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머니를 고양시 고봉산푸른솔공원 모셨다.

54년 8개월전 돌아가신 어머니.

나는 얼굴도 본 적이 없고,

아무리 생각해보려,

기억을 해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은 어머니.

어머니 시신은 온전하였다.

 

그동안 혹시나 수맥이나

나무뿌리로 인해 훼손이 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아담하신 체격,

54년 8개월이 지났음에도 어머니 시신은 온전하였다.

장례도우미분 말이 어머니께서 묻히셨던 묘가 명당이었다는

말에 비로소 안도하였다.

 

아버지나 친척분들에게 탐문하여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와는 동갑,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조부모께서 서둘러 결혼시키셨고,

고등학교 3학년때 새신랑이라고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받으셨 아버지는 나를 낳고 고등학교 졸업 후 군입대......

군에서 신상명세서에 창피하여 미혼이라 기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나를 낳고 연년생으로 내 동생을 임신하여 나와

막내시동생이 동갑이어서 한 집안에서 세 자식을 키우기가

부담이 되어 내 동생을 유연하다 잘못되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는 어제 처음으로 이장을 앞둔 어머니 묘 앞에서

"여보 미안하오"를 외치며 어머니와 내 동생을 끝까지

지키지 못함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어제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

꿈에서도 한번 뵙고싶던 어머니를 서울 근처 납골당에 모셨다.

어머니를 납골당으로 모시고나서 아버지께 앞으로는 자식인

제가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고 전화를 드렸다.

이제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결정이 있기까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재명이가 수능을 마친 날, 식사를 하면서 오늘 자유로청아공원에 함께 다녀오기로 약속을 했다. 기일 전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수능을 마치고 홀가분하게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5일을 미루었다.

 

애들 엄마가 벌써 하늘나라에 간지 9년이 지났다. 부부가 살다가 사별을 한다는 것은 부부 서로에게 너무도 가혹한 벌이다. 더구나 어린 자식이 있을 경우는 더더욱..... 초등학교 2학년에 암 말기 판정, 1년 6개월 투병생활 끝에 쌍둥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에 자꾸 눈에 밟힌다는 쌍둥이들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으니....... 그후 남겨진 빚과 싸우며 어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억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다.

 

납골당 안 모습은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은 나이를 먹은 내 모습과 그동안 몰라보게 성장한 쌍둥이모습.... 유골함과 유족을 가르는 유리문이 마치 저승과 이승을 가르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어미를 잃고 두려움에 떠는 세자식을 데리고 흩어지지 않고 여지껏 잘 살았고 초등학교 3학년짜리를 수능까지 보고, 막내는 올해 초에 대학까지 진학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그래도 하지 않았나 위안해 본다.

 

오는 길에 일산에 살면서 자주 갔던 송가네칼국수집에 들러 점심겸저녁 식사를 했다. 송가네갈국수도 오랜만에 가보니 이전을 했다. 하긴 벌써 9년 전이니... 내가 주차한 차를 주차한 사이에 쌍둥이들이 먼저 들어가니 여사장님이 애들을 몰라본다. 식당에 들어선 나를 보고서야 그 어린 쌍둥이들이 이렇게 많이 컸냐고 놀란다. 이어서 "애들 엄마는 안와요?" 묻는데 말문이 턱 막히며 울컥해진다. '하늘나라에 갔어요' 할수도 없고...... 하긴 예전에 일산에 살 때는 다니던 한소망교회 옆이라 우리 가족이 칼국수를 먹으러 자주 오곤 했는데 식당 사장님 눈에는 우리집 사정을 알리도 없으니 엄마가 보이지를 않으니 궁금했겠지.... 칼국수와 만두맛도 여전하다. 나중에는 음료수까지 한병 서비스로 주신다.

 

10년전, 그 당시만 해도 죽도록 힘들었는데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고보니 이제는 미소가 지어지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낸 내 자신에게 오늘은 스스로 칭찬과 격려를 하며 환하게 웃을 정도로 삶에 여유가 생겼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1층 베란다 앞 정원에도 대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과일나무도 해걸이를 하나보다. 작년에는 대추는 씨가 말랐고, 감이 많이 열렸는데
올해는 반대로 감이 씨가 말랐고 대추는 가지가 휘도록 많이 열렸다. 감이든 대추든
번걸아 가면서 많이 열려주니 텅빈 마음이 위안이 된다.

