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정말 후회없겠니?"
명 : "네, 가겠습니다"
나 : "윤이 너는?"
윤 : "저도 가겠습니다"
나 : "이번에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괜찮겠니?"
명, 윤 : "알고 있습니다"
나 : "아직 시간이 있으니 마음이 변하거든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명, 윤 : "여기보다야 공부하기에는 나을 것 같아요. 그냥 가겠습니다"
나 : "알았다. 결심이 그리 확고하다면 떠나거라"


10월말, 여권과 중국 비자를 만들며 쌍둥이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쌍둥이들과 7개월동안 지긋지긋한 컴게임중독과의 전쟁도 끝나가던 무렵, 아내가 평소 알고 지내던 주변 교회의 어느 집사님의 소개로 중국 정주국제학교를 소개받았다. 우리나라 제주도도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중국이라니?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말로만 듣던 유학! 그것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 돈도 돈이지만 처음으로 쌍둥이들을 그것도 너무도 빨리 애비 품안에서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이 두려웠다.

문득, 내가 어릴적 할아버지와 부모 곁을 떠나 자취를 처음 시작했던 시절이 떠올려졌다. 1970년 3월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을 떠나 처음으로 낯선 진도읍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대학을 마칠때까지 장장 11년간이나 기나긴 자취생활은 하게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전기밥솥도 없었고, 가스렌지나 냉장도, 선풍기, 에어컨도 전기장판도 없던 시기였다. 취사도 근처 산에 올라가 소나무 잎을 긁어다가 또는 억새풀을 베어다가 만든 땔감으로 해결해야 했다. 근처 우물에서 물을 길러 쌀과 보리를 씻어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해먹는데 겨울에는 손이 시려 호호 불며 쌀과 보리를 씻었다. 겨울에는 냉골인 방에서 이불을 깔고 자는데 추우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그나마 중학교 2학년 초에 광주로 전학을 오니 연탄을 피우고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을 수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다.

내가 지닌 지금의 강인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열정이 어쩌면 지난 그 힘들었던 시절을 헤쳐오며 몸에 배인 결과물인지 모른다. 고생도 때론 선물이라고 했던가 일찍부터 나는 홀로서기를 통해 나를 관리하며 스스로를 추스리며 경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참고 기다리는 법도 배웠고, 돈의 소중함도 느꼈고, 결국은 내가 내 자신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쌍둥이들이 중학교 2학년이면, 나는 그때 다시 광주로 전학하여 공부하던 때인데....

'자식들이 자라면 언젠가는 내 품에서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그 시기가 빨리 왔구나~', '쌍둥이들을 지금 이 상태로 두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일까?', '녀석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10년 이후에 우리나라 인력시장이 어떤 모습일까?'와 우리나라의 무너진 공교육을 고민해보니 쉽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래 보내자! 좁은 우리나라에서 아웅다웅하기 보다는 더 큰 중국으로 보내 녀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꿈을 키워주자! 한 녀석이 아닌 쌍둥이들이니 서로 도우며 힘을 합쳐 잘 이겨내겠지! 

10월 31일 국제정주학교 이사장님과 통화를 하고, 곧바로 쌍둥이들 여권사진을 찍고 여권서류를 준비해서 11월 3일, 여권과 중국비자를 발급받았고 11월 17일 중국 하남성 정주국제학교로 쌍둥이들을 보냈다. 마음이 결정되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쌍둥이아빠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 고향 진도에서 보냈다. 태어나서 쭉 자라다가 1972년 초등학교 6학년 3월 초에 집을 떠나 진도읍으로 전학하여 다시 광주로 전학오기 전인 중학교 2학년 3월까지 만 2년을 자취를 하며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년까지 2년을 보냈다. 매주 일요일이면 일주일분 먹을 반찬(반찬이래야 김치가 전부였지만)과 쌀과 보리(50:50)를 담아서 읍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빈 김치통과 쌀보리 보자기를 가지고 4킬로미터를 걸어 나룻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 배로 건넜던 포구와 방파제는 지금은 헐어지고 씻겨져 많이 훼손되었고 그 넓은 바다와 개펄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모두 논으로 변했다. 내가 진도읍에서 자취를 하며 다니던 1972년과 1973년에는 마을 지산면 소포리에서 진도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200미터쯤 되는 바다를 건너가야 했다.

