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많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나라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부터 오랫동안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지배당한 나라들은 많은 것을 빼앗겼고,
빼앗은 나라들은 그것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 마치 자기
조상의 유물처럼 보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침범으로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약탈당했습니다.
우리가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은 흘려듣기만 할
뿐입니다.
일제에 의한 문화재 침탈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조차
없다 할 것입니다.
지금도 프랑스에는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와 중동 사람들,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등에서 온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파리의 유명한 지하철 등의 건축물이나 심지어 문화재 등도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
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길거리, 지하철 속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아시아인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큰 도시에는 '게토'라고 해서 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따로 떨어져 그들끼리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인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체류증을 연장하기 위해 관계 사무실에 갈 때에도 많은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필요한 서류를 다 준비해도 담당 공무원이 보이는 경멸의
눈길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곳에 가면 이른 아침부터 옛 식민지에서 온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줄을 서게되는데 간혹 친절하며, 타민족과
그 문화를 존중하는 훌륭한 공무원도 있기는 하지만,
막대기를 들고 줄을 세우고 온갖 험담을 늘어 놓으면서
겁을 주는 공무원이 더 많다고 합니다.
아래 일화는 한 유학생이 쓴 글입니다.
어느 날 나는 버스 속에서 차별받는 한 아프리카 사람의
당당함을 발견하였습니다.
프랑스 버스와 지하철에는 노인을 위한 자리가 우리나라
경로석처럼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노인과 장애인, 상이군인, 임산부,
어린아이를 위한 자리입니다.
이 보호석 위편에는 앉는 사람의 우선권이 적혀 있는데
상이용사가 첫번째이고, 그 다음으로 시각장애인, 기타
지체 부자유자, 임산부, 4세 미만 어린이며, 맨끝에
75세 이상 된 노인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 내가 타고 가는 버스 보호석에는 한 프랑스 할머니가
앉아 잡지를 보면서 손뜨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지 맵시 있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는 뒤편에 서서 그 할머니가 읽고 있는 잡지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창밖을 보면서 내릴 곳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장바구니를 든 흑인 할머니가 차에
올랐습니다.
흑인 할머니는 보호석 앞으로 다가가 앉아 있던 백인
할머니가 자신을 보고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백인 할머니가 그대로 앉아 있자, 흑인 할머니는 주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흑인 할머니의 말은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보다 내가 더 나이가 들은 것 같구려.
그러니 나는 이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소.
혹시 일흔다섯 살이 지난 내 나이를 확인하고 싶으면
체류증을 보여 줄 수도 있소."
백인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 보는 일과
뜨개질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흑인 할머니는 백인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
하든지,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든지 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두 할머니의 대립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궁금해
내릴 곳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다 못한 백인 할머니는 주민등록증을 보여 줄 뜻이
전혀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나이를 견줄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여긴 내 나라야. 그러므로 당신에게 양보할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흑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맞아요. 나는 지금 당신의 나라에 와 살지만, 예전에는
당신들이 우리나라에 허락도 없이 와서 살았어요.
세금도 안 내고. 난 세금을 내고, 집세도 내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앉을 권리가 있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백인 할머니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버스는 세느강변을 따라 에펠탑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흑인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당신은 나처럼 서 있을 수 없는 거야.
날 봐, 난 당신보다 훨씬 튼튼한 다리를 가졌어.
내 땅은 내게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주었어.
난 이렇게 늘 서 있을 수 있어.
예와 규칙도 모르면서 문화민족은 무슨..."
버스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아프리카 할머니는 뿌리 깊은 나무 같아 보였습니다.
나도 손에 힘을 주어 더욱 세게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 흑인 할머니의 당당함...
흔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사 당당하지 못하면 멸시를 받기 마련입니다.
36년 간 강압통치의 지배를 하고도 결코 사과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저 용서와 화해를 말하며 썩소를
날리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광복 6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일왕을 천황이라 부르며
일본 극우들의 논리를 추종하거나 전파에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친일파라 부릅니다.
하지만, 친일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시대에 친일이든, 친미이든, 친중이든...
국가와 민족을 떠나 교류와 협력을 통해 상호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일이라는 호칭에 저는 가능한 거부감을 갖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이러한 상생의 친일에 숨어 진심어린 반성이나
사과도 하지 않는 극우 사무라이들과 교류협력하며
우리민족의 한과 자주정신마저 교란하는 친일이 아닌
충일에 앞장서는 꼴통들은 당연히 격리조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민족자존의 당당함은커녕 알아서 기는...
아니 거기에 붙어 자신들의 탐욕만을 채우려는 민족
반역의 세력은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부르고자 당당함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조지 오웰'이 남긴 말을 되새기며 마칩니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행동이다."
(지금은 이미 퇴직하신 조훈부장님이 2009년 6월 16일에
보내주셨던 글입니다. 늘 당당하셨던 부장님을 생각합니다.
부장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