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YTN 라디오 '최수호의 출발 새아침' 가진 인터뷰에서 최종원 의원이 한 말

"(유인촌 문화부장관을) 긴 세월 알아왔는데 돌변한다는게 있잖느냐? 주변에서 '연기자로 봤을 때는 안 그런데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변했죠?'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념적 잣대로 '좌파론 우파론' 하며 막 나서는 것에 대해 '굉장히 잘못가고 있다'고 많은 예술인들의 우려를 갖고 있었다. 권력을 쥔 완장 찬 한사람의 호기 같이 보인다. 저도 굉장히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문화부장관은) 문화예술을 세계에 빛낼 수 있는 정책 대안이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밀고 나가면서 좋은 충고를 구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유 장관은 행정이라던가 이런 부분은 전혀 전무하고 정책을 내 놓은 예도 없으며 현실적인 참여를 해서 자기주장을 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민족예술인협회에서 유인촌 장관을 비판하고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보수집단인 예총의 많은 문화 예술인들도 입만 떼면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있는 부분이 지금 (유 장관이)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산하기관장 인사 문제만 해도) 결과적으로 목은 쳤지만 재판에서 그 사람이 승소하고 장관의 행위는 잘못된 걸로 입증됐다. 그 다음에는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정책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주무 장관이 이념적 잣대로 좌파, 우파를 나누기 시작하고, 그냥 남의 목 자르고, 자기 패거리를 집어넣고 한느 행태들이 굉장히 잔혹했다. 그래서 뭔가 잘못 가고 있는 부분을 내가 한 번 나서서 막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1000억 짜리 강의

좋은글 2010. 8. 3. 10:52

명예, 지위, 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과 기자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요.

 

그는 평소에 강의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강의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칠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1,000억!"

 

그리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전 재산이 아마 천 억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

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제가 부럽습니까?"

"네!"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그는 웃으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000억 중에 첫 번째 0은 바로 명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0은 지위입니다.

세 번째 0은 돈입니다.

이것들은 인생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앞에 있는 1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은 건강과 가족입니다.

여러분 만일 1을 지우면 1,000억이 어떻게 되나요?

바로 0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명예, 지위, 돈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건강과

가족이 없다면 바로 실패한 人生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들 중 일부입니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7월 30일 전경련 제주하계포럼 강연에서....

"우리나라 상류층의 딸, 며느리들이 아침부터 고급호텔 식당에 모여 노닥거리는 것을 자주 본다. 자녀들은 과외를 시켜놓고 자기는 밖으로 나와서 어디서 쇼핑할지, 어디서 맛있는 것을 먹을지, 어디서 놀지만 생각하는 것을 보면 가슴을 치게 된다. 그런 여성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여성들은 남자 탓, 사회 탓만 하지 말고 스스로를 강인하게 단련해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대학 나오고 유학까지 하며 공부한 여자가 사회 탓을 하면서 집에 있으려고 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서구 여성은 우리나라 여성보다 10배는 더 일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독일,  스웨덴의 여성들은 한국 여성보다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우리나라 여성도 군대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들만 군대에 붙들어 놓지 말고 여성도 군대에 보내되 복무기간을 1년으로 줄이면 된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중국 인민일보 소개한 아흔네 살 공산당 원로 원리가 지키는 여덟가지 금기

1999년 은퇴한 뒤

1. 자리를 맡지 않고

2. 정치를 도모하지 않고

3. 세상사를 묻지 않고

4. 세상사에 관여하지도 않고

5. 일을 만들지 않고

6. 테이프 끊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7. 명예직도 맡지 않고

8. 책 서문도 써주지 않는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마음의 본질은 정(情)으로서~

정이라는 글자 자체가 마음(心)+맑음(靑)의 합성어로서

마음(心)이 맑아야(靑)함을 의미한다.

마음이 맑은 사람은 정이 맑은 사람이다.

정이 맑으려면 누군가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타인을 위하는 자리에 서면 그 순간 마음이 맑아짐을 느낀다.