태풍이 오는 여름과 겨울에는 바다풍랑이 일어 위험하여 나룻배를 운항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도로포장이 잘 되어있고 차량이 발달했지만 당시는 진도읍에서 우리마을은 직선거리상으로는 가까웠지만 바다 때문에 육로는 가장 멀었다. 하루에 두번씩 오는 버스는 왕복에 시간도 많이 걸렸고 요금도 비쌌고 중간에 고장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자연은 위대했다. 태풍이나 겨울 매서운 바람 앞에는 인간은 너무 작아서 달리 피할 방법이 없었고 그저 하늘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다 파도가 잠잠해지면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널 때 큰 파도가 와서 나룻배에 부딪칠 때마다 배가 요동치며 간이 콩알만해지곤 했다. 아무리 강한 인간도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큰 파도가 다가오면 노련한 사공은 파도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기다리며 파도에 순응하여 맞추며 나아가곤 했다. 파도가 너무 쎄면 토요일은 포구 가게집에서 자고 다시 진도읍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도 남진님의 '가슴아프게' 노래를 들으면 당시 200미터 건너 마을을 지척에 두고 힘없이 터덜터덜 진도읍으로 돌아가던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자연은 많은 것을 제공해 주었다. 집에서 100미터만 나가면 염전이 있었고, 300미터만 나가면 당섬과 청구제라는 넓은 개펄이 있었다. 개펄에 나가면 망둥이며 바지락, 꼬막, 굴, 낙지, 게들이 많았다. 창단(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배수구가 있는 곳)에는 고기들이 많이 모여 있어 낚시에 제격이었다. 게들도 많았다. 똘짱게라고 바다 바위나 돌 밑에는 딱딱한 게들이 많아 개펄에 사는 짱뚱어(가장 좋은 미끼였으나 잡기가 어려웠다)나 논이나 들에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로 미끼 삼아 줄에 묶어 바위틈에 내리면 10초안에 똘짱게들이 대여섯마리가 다닥다닥 붙어서 올라오곤 했다.

밀물시간에 1시간만 이렇게 해도 두 되들이 주전자가 금새 절반이상 찼다. 이렇게 잡은 똘짱게는 간장에 쫄이고 볶아서 껍질째 씹어먹으면 고소했다. 개펄에는 이름모를 게들이 많았는데 잡아서 절구통에 넣어 가늘게 갈아 게젓을 담구어 놓고 여름철에는 보리밥에 유채기름과 게젓을 비비면 밥 한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금새 뚝딱 먹어치우곤 했다. 개펄 물길이 흐르는 골('게홍'이라고 불렀다)에 있는 구멍을 쑤시다보면 운 좋은 날에는 낙지며 갯장어를 잡는 행운도 있었다. 고향에서 나는 낙지는 크면서 질기지 않고 맛이 좋았다. 


소 풀을 먹이며 늦은 봄에는 보리를 베어 불에 구워먹고, 여름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고구마나 무우를 캐어먹기도 하고 밤에는 배가 고파 친구들과 깜깜한 밤을 이용해 바로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데도 무서움도 모르고 지금 군사교육시간에 배우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낮은 포복, 높은 포복을 스스로 터득해가며 서리를 하곤 했다.