가을이 되니 더 많이 힘들어진다. 계획한 일들이 내 의도대로 되어주지 않을 때, 하긴
모든 일이 내 의도대로 되어주었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테지....  아내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지도 않았을테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었을테고, 그럼 아내가
유방암에도 걸리지도 않았을 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쪼들리더라도 미리 암보험도
많이 들어놓고 병원비 걱정없이 암치료에만 전념하게 만들었을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주식투자는 못하게 말렸을텐데....

어제 미래예측기본과정에서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최윤식소장님이 소장님이 진행하는
미래예측과정 교육에서 나에게 '미래례측기법을 이용한 주식투자'라는 과정을 맡아서
해보라고 하신다. 아~~ 이가 갈리는 주식, 우리 부부를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은
왠수같은 이 주식투자를 앞으로 어찌 요리해서 강의를 진행할까 고민이 된다.

가을이 되니 신경이 더 예민해진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무래도 힘들어서일까?
예전에는 그냥 별일아니게 넘어가던 큰애의 삐닥해진 행동이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안타깝게 한다. 내가 무너지면 우리집은 끝이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내마음을
항상 억누른다. 애비가 세미나를 끝내고 밤 11시 30분에 집에 들어오면 "다녀오셨어요"
하고 나와서 반갑게 인사하던 녀석이 이틀째 식사시간 이외에는 제 방문을 꼭 닫고
제 방에서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사람은 어리석은 동물이다. 삶과 시간, 돈, 권력이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며
만용을 부린다. 부부가 사별하고 나서야 배우자의 소중함을 깨닫듯 소중한 것을 보내고
잃교 나서야 사람들은 후회를 한다. 삶과 미움, 오해 이 모두가 부질없고 일순간인 것을....
삶이 그저 잠시 허용된 것이라 생각하면 미움도 서운함도 그리 오래가지 않은 것을,
가족간 미워하고 상처받고 살면 그만큼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미움도 털고, 서운한 일이 있으면 일분 일초라도 빨리 털고 마음 편히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을 왜 모르는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집사람이 내곁은 떠난지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월 참 무심하기도 하지...벌써 집사람이 내 곁을 떠난지가 2년이 되었다니...

집사람을 보내고 그동안 앨범을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쁘기도 했지만 앨범을 보면 자꾸만 아내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지난 아픔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오는 17일 방송되는 Q채널 '선물'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에서 애들 어릴적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제 밤 늦게 부랴부랴 세자식들 사진을 챙기느라
앨범을 펼쳐보게 되었다.

집사람의 어릴적 사진, 나와 교제하면서 찍은 사진, 결혼 사진, 신혼여행 사진,
신혼집에서 큰애를 얻었을 때 사진, 애들 어릴때 목욕사진, 여행 사진들을
속의 행복했던 시절을 보고 있으니 그리움이 복받쳐 온다. 사람은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지만 우리 부부는 어찌 이다지도 일찍 헤어지게 되었는가?
세 자식, 특히 어린 쌍둥이 자식과 연로하신 장모님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병상에 누워 마지막으로 나에게 "우리 쌍둥이들 잘 부탁해",
"우리 엄마 잘 부탁해!"하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하던
모습이 다시 눈가에 어른거리며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것이 모정이고,
먼저가는 불효여식이 어미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효도라는 것을 알기에...

무정한 사람! 이렇게 일찍 갈거면 차라리 나와 만나지 말고 더 좋은 사람
경제적으로 더 여유있는 사람과 만나 하늘에서 주어진 수명 누리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다가 가지 어쩌다 가진 것도 없고 부족한 나를 만나 사내 애들만
셋, 게다가 쌍둥이자식까지 낳아 이토록 고생만 하다 갔는지... 내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나는 어이하라고...

지난 10월 18일 Q채널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청아공원의 집사람이 안치된
곳에서 한참을 있었더니 김승희PD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느냐고 짖굳게
질문을 한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지난 21년 4개월전 집사람을 처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들 셋을 낳아 키우며 행복하면서도 힘들게 살아왔던, 그리고 집사람 유방암
말기판정, 지긋지긋한 유방암 투병생활, 끝내 아내와의 사별, 싱글대디로 애들 셋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과정이 그저 꿈만 같다. 꿈이라면 깨어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지만 이건 돌이킬 수도 없으니...

그렇지만 슬픔에 빠져있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남겨진 나와 아내의
분신과도 같은 세 자식들이 자라고 있고, 집사람과의 약속,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꿈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2008.11.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오후 6시 20분. 내 휴대폰 벨이 연신 울린다. 우리 집이다.

장모님 : "난데, 오면서 떡집에 들러 동규엄마 제사상에 놓을 떡좀 사가지고 오소!"
나 : "네. 알겠습니다."