 

김주현님의 '명상카페'에 있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인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지(知), 정(情), 의(意)를 조화롭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지식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정과 의가

위축되기 쉽다고 합니다.

정보(情報)시대라고 하여 많은 정보기기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더욱 필요한 것은 진심어린 마음(情)의 소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말에 '씨'가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씨', '말씨' 등이 그렇습니다.

'마음씨와 말씨'는 인간만이 갖는 특별한 씨로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통의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말의 씨를 맑히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씨(米)+맑음(靑)의 합성어로서 정(精)도 있습니다.

씨를 맑힘으로써 기(氣)를 갖는 것이 정기(精氣)라고 합니다.

자연으로부터 기를 받기도 하지만 서로가 진심어린 마음을

줌으로서 기가 소통하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로마로 통했다

 

기술 수준은 비슷했습니다.

다만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고, 이집트는 한 사람을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 때, 로마만이 개방을 위해서 15만 킬로

미터의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더불어 살기의 중요성입니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이 황금어장이듯이 여기와 저기를

링크 걸어 서로 교류하게 하는 허브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통의 시대입니다

 

미래 고용주가 찾는 인물형도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IQ로 입사해서 머리가 좋고 점수가 높다고 해도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더불어 공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전만큼

환영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계적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오늘날 성공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회지능지수(SQ)가 높다고 말했다 합니다.

 

혼자서는 잘 놀다가도 손님이 오거나 또래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못 어울리는 아이가 있는 반면 혼자서는 몸을 비비

꼬다가도 타인과 어울리는데 선수인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내 장난감을 챙기느라 불안해서 빨리 손님이 떠나주기를

바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나눠주고 바꿔가지며 함께

즐거움을 만끽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사회지능지수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인식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며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하는 능력

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겸손하게 양보하고 상대와 문제가 생겨도

바로 좋은 감정을 회복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디지털이나 첨단과학의 힘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람만의 고유 능력'이 경쟁력인 시대입니다.

 

남보다 산수를 빨리 풀고 남보다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전자계산기와 전자수첩이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죠.

사색을 통해 상상력, 창의력, 직관력을 키우고 관계를

통해 친밀감, 감수성, 소통을 높여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하고, 지금은 안 하는 거지만

나중엔 못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리더의 소통하려는 의지는 조직의 분위기를 좌우

하는데 리더가 대화를 쓸데없이 노닥거리는 하찮은 것

이라고 믿으면 조직은 소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서로 곪아 터지고 응어리질 뿐이라는 것이죠.

조직에선 비밀이 없을수록 효율이 높아진다는 결론입니다.

 

이제는 소통의 시대입니다.

정보·통신의 발달은 소통의 고속도로를 열었습니다.

이제 만리장성을 쌓는 정신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미련한 행위일 뿐입니다.

 

스마트폰!

이 작은 전화기(손안의 PC) 하나가 시대를 완전히 바꾸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

smart work가 가능한 시대로의 급변...

실로 몇 년 안에 우리의 삶 또한 엄청난 변화를 만나게

될 것이라 보여 집니다.

이제 소통하지 않고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런데 소통을 말하면서도 주인의 소리를 외면 하는 사람,

어린 여대생들을 모아 놓고 쌍스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통이라도 되는 줄 알고 떠들어 대다 개망신을 자초한

사람 등이 우리시대를 참말로 슬프게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부디 끼리끼리 연을 묶어 벽이나 쌓지 말고

그 벽을 넘어서, 아니 그 벽을 뚫어서 우리의 정과 정이

새가 지저귀는 것(twitter)처럼~

시원하게 더 많이 소통 합시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옛날 중국 진(晉)나라에 거문고의 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백아(兪伯牙)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태어난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거문고를

뜯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문고 소리를 몰래 엿듣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향 친구인 종자기(鐘子期)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종자기는 "지음(知音)"의 경지에 이른 사람

이었습니다.