여름철에는 떫은 감도 허기를 채우는 좋은 재료였다. 장마철에는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이른 꼭두새벽에  일어나 옆집의 감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밑으로 떨어진 조그만 감들을 남들보다 먼저 줍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주운 감을 씻어서 물독에 넣어두면 며칠 뒤 우려져서 떫은 맛이 감쪽같이 없어져 맛있게 먹곤 했다. 가을에는 고구마를 캐어 집으로 가는 마을 어르신(주로 여자분) 뒤를 따라가며 고구마좀 주세요 하면 지고 가던 광주리(집으로 엮어서 '메꼬리'라고 불렀다)에서 손에 잡히는 것으로 서너개씩 던져주곤 했다. 그런 옷이나 풀에 쓱쓱 문질러 이빨로 껍질을 벗겨 그냥 먹었다. 겨울에는 집마다 안방이나 작은방에 수숫대로 엮어 이어서 만든 고구마 저장소가 있었다.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서 먹고, 밤에는 논에 심겨진 배추를 가져와 보리밥에 된장으로 쌈을 싸먹었다.

내가 가진 열정과 도전, 참고 기다림은 어릴 때부터 푸근한 자연에서 배우고 체득한 것들이 많다. 지금은 마을에서 어릴적 개펄을 막아 논을 만들어 농사짓는 땅을 다시 헐어 개펄로 활용하지는 역간척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은 보상문제로 주춤해 있지만 어릴적 추억이 서린 개펄을 다시 살리는 논의가 진행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인다. 마을에는 전통문화체험관이 세워져 있고 주말이면 걸군농악과 강강수월래, 상여꾼소리, 북춤 등 어릴적 보고 듣고 자랐던 소리가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논 보다는 어릴적 개펄이 나에게 가져다 준 추억이 훨씬 많았다는 것, 이런 마음은 나 뿐만이 아니고 함께 자랐던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들도 똑같이 느끼는 아련한 향수이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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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나 : "윤아! 할머니 방에서 바느질상자 좀 가져오너라"
재윤 : "바느질 하시게요"
나 : "응, 어제 보니 시장바구니 손잡이가 너덜너덜하더구나"

곁에서 바느질 하는 걸 지켜보던 막내 재윤이 왈~
재윤 : "어쩜 아빠는 바느질 실력이 이렇게 좋으세요"
나 : "응, 아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빠 옷이나 양말이 떨어지면 아빠가 직접 바느질을 해서 기워입곤 했지"
재윤 : "아빠 바느질 실력은 뛰어나세요"
나 : "아빠 바느질 솜씨는 네 엄마도 인정했는걸. 아빠에게 이런 달란트가 있어 가족들을 위해 쓰게되니 아주 행복하구나~"

어제 농협하나로마트를 다녀오다보니 시장바구니 손잡이가 너덜너덜하는 걸 보고 오늘 생각이 나서 배란다에서 기우고 있었더니 쌍둥이자식들이 옆에 와서 내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결혼후, 내가 바느질을 할 줄 안다고 하니 아내가 믿지를 않았다. 그래서 잠시 실력발휘를 했더니 자기보다 바느질 솜씨가 더 낫다며 그 다음부터는 옷이 떨어지거나 자식들 신발주머니나 가방끈이 떨어지면 기우는 것은 모두 내 차지가 되어 버렸다.

손재주는 타고 나는 걸까?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살았다. 손으로 만드는 것도 칭찬을 들었고, 글씨도 잘 쓴 덕분에 학교 선생님을 대신하여 수업시간 칠판 판서는 내 몫이었다. 서예도 대학 1학년 말에 처음으로 배웠는데 당시 서예학원 원장님이 초보자인데도 예사 실력이 아니라고 계속 배우라고 꼬셨지만 딱 3개월 배우고 그만두었다.

1979년 12월, 9월초부터 4개월간 가정교사를 해서 받은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으로 내 2학년 1학기 대학 학비를 남겨놓고 남은 돈으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웅변, 서예, 합기도 학원에 딱 3개월 다녔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느질을 하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섬세해진다. 그저 길 따라 한 올, 한 올 집중하여 순서대로 해야 한다. 글을 쓰고 자립심을 키우며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홀로 살아야 했던 자취생활, 군생활, 아내와의 사별, 자식 셋을 키우고 사는 싱글대디의 삶을 아시고 나에게 이런 달란트를 미리 주신 걸까???

