬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보니 자연스레 집안청소하기와 부지런함이 몸에 습관으로 배었다.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의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나도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처럼 살리라 마음먹었다.

결혼해서도 집안 청소는 내 차지였다. 휴일이나 평일에도 매일 아침저녁 이부자리를 펴고 개는 일이며(결혼후 지금까지도 침대생활을 하지 않았다) 안방, 거실, 주방 청소는 내가 해주었는데, 하늘나라에 먼저간 아내도 집안청소를 도맡아 해주는 나를 무척 고마워했다.

물론 자식들에게 강제로 청소를 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식들은 자라면서 부모의 행동과 모습을 닮아간다니 녀석들도 성장하여 결혼을 하면 이 애비가 했던 모습을 보며 아내를 도와주고 집안청소도 해주게 되리라 믿는다. 나는 자식들이 군림하는 아빠가 아닌 솔선수범하며 집안청소를 도와주는 아빠, 가사를 역할분담하여 아내를 도와주는 자상한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아빠의 역할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고, 인식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다.

책상 밑에 쌓인 먼지도 닦아내고, 냉장고 밑에, 정수기 밑도 닦아내고, 화분 밑에 쌓인 먼지도 닦고, 화분받침대에 고인 누런 물도 버리고, 화분받침대까지 깨끗히 닦아서 새로 바꾸어주고, 거실 양탄자도 밖으로 가지고 나가 털어서 깔아준다. 한편으로는 내가 위장병이 없는 이유가 이렇게 40여년을 자주 기어다니며 집안청소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한소망교회 4부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밖에 눈이 소복히 쌓였다. 하늘을 보니 당분간 그칠 눈이 아니다. 일단 차 시동을 걸어놓고 앞면 유리와 좌우측 유리, 뒷면 유리에 쌓인 눈을 치운다.

눈을 보니 젊은이와 나이먹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 눈에 대한 것이 있다.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설레이고 들떠서 기분이 좋아하면 젊은 사람이고 미끄러져서 다치면 어떡하나를 걱정하면 나이먹은 축에 끼인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설레이면서도 당장 내일 출근길이 걱정되니 그럼 중간세대인가?

대충 눈을 치우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킨다. 평소에는 씽씽 달리던 길인데 오늘은 눈길이 미끄러워 다들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한다. 이미 도로 위에도 눈이 상당히 쌓여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경비원 아저씨들이 부산하다. 쌓인 눈을 치우고, 아파트 계단입구와 주차장 입구에 영화칼슘을 뿌리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얼마만에 내리는 눈인가? 어릴적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고 지독히도 추웠는데 이제는 갈수록 눈도 내리지 않고 춥지도 않는다. 이렇게 눈이 내려야 염화칼슘을 만드는 회사도 장사가 되고 날씨가 추워야 옷을 반드는 의류회사도 장사가 되고 해충도 죽어 농사가 잘된다는데....

이러한 추위에도 내가 들어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며칠전 출근길에 통근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에 버려진 피자케이스가 있었다. 지나가던 노숙자가 그 피자막스를 열더니 먹다 남긴 차가운 피자 쪼가리를 찿아서 입에 넣고 허기를 채우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에게도 가정이 있을텐데,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텐데...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들이 사는 둥지를 보면 어린 새끼들을 위해 어미새들은 부지런히 먹을 것을 구해 가져온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들은 어미새가 가까이 오는 인기척만 느껴도 서로 먹을 것을 달라고 입을 벌리고 짖어댄다. 밤이 되면 어미는 새끼들이 춥지 않도록 둥지에서 새끼들을 품에 안고 따뜻한 체온으로 키운다. 어쩌다 외부에서 새끼를 공격하는 다른 새들이 오면 목숨을 걸고 둥지를 지킨다.

우리 집에는 대학에 다니는 큰애와 초등학교 6학년짜리 쌍둥이자식 아들 셋이 있다. 그리고 애들을 돌봐주는 연로하신 장모님이 계신다. 모두 개성이 강하여 한 성질 한다. 아들 셋을 양육하며 장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니 정말 열심히 살게 된다. 단 하루라도 그냥 대충대충 살 수는 없다.