 

백아가 달빛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달빛을 바라보았고, 백아가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백아의 속마음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결국 유백아는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이듬해 백아가 다시 고향땅을 찾았을 때 종자기는

죽고 없었습니다. 백아는 친구의 묘를 찾아갔습니다.

마지막 최후의 한 곡을 뜯고는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듣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는 고사(故事)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음(知音)은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친한 친구"를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 내고 영혼을 읽어내는 친구,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는 면에서는

부부나 연인을 뛰어넘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관계의

친구, 그런 친구가 진정한 지음을 할 수 있는 친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 사이는 궁예의 관심법처럼 상대의

마음을 뚫어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진심을 알아

주는 배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래서 지음의 경지를 터득할 수 있도록 상대를 향해

더 많은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 친구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서로 지음에 달할 수

있도록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친구에 관한 고사 몇 개를 더 알아보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자라고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장

절친한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 라 하고.

 

숙명처럼 물과 고기의 삶 같은 환경을~

수어지교(水漁之交) 라 하고.

 

단단한 무쇠나 돌처럼 견고함을 지닌 사이를~

금석지교(金石之交) 라 하고.

 

서로의 의기가 모여 편안한 친교를~

막역지교(莫逆之交) 라 하고.

 

허물이 없는 친교를~

관포지교(管鮑之交) 라 하고.

 

목숨 걸고 맺은 신의(信義)의 친구를~

문경지우(刎頸之友) 라 한다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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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친일을 하느니 차라리 망하겠다 *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해이던 1918년 경주

최부자의 후손 최준은 당시 28세였습니다.

그는 그 해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일곡(크게 곡하는 것)하더니 가족과 일가붙이

그리고 노비들까지 모든 가솔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는 가솔들에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고 우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우리 집안이 3백년간 쌓아온 부를 유지하려면 이제 부터라도

필경 일본인에게 순응하고 굴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친일을 하고 명예를 더럽히고

살 것인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경주 최

부잣집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너희들도 그렇게

알아라."

 

가산의 포기~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최준이 가진 부는 9천 석이 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만석을 넘길 수 있음에도 그는 경주 최부잣집의 교훈대로

만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습니다. 더 이상 쌓이는 부는 과감

하게 주위에 나누었고 소작농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당시 최준은 구한말 20대 청년으로서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가산 포기와 함께 노비해방을 솔선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노비가 곧 재산이던 시대였습니다.

노비 하나가 벌어들이는 경제력을 감안한다면 노비 해방은

언감생심 아무도 생각하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백여 명에 이르는 집안의 노비들을 마당에 모아

놓고 노비문서를 불사른 뒤 마음대로 떠나도 좋다고 선언했다

합니다.

남아 있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일한 대가를 분명히 받아가게

했으니 당시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당대의 의인이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의 출현은 최치원의 20대손 최국선으로부터 시작

됐다고 합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경제가 피폐해 아주 어려웠던 시기였으나 경주 내남의 넓은

들에서 근면하게 농사일을 계속 하며 점차 가세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년에 큰 부를 이뤘음에도 일정한 재산 이상을 과하게

늘리려 하지 않았고 틈틈이 일가친척과 친지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줘 그의 생전에 담보로 받은 문서가 책상 서랍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국선은 임종 때 "내가 빌려준 것은 받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담보문서를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 했습니다.

가솔들이 놀라 말렸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존경 받는 부자의 전통이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 부자 누대의 가훈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다섯째, 최 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였다고 합니다.

 

이는 집안사람 스스로 검소하게 살고 스스로 지켜야 할 삶의

가치를 준수하도록 만들어진 가훈이었던 것입니다.