장모님은 내가 당연히 통근버스를 타고 오시는 줄 안다.
그런데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 때문에 통근버스를 타지 못했다.
택시를 타든지 아님 일산가는 직원차 편에 편승을 하든지...
아시는 선배님 자리에 전화를 했다.  선배님이 센터장님실에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문자메시지를 넣었다. 일찍 가시면 태워달라고...
한참 후에 온 전화는 7시 40분경이 되어야 퇴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영등포에 나가 버스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조금 기다렸다 선배님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나 매한가지일 것 같아 선배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6시 50분부터 선배님 사무실에 올라가 기다리는데 도통 회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7시 40분이 다 되어 회의가 끝나고 그제서야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서강대교를 지나 강변북로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한다.

7시 50분이 되니 집에서 또 전화가 걸려온다. 쌍둥이 목소리인데 장모님께서 내가
늦으니 애를 시켜 전화를 한 것 같다.

재명 : "아빠 지금 어디세요?"
나 : "응, 집에 가는 길인데 30분 정도 늦겠구나!"
재명 : "알았어요"

일분 일초가 바늘방석이다. 성격 급하신 장모님의 성화가 눈에 선하다.
차라리 6시 45분에 곧장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출발할껄~~ 후회가 밀려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 자유로에서 삼중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길이 온통 차들로 꽉 막혀 있다. 백석역에 내리니 8시 20분이다. 허겁지겁 인절미에
약식을 사들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오니 8시 55분이다.

집에 오니 처형과 동서, 처남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처형은 직장에서 하루
휴가를 내고 오늘 집사람 제사상에 올릴 음식 장만을 도와주셨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처형에게 도움을 청하면 항상 말없이 도움을 주시곤 한다.

우리집은 나와 쌍둥이자식들은 기독교, 장모님과 큰애 동규, 처형, 처남은 불교,
손위 형님은 뚜렷한 종교가 없으시다. 장모님이 차려놓으신 제사상과 상위에
놓인 집사람 영정사진을 보니 갑자기 참았던 그리움이 밀려든다. 영정사진을
보며 혼자 주절거려 본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당신 두번째 맞이하는 제사네. 참 세월 빨라,
당신이 나와 우리 가족을 떠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기 제사라니...
남겨진 세 자식 데리고, 장모님 모시고 좌충우돌 1인3역, 4역 정말 정신없이
살다보니 요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네.

당신에게 집안 살림 다 떠맡겨 놓고 편하게 살다가 당신이 유방암 말기 판정 받고
그제서야 허둥지둥 살림 하나하나 넘겨받아 꾸리며 남겨진 빚 갚아가며 살다보니
마음 편히 쉬어본 날이 없었지. 당신이 내게 남기고 간 짐이 너무 무거워서
다리 쭉 뻗고 쉴 겨를이 없었지. 누군가는 그랬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산 자는 어떻게든 산다고..."
당신이 나를 떠나고 나서 내가 그 짐을 다 넘겨받아 헤치며 살아나가다보니
그동안 당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어.

결혼때 우리 부부는 꼭 백년해로 하자고 그토록 굳게 맹세했었는데,
어이하여 하늘이 우리 부부를 이다지도 빨리 생과 사로 갈라놓았는지
부부사별이라는 운명이 야속하고 또 야속했지만 살아서 받아야 하는 고통이
이다지도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다면 차라리 그 짐을 나 혼자 다 받아 감내하고
당신은 빚 걱정, 병원비 걱정, 힘든 암투병의 고통없는 곳에서 살게 주어야
겠다고 마음먹으니 그제서야 당신을 홀가분하게 하늘나라로 보낼 수 있었어.

우리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닐 거야!
그저 잠시, 당신이 주고간 선물인 세 자식을 훌륭히 키워 사회에 내보내 훌륭한
리더로 성장해 갈 그 때까지 아주 잠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네.
다시 만나는 날, 그때 나는 아마 훌륭히 성장해 우리나라를 이끄는 리더로 성장해
활약하고 있는 세 자식을 보며 웃는 모습으로 당당히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후회없이 살아갈테니 꼭 지켜봐줘...

2008.10.18.
김승훈

'김승훈의 내사랑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고 2년이 흘렀다.  (0) 2009.04.26
변치않은 사랑  (0) 2009.04.26
얄궂은 추석차례상  (0) 2009.04.26
당신이 그리워질 때...  (4) 2009.04.26
사랑만 하기에도 인생은 짧습니다.  (0) 2009.04.2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1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