너무 힘들 때는 어릴적 우리집 처마 둥지에서 새끼를 키우던 제비를 생각한다. 봄이 되면 제비 한쌍이 와서 처마 밑에 집을 짖고, 새끼를 낳고 번갈아가며 둥지를 지키고 먹이를 구해와 새끼들을 기르고, 새끼들이 깃털이 나고 날개가 생기고 스스로 날게 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키우는 모습을... 비가 오는 날에도 어미 제비는 둥지에 머무르지 않고 비를 맞으며 들판에 나가 먹이를 구해온다. 가을이 되어 그렇게 키운 새끼들이 커서 자유롭게 날게되고 추워지기 전에 제비는 강남으로 떠난다.

언젠가는 자식들도 크면 내 곁을 떠나 독립을 하겠지. 내 힘들어도 자식들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는 이 애비가 뒷바라지를 해주어야겠지. 때로는 삶에 버겁고, 자식들이 내 속을 긁고, 내 말에 반항을 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다 커가는 과정이려니 이해하며 받아들여야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남들은 3일간 황금연휴라고 콘도다 스키장이다 휴가를 떠나지만 나는 집과 사무실을 오가며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 및 신고실무' 책자를 출간하기 위해 막바지 원고작업에 여념이 없다. 싱글대디로 개인회생을 이행하며 자식 셋을 키우며, 장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나는 매일 매일이 절박함과의 싸움이다.

시간 흐름의 속도가 나이와 비례한다고 했던가~ 이제 내 삶의 시간의 속도도 시속 50킬로에 접어선듯한 느낌이다. 자고나서 아침 먹고 출근하여 회의하고 잠시 일하다보면 점심시간, 점심 식사를 마치고나서 오후에는 걸려오는 전화 받고 예산과 결산, 펀드관리에 신경을 곤두새우다보면 금새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요즘 법원에 매달 돈을 입급시켜주어야 날짜, 집주인에게 월세를 송금해주어야 하는 날짜, 아내가 남겨놓은 직원들의 빚을 송금해주어야 하는 날짜, 쌍둥이들 학원비 내주어야 하는 날짜, 매주 장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 날짜는 왜 이리 빨리 그리고 자주 돌아오는지....차라리 봉급날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가도 그래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개인회생도, 직원들 빚 잔치도 빨리 끝나겠지 생각하니 고통과 기대가 서로 상쇄되고 고민도 평정되는 감을 느낄 수 있다.

내년이면 쌍둥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한다. 쌍둥이녀석들 초등학교 졸업기념으로 휴대폰을 사달라고 목을 매고 있는데, 녀석들이 중학생이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겠지. 봉급은 수년째 동결인데 그럼 내가 더 뛰어서 수입을 늘리는 수 밖에 없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적자인 가계를 이리저리 꾸려나가는 현실이 기적과도 같다. 요즘 직장인들은 자기 집에서 맞벌이를 하며 사는데도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을 보면, 외벌이에 개인회생에 직원들 빚까지 갚아나가고 매달 70만원씩 월세를 주어가며 자식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나에게는 복에 겨운 투정으로 들린다.

세상사는 양면이 있다고 했던가? 나에게 물질적인 부족과 감내하기 어려움 짐을 주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족에게 건강을 주셨고, 매일 매일을 웃음으로 보내고 그날의 피로를 잊게 해주는 쌍둥이자식들의 재롱과 애교를 선물로 주셨다. 나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진정한 큰 부자라고 위안하며 산다.