이 가훈은 부와 권력을 함께 하지 않고 부의 일정한 선을

넘기지 않고 지켜가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삼백년 전부터 뛰어난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실천해가려고 노력한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지켜야 할 도덕의 윤리지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가문의 리더가 스스로 이 가훈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기에 삼백년 가문의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다 보니 당시에 곳곳에서 출몰하던 도적들도

이 소문을 듣고 최 부잣집만은 털지 않았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도적떼가 양반과 부자들을 응징하면서 삼남지방을 휩쓸고

다녔으나 경상도 일대에 산재한 최 부자 창고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이고 보면 최 부잣집의 사람 사랑이 일대에

널리 전해져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최준은 자신의 당대에서도 이 원칙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면서 부를 지키려면 친일파가 돼야

하니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점을 볼 때 그의 뛰어난

애국심과 충성심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수많은 부자들이 일제에

빌붙어 부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재산을 늘리며 군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최준은 가문의 부를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

했는데 때마침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백산은 백범 김구와 함께 당대 이백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구국운동에 몸 바쳤던 지도자였습니다.

최준은 그 때부터 안희제가 운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경영을 떠맡게 됐습니다.

 

사실 이 회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비밀창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리 없어 파산지경에 이르자

안희재가 최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최준 역시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바에야 이왕이면 구국

운동에 돈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 깊숙이 참여했고, 백산무역을 시작으로 고려요업(주),

대동무역회사를 설립하고 경남은행, 경성방직에 주주로 참여

했으며,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으로도 활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활동은 재물을 늘리자고 개인적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애국적인 욕심

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지는데 당시로서는 일제 경찰의 지독한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고 송금하기 위한

창구로 기업체라는 위장이 필요했으며 어느 정도 보호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계속해서 큰 재산을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으로 보내기 시작해 10년 만에 결국 당시 돈으로 벼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 1백만 원의 빚까지 지게 됐고, 이로 인해

1928년 1월 29일자로 백산무역이 해산되고 최준의 모든

재산도 압류 당했다고 합니다.

 

경주 최부자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것입니다.

부인이 버선을 보름째 신고도 갈아 신지 못할 정도로 모든

재산이 압류된 상태에 이르자 그는 사태수습을 위해 서울

식산은행을 찾아가 당시 총재이던 아리가(有和)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는 뜻밖에도 대출해준 거액을 탕감

받았습니다.

 

아리가 총재가 당시 거액의 대출금을 탕감해 준 것은 그가

평소 고적답사를 좋아해 경주에 들를 때 마다 최준의 봉사

정신과 물질에 초연한 인격, 높은 도덕성에 감탄해 왔다는

점, 그리고 백산무역에 은행이 대출해줄 때 마다 최준에게

보증을 서게 하여 빚을 지게 한 다음 이를 미끼로 총독부에

협조하도록 회유하고 싶어 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있다고 합니다.

 

아리가 총재는 이렇게 호의를 베푼 후 그에게 자택을 환수해

신라박물관을 만들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나 최준은

일제가 하는 일에 협력할 수 없어서 자신의 사후에 쓰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아리가가 호의를 베푼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

오는데 그 중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만약 식산은행이

최 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해 파산하게 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부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 결코 일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설이 타당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해 독립운동이 계속

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즉, 내선일체 정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준의 후손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리가는 최준의

인간성과 품행을 실제로 사모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 아리가는 최준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고 하며,

사랑채에 머무르면서 이 집의 가주(家酒)인 경주 법주와

김치를 곧잘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최준의 집과 재산은 당시 부산의 합동은행에서도 차압

당하고 있었는데 아리가는 부산합동은행 총재에게 빚의

탕감을 지시하고 직접 전화까지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런 대목을 보면 아리가의 호의는 단순히 조선 부자의

회유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아리가의 식산은행 탕감 건으로 인해 나중에 식민지

사이토 총독이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을 정도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쨌든 최준은 당시 아리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파산은 면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해방과 함께 식산은행과 합동은행의 압류가

풀려 절반의 재산을 되찾게 되었고 그는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최준은 1946년 2월에야 비로소 김구

선생을 서울 경교장에서 서로 큰절을 하면서 대면하게 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를 향해 크게 치하하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고 하는데...

