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을 하느니 차라리 망하겠다 *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해이던 1918년 경주
최부자의 후손 최준은 당시 28세였습니다.
그는 그 해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일곡(크게 곡하는 것)하더니 가족과 일가붙이
그리고 노비들까지 모든 가솔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그는 가솔들에게 말했다.
"나라가 망하고 우리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우리 집안이 3백년간 쌓아온 부를 유지하려면 이제 부터라도
필경 일본인에게 순응하고 굴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친일을 하고 명예를 더럽히고
살 것인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경주 최
부잣집은 파산을 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너희들도 그렇게
알아라."
가산의 포기~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최준이 가진 부는 9천 석이 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만석을 넘길 수 있음에도 그는 경주 최부잣집의 교훈대로
만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습니다. 더 이상 쌓이는 부는 과감
하게 주위에 나누었고 소작농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당시 최준은 구한말 20대 청년으로서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가산 포기와 함께 노비해방을 솔선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노비가 곧 재산이던 시대였습니다.
노비 하나가 벌어들이는 경제력을 감안한다면 노비 해방은
언감생심 아무도 생각하지도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백여 명에 이르는 집안의 노비들을 마당에 모아
놓고 노비문서를 불사른 뒤 마음대로 떠나도 좋다고 선언했다
합니다.
남아 있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일한 대가를 분명히 받아가게
했으니 당시에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당대의 의인이라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의 출현은 최치원의 20대손 최국선으로부터 시작
됐다고 합니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경제가 피폐해 아주 어려웠던 시기였으나 경주 내남의 넓은
들에서 근면하게 농사일을 계속 하며 점차 가세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년에 큰 부를 이뤘음에도 일정한 재산 이상을 과하게
늘리려 하지 않았고 틈틈이 일가친척과 친지들에게 돈과
곡식을 빌려줘 그의 생전에 담보로 받은 문서가 책상 서랍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국선은 임종 때 "내가 빌려준 것은 받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담보문서를 모두 불태우라"고 지시 했습니다.
가솔들이 놀라 말렸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존경 받는 부자의 전통이 이때부터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 부자 누대의 가훈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다섯째, 최 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였다고 합니다.
이는 집안사람 스스로 검소하게 살고 스스로 지켜야 할 삶의
가치를 준수하도록 만들어진 가훈이었던 것입니다.
이 가훈은 부와 권력을 함께 하지 않고 부의 일정한 선을
넘기지 않고 지켜가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점은 삼백년 전부터 뛰어난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실천해가려고 노력한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지켜야 할 도덕의 윤리지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지만 가문의 리더가 스스로 이 가훈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기에 삼백년 가문의 전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다 보니 당시에 곳곳에서 출몰하던 도적들도
이 소문을 듣고 최 부잣집만은 털지 않았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도적떼가 양반과 부자들을 응징하면서 삼남지방을 휩쓸고
다녔으나 경상도 일대에 산재한 최 부자 창고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이고 보면 최 부잣집의 사람 사랑이 일대에
널리 전해져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최준은 자신의 당대에서도 이 원칙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면서 부를 지키려면 친일파가 돼야
하니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점을 볼 때 그의 뛰어난
애국심과 충성심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했을 때 수많은 부자들이 일제에
빌붙어 부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재산을 늘리며 군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최준은 가문의 부를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
했는데 때마침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백산은 백범 김구와 함께 당대 이백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구국운동에 몸 바쳤던 지도자였습니다.
최준은 그 때부터 안희제가 운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경영을 떠맡게 됐습니다.
사실 이 회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비밀창구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리 없어 파산지경에 이르자
안희재가 최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최준 역시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바에야 이왕이면 구국
운동에 돈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 깊숙이 참여했고, 백산무역을 시작으로 고려요업(주),
대동무역회사를 설립하고 경남은행, 경성방직에 주주로 참여
했으며,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으로도 활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활동은 재물을 늘리자고 개인적 욕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애국적인 욕심
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지는데 당시로서는 일제 경찰의 지독한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자금을 모금하고 송금하기 위한
창구로 기업체라는 위장이 필요했으며 어느 정도 보호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계속해서 큰 재산을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으로 보내기 시작해 10년 만에 결국 당시 돈으로 벼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 1백만 원의 빚까지 지게 됐고, 이로 인해
1928년 1월 29일자로 백산무역이 해산되고 최준의 모든
재산도 압류 당했다고 합니다.
경주 최부자의 가문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것입니다.
부인이 버선을 보름째 신고도 갈아 신지 못할 정도로 모든
재산이 압류된 상태에 이르자 그는 사태수습을 위해 서울
식산은행을 찾아가 당시 총재이던 아리가(有和)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는 뜻밖에도 대출해준 거액을 탕감
받았습니다.
아리가 총재가 당시 거액의 대출금을 탕감해 준 것은 그가
평소 고적답사를 좋아해 경주에 들를 때 마다 최준의 봉사
정신과 물질에 초연한 인격, 높은 도덕성에 감탄해 왔다는
점, 그리고 백산무역에 은행이 대출해줄 때 마다 최준에게
보증을 서게 하여 빚을 지게 한 다음 이를 미끼로 총독부에
협조하도록 회유하고 싶어 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있다고 합니다.
아리가 총재는 이렇게 호의를 베푼 후 그에게 자택을 환수해
신라박물관을 만들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나 최준은
일제가 하는 일에 협력할 수 없어서 자신의 사후에 쓰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아리가가 호의를 베푼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
오는데 그 중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만약 식산은행이
최 부잣집의 재산을 몰수해 파산하게 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부자를 망하게 하는 것이 결코 일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설이 타당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해 독립운동이 계속
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즉, 내선일체 정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준의 후손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리가는 최준의
인간성과 품행을 실제로 사모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 아리가는 최준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고 하며,
사랑채에 머무르면서 이 집의 가주(家酒)인 경주 법주와
김치를 곧잘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최준의 집과 재산은 당시 부산의 합동은행에서도 차압
당하고 있었는데 아리가는 부산합동은행 총재에게 빚의
탕감을 지시하고 직접 전화까지 걸어 선처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이런 대목을 보면 아리가의 호의는 단순히 조선 부자의
회유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아리가의 식산은행 탕감 건으로 인해 나중에 식민지
사이토 총독이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을 정도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쨌든 최준은 당시 아리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파산은 면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해방과 함께 식산은행과 합동은행의 압류가
풀려 절반의 재산을 되찾게 되었고 그는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최준은 1946년 2월에야 비로소 김구
선생을 서울 경교장에서 서로 큰절을 하면서 대면하게 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를 향해 크게 치하하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고 하는데...
"최 선생 그 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우리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주신 최 선생의 공로야말로 3천만
동포가 모두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
백범은 이 때 ‘자금조달 인명기록장’을 보여주며 최준을
위로 했는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최준이 안희제 선생을 통해
상해로 보낸 거금의 자금이 한 푼의 착오도 없이 전달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준은 해방 2년 전에 수감됐다가 출옥
후에 고인이 된 백산 안희제의 무덤이 있는 의령을 향해
"백산 미안하네, 나를 용서하게~"라고 큰 절을 하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독립자금이 혹시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한 적이 있었기에 안희제의 청렴결백함에
감복하고 용서를 빈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