지난 3월부터 막내 재윤이가 "나는 천재이다", "나는 미남이다"를 입에 달고 다니더니 정말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등을 하는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오늘은 재명이도 "나는 얼짱이다"를 경쟁적으로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을 보니 중학교에 가서는 두 녀석들이 힘들어하는 나에게 지금보다 더 큰 선물을 주려나 보다. 지금의 생활고가 매일 아웅다웅 싸우다가도 금새 화해하고 친해지는, 미래 세계를 이끌어나갈 큰 리더로 성장해가는 세 자식을 보는 기쁨을 상쇄시키지도, 나를 좌절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이왕이면 밝은 면을 보고 살아야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공평하신 하나님은 나에게 더 큰 영광과 선물을 주시려고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계실꺼야. 어렵고 힘들어도 그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없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집에 귀가하여 장모님이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는다. 오늘은 KBS 1TV에서 수요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을 방영한다. 장모님이 즐겨 보시는 드라마라 나도 함께 끝날 때까지 천천히 식사를 하며 본다.

이어서 '다함께 차차차'를 한다. 이 드라마 또한 매일 장모님이 빼놓지 않고 즐겨보시는 TV드라마이다. 나는 그 시간에 안방 청소를 하고, 이불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 먼지를 털고 나서 이부자리를 편다. 안방에서는 내가 쌍둥이자식들을 데리고 셋이서 잠을 잔다. 한참 크는 녀석들이라 잠을 자다보면 꿈을 꾸는지 발길질을 해대는 바람에 밤중에 몇번 차이기도 하고 뒹글다가 나에게 부딪쳐 잠을 깨곤하다.

안방 청소를 마치고 이부자리를 모두 펴고나면 다시 거실 청소를 한다. 걸레를 빨아 거실과 주방 바닥을 구석구석 직접 닦는다. 자식들에게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 밀대걸레를 이용하여 거실과 주방 바닥을 밀고 다니며 하는데 그러다보면 화분 사이나 책상 밑, 구석이나 매트부근에는 닦이지가 않아 먼지가 그대로 쌓여있다. 아무래도 손으로 구석구석 닦는 청소보다야 낳겠는가?

청소를 모두 마쳤는데 아직도 '다함께 차차차' TV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슬그머니 신문을 가지고 거실로 나와 신문스크랩을 하기 시작한다. 절반쯤 했을까~~ 그제서야 드라마가 끝난다.

2년 4개월전, 거실 TV가 고장이 나자 차제에 거실에 있던 TV를 없애버리려 마음먹었다. 그러자 장모님께서 "내가 낙이 뭐가 있겠는가? 쌍둥이들 모두 학교 가버리고 나면 하루종일 뭘하고 시간을 보내겠는가? TV라도 보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데...", 하시는 말씀에 눈 딱 감고 TV를 사게 되었다. 마침 백내장 수술을 마친 직후라 큼직한 LCD TV로 장만하여 거실에 설치해 드렸다.

우리집에는 서재가 없다. 내 책상도 없어 식탁 위에다 컴을 올려놓고서 쓴다. 내가 컴 앞에 앉으면 장모님은 거실에서 TV를 보시다가도 내가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TV를 끄고 장모님 방으로 들어가신다. 장모님 방에 있는 TV는 17인치 아나로그 TV이다. 내가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편치 않으신 모양이다. 사람이 어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 있겠는가? 장모님이 생활하시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드리기 위해 때론 내 욕구를 자제하며 TV를 보게 될 때도 있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요즘 답답한 심정을 글로 푸념하였더니 어느 회원이 뼈있는 덧글을 올렸다.
"요즘..... 명윤아버님 글이 자꾸 무겁다~~ 쌍둥이랑 명윤아빠랑 건강하고 거기다 두녀석 공부까지 잘하고 있는데... 내가 힘나는 이슬한잔 사드려야할려나 봐요 ^.^  화이팅 하시고 흰머리는 염색하세요. 요즘 간편하게 염색할 수 있는것도 있던데..."


'아~~ 내 글이 다른사람들에게 어두움과 불편함을 주었구나!'
정신이 번쩍들어 우울모드에 신세한탄을 하던 나를 즉시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꿋꿋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꿋꿋하게 사는 내 모습을 통해 힘든 다른 사람들도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더불어 삶의 승리자가 되어 함께 웃고 싶다는 내가 처음 글쓰기를 시작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리라. 이건 내가 거꾸로 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일으킴을 당하게 되었네.