 

"최 선생 그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우리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주신 최 선생의 공로야말로 3천만

동포가 모두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

 

백범은 이 때 ‘자금조달 인명기록장’을 보여주며 최준을

위로 했는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최준이 안희제 선생을 통해

상해로 보낸 거금의 자금이 한 푼의 착오도 없이 전달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준은 해방 2년 전에 수감됐다가 출옥

후에 고인이 된 백산 안희제의 무덤이 있는 의령을 향해

"백산 미안하네, 나를 용서하게~"라고 큰 절을 하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독립자금이 혹시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한 적이 있었기에 안희제의 청렴결백함에

감복하고 용서를 빈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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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미국 필라텔피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어느 날 오후,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렸다. 길에 있던 사람들은 가까운 상점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온몸이 흠뻑 젖은 한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한 백화점 안으로

들어왔다. 많은 종업원들은 비에 젖은 노인의 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할머니의 옷차림이 누추했기 때문이다.

 

이때 필립이라는 젊은이가 할머니에게 다가가 친절히 말했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잠깐 비를 피하고 갈 거예요."

 

할머니는 남의 건물에서 비를 피하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백화점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머리핀이라도 하나 사면 비를

피하는 일이 좀 떳떳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할머니의 표정을 살피던 필립이 또 다가와서 말했다.

 

"할머니, 불편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의자를 가져다

드릴 테니 그냥 앉아서 쉬시면 됩니다."

 

두 시간 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필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명함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총총히 비 갠 거리 속으로 뒤뚱거리며 걸어 나갔다.

 

몇 달 후 이 백화점의 사장 '제임스'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바로 그 할머니가 쓴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당시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강철왕

카네기의 어머니였다.

 

편지에는 필립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하여 한 성루를 장식할

주문서를 받아가게 할 것과, 그에게 카네기 소속 대기업들이

다음 분기에 쓸 사무용품의 구매를 맡기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임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계산을 해 보니 이 편지 한 통이 가져다 줄 수익은 백화점의

2년 이윤 총액을 웃돌았다.

그래서 제임스는 바로 필립을 회사의 이사회에 추천했다.

필립이 짐을 꾸려 스크틀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이 스물두 살의 젊은이는 이미 백화점의 중역이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필립은 자신이 늘 보여주었던 선의와 성실함으로

카네기의 손과 발이 되었다.

그 이후 필립은 카네기 가에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며,

100곳에 달하는 전국의 도서관에 800만 권의 도서를 기증

하여 많은 젊은이에게 귀감이 되었다.

.

.

 

"필립의 성공은 자신의 능력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그의

사람됨에서 비롯된 거란다.

이런 착하고 성실한 품성은 그에게 좋은 기회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지...

 

항상 너에게 사람됨이 능력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필립의 선행이 이야기 해 주는구나.

아들아, 너도 필립의 경험에서 착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우장홍님의 '어머니의 편지'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계명구도(鷄鳴狗盜) *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뜻을 풀이해보면 '닭 울음소리나 개 흉내를 잘 내는 천한

재주도 쓰기에 따라 훌륭하게 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옛날 제(齊)나라 왕족 맹상군(孟嘗君)은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식객으로 맞아들이니 그 수가

삼천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 신분 등의 그 어떤 차별도 하지

않았으며 헤어질 때는 선물을 챙겨주는 등 주도면밀한

'사람관리'를 하여 집에는 항상 식객들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을 맺은 사람은 적재적소에 쓰고 그들을 위해

재산도 아끼지 않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명성을 들은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이 맹상군

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 들어가자

소왕은 그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억류하여

버렸습니다.

 

이에 맹상군은 소왕의 애첩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는데 그러자 소왕의 애첩은 호백구(狐白구)를 요구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백구는 여우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아주 귀한

털옷이고, 맹상군이 진나라에 들어올 때 이미 소왕에게

바쳤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맹상군을 따라온 식객 한 사람이 진나라 대궐에

들어가 개 흉내를 내며 감쪽같이 호백구를 훔쳐 와 그것을

소왕의 애첩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호백구를 받은 애첩은 소왕에게 그를 풀어줄 것을 애원

하니 소왕은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풀려난 맹상군은 곧 말을 달려 한밤중에 국경 근처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습니다. 얼마 후 맹상군을 놓아 준

것을 후회한 소왕이 군사를 보내 맹상군을 잡아오도록 명령

하였습니다.