그래 옷, 신발주머니 뿐만 아니라 마음 속 상처나 외로움도 다 나에게 가져와라, 이 애비가 흔적도 없이 다 꿰매줄테니...^^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아내 생전에는 아내는 처갓집의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처갓집 제사도 모셨고,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살았고 처갓쪽 가족모임은 모두 우리집에서 했다. 명절이면 처남이나 처형, 처 이모와 이모부, 심지어는 처의 이종언니부부(처 큰이모 큰딸)도 우리 집으로 모여 명절을 보내곤 했다.

자연히 우리집 행사에도 다들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이사때면 처남이나 동서와 처형도 우리집에 와서 짐도 날라주고 전기배선이나 현관보조키 달기 등을 해주곤 했다. 특히 손위 동서는 엘리베이터 회사에도 근무하였고 지금도 엘리베이터 관련 벤처기업에서 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기나 전기배선 쪽은 기술과 경험이 많아 우리집 전기관련 문제의 해결사였다.

그러다보니 아내는 집안에 수리할 사항이나 고칠 사항이 생기면 나보다는 형부(나에게는 손위동서)를 찿았고 내 차지까지는 기회가 오지를 않았다. 아니 나에게 전기나 배선 일은 아예 미덥다고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하며 살아온지 23년째... 이래뵈도 내 어릴 적에는 내가 손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집안의 손이 가는 잔일이나 수리는 내게 부탁하여 내가 곧잘 해결해주곤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내 손재주는 바느질만 빼고는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그렇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집에 이사 등 큰 일이 있을때마다 다들 와서 도움을 주는 편한 생활이 익숙하고 이를 즐기고 살았는지 모른다.

내 바느질 솜씨는 여자인 아내도 인정을 했다. 하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을 마칠때까지 자취생활과 군생활(비록 장교였지만)을 합하면 13년 6개월을 객지생활을 하고 살았으니 바느질이며 취사, 반찬을 만드는 일, 요리, 집안 수리나 전기기구의 간단한 수리 등 어지간한 문제는 스스로 자급자족을 해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도 이 세상에 없고 지금도 장모님은 내가 모시고 있지만 처갓집 가장 역할은 막내처남이 수년전부터 제사를 모시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넘어갔고 명절에도 모임은 처남집에서 하고 있다. 이번 집 이사를 하면서 현관입구 번호키를 기존에 달려있던 키를 그대로 쓰려고 했더니 장모님이 글씨가 작고 눈에 익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석을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기능이 없어 불편하다고 반대하시며 이전 아파트에서 쓰던 키로 바꾸어달라고 하신다. 손윗동서가 달아보려고 저녁 늦게 와서 2시간이나 시도를 했지만 장비도 부족하고(특히 현관 철문에 구멍을 뚫어 번호키 본체를 고정시키는 일) 시간에 쫓겨 금요일 밤 11시에 미완성의 상태로 두고 월요일에 와서 고쳐주겠다고 하고 가버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홀로서기를 해야겠구나!' 마음을 먹고 있던 차였던지라 철물점에 들러 구멍을 뚫는 드릴 바이트날을 구입해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30분만에 조립을 완료했더니 장모님이나 쌍둥이자식들이 놀라는 표정이다. "자네도 이런 일을 다 할 줄 아는가? 고맙네", "아빠! 아빠가 이걸 하셨다. 와~ 우리 아빠 대단하시다" 내친 김에 거실에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못을 박아 시계도 달고, 가족사진 액자도 달고, 내 공부하는 식탁 위 전등도 이전 전등으로 교체하고... 그동안 숨겨놓은 내 실력을 발휘했더나 가족들이 모두 놀란다.

'짜식들~ 이 아빠를 뭘로 보고.... 아빠도 한번 하면 한다는 사람이란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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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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