살아도 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경제적인 고통,
나의 인내를 시험하듯 계속 밀려드는 감내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시 밀려드는 더 큰 파도.... 빚더미 속에 홀로 남겨져 매일 생활비를 걱정하며 세 자식과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싱글대디로 누구에게도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앓으며 제풀에 지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표정이 어두워졌고, 반복되는 일상에 자식들에게 짜증을 내고, 글에도 한숨과 푸념이 늘어갔다. 내면이 어두운데 쓰는 글이 밝았겠는가? 가슴이 아닌 내 감정을 감추고 손끝으로 썼던 글은 어쩌면 가식적인 글이었는지 모른다.

혼자서 고민하고 푸념을 한다고 얽힌 문제가 해결될리 있겠는가? 그럴수록 내자신이 나를 더 어두운 고통속으로 내몰았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예전의 웃음을 되찿으리라 마음먹고 장모님께 앞으로는 당분간 고정적인 강의가 없으니 지출을 줄이자고 제안하고, 쌍둥이들에게도 아끼자고 양해를 구했다.

까잇것~~ 내려놓으니 이렇게 마음이 편한 것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능력이 허락하는 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사는거야. 나머지는 하나님께 믿고 맡겨야지. 이왕이면 찡그리지 말고 웃으면서 사는거야.

내곁에는 내 얼굴도 모르면서도 이렇게 덧글로서 성원해주는 든든한 우군들이 많은데...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모처럼 일찍 귀가하여 신문스크랩을 하다가 쌍둥이들이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밤 9시 35분에 학원으로 향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쯤은 녀석들이 공부는 잘 하는지, 말썽은 피우지 않고 잘 지내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학원에 들어서니 원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나 : "명이 윤이 수업 아직 안끝났나요?"
원장님 : "8시에 수업이 끝났는데요. 아직 집에 도착 안했어요?"
나 : "안왔는데요. 히틀러선생님 시험 결과가 항상 밤 9시 40분경 오던데..."
원장님 : "이번주는 계속 밤 8시에 수업이 끝났어요. 잠깐만요~ 혹시 보충을 받고 있는지 확인을 해볼께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원장님 : "학원에는 없어요. 그럼 쌍둥이들이 어디를 갔죠?"
나 :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머쓱함..."녀석들! 오늘 딱 걸렸어~~"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왜 이리 마음이 허탈할까? 싱글대디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엄마가 있어 녀석들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숙제와 예습복습, 준비물 등을 챙겨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일을 제껴놓고 매일 일찍 퇴근하여 녀석들 학원 앞에 서서 학원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면서 "아이~~ 피곤해"를 연신 외친다. 녀석들은 내가 학원에 가서 원장님을 면담하고 학원을 나온 시간까지 확인하고 온 줄 모른다. 몰래 PC방을 다녀와놓고서 애비와 할머니를 속이려 호들갑과 능청을 떠는 녀석들 얼굴을 보는 순간 평소에는 보기만해도 배가 부르고 사랑스럽던 모습이 싹 가시고 오늘은 참 가증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2주전에도 쌍둥이들이 PC방을 드나든다는 것을 재명이 담임선생님을 통해 듣게 되어 얼마나 민망했던지...막 사춘기에 들어선 녀석들이라 혹시 좋지않은  것에 접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신경이 쓰인다. 집에서야 큰애가 있어 녀석들이 컴을 할때 불법 게임이나 성인물 접근을 차단시키고 놓아 안심이지만 PC방을 가면 한참 호기심이 많고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시기에 불법성인물과 게임을 제약없이 접할 수 있으니 녀석들이 받게될 충격과 부작용을 생각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이번에는 말로 타이르고 넘어갔지만 조금만 틈을 주어도 헛눈을 팔고, 친구들과 어울려 PC방을 들락거리는 녀석들 때문에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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