맹상군이 급히 관문을 나가려고 했으나 그 관문은 첫 닭이

울기 전에는 열지 않는 것이 그곳의 법이었습니다.

이때 식객 한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내자 주변의 모든

닭들이 따라 울었고 이에 관문이 열리고 맹상군은 무사히

제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재를 활용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이 인간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이 세상을 살아 나갈 수

있도록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계명구도[鷄鳴狗盜] - 닭 울음소리, 개 등의 흉내로

물건을 훔치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일지라도 다 필요한

때가 있고 좋은 일에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관리자, 탁월한 경영자는 바로 이 맹상군

처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재능을 알아보고 그것을 잘 활용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만해 한용운님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삶을 모르는 자이다."

 

"우리는 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다.

Social이란 Society(사회)라는 말과 같이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고 모이고 무엇인가 달성하고 자기 삶을 꾸려 나간다.

사람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의 문명을 건설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주위에 사람이 없이 혼자서야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만남을 도외시(度外視)하고는 삶 자체를 논하기가

어렵다.

함께 살아가려면 역시 서로를 배려하는 상보적 자세가 필요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고 무엇인가 덧씌우고 정보를

첨삭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내

앞의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서 회사라는 이익추구 집단 속에서

이런 원칙은 곧잘 무너지곤 한다.

권위주의적인 사장은 회사의 생존이라는 절대 절명의 목표

아래 가장 효율적이고 최단시간 내의 성과달성을 위해 업무

위주(job-oriented)의 일방적 지시를 내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강압적 지시는 창의성의 무덤이 되기 십상이다.

일방 하향의 지시가 내려가면 효율은 높아져도 리더가

조직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

구성원이 리더에게 심복하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기 어렵다.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다. 대학의 주인이 교수가 아니고

학생이듯이 말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삶을 모르는 자이다.”

 

 

각유소장(各有所長)

 

우리는 사람을 평가 하고 등용할 때~

 

저 사람은 학벌이 안 좋으니까---,

또는 여자(남자)이니까--,

나이가 너무 많(적)으니까---,

흑인(백인)이니까---,

전공을 안 했으니까---,

 

얼굴이(신체가) 어떠하니까---,

어느 지역 출신이니까---,

어느 학교 출신이 아니니까---,

내편(내 사람)이 아니니까---,

코드가 안 맞으니까--,

 

등등의 차별로 만남이나 등용에서 배제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맹상군이 이런 우리를 보면 얼마나 안타까워할까요?

 

각유소장(各有所長)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장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닌 그 장점을 찾아내는 것이 리더이고

이를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이 리더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서는 맹상군과 같은 리더(지도자)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느 날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결혼은 해야 옳은 것입니까?

안 해야 옳은 것입니까?"


소크라테스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결혼하시오.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터이니..."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페'는 소문난 악처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살림도 돌보지 않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지껄여 대는 것이 아내는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경제에 무능력한 남편에게 심한 욕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에 더욱 화가 난 그녀는 밖으로 나가 물통을 들고 와

그의 머리 위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화난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천둥이 치더니 드디어 소나기가 쏟아지는구려."


사람들은 이 위대한 학자가 하필이면 그런 악처에게

시달리며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하필 그렇게 악한 여자를 부인으로 만나

고충을 겪으며 사십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훌륭한 기수는 가장 성질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오.

그런 말을 잘 훈련시켜서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말이라도 다 잘 탈 수가 있기 때문이라오.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잘 달랠 수가 있을 것이 아니겠소."



ㅎㅎㅎ~

어떻습니까? 역시 소크라테스답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만을 탓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가정사는 돌보지 않고 보통사람들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참으로 기이한(?) 말만 하니 그 말들이 제아무리

명언이라 하더라도 주린 배에서 웃음소리가 나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옛 말씀에 "열흘 굶어 군자 없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처로 소문난 소크라테스 아내의 심정을

전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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