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 고향 진도에서 보냈다. 태어나서 쭉 자라다가 1972년 초등학교 6학년 3월 초에 집을 떠나 진도읍으로 전학하여 다시 광주로 전학오기 전인 중학교 2학년 3월까지 만 2년을 자취를 하며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년까지 2년을 보냈다. 매주 일요일이면 일주일분 먹을 반찬(반찬이래야 김치가 전부였지만)과 쌀과 보리(50:50)를 담아서 읍으로 가서 공부하다가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빈 김치통과 쌀보리 보자기를 가지고 4킬로미터를 걸어 나룻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 배로 건넜던 포구와 방파제는 지금은 헐어지고 씻겨져 많이 훼손되었고 그 넓은 바다와 개펄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모두 논으로 변했다. 내가 진도읍에서 자취를 하며 다니던 1972년과 1973년에는 마을 지산면 소포리에서 진도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200미터쯤 되는 바다를 건너가야 했다.
태풍이 오는 여름과 겨울에는 바다풍랑이 일어 위험하여 나룻배를 운항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도로포장이 잘 되어있고 차량이 발달했지만 당시는 진도읍에서 우리마을은 직선거리상으로는 가까웠지만 바다 때문에 육로는 가장 멀었다. 하루에 두번씩 오는 버스는 왕복에 시간도 많이 걸렸고 요금도 비쌌고 중간에 고장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자연은 위대했다. 태풍이나 겨울 매서운 바람 앞에는 인간은 너무 작아서 달리 피할 방법이 없었고 그저 하늘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다 파도가 잠잠해지면 기다리는 사람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널 때 큰 파도가 와서 나룻배에 부딪칠 때마다 배가 요동치며 간이 콩알만해지곤 했다. 아무리 강한 인간도 커다란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큰 파도가 다가오면 노련한 사공은 파도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기다리며 파도에 순응하여 맞추며 나아가곤 했다. 파도가 너무 쎄면 토요일은 포구 가게집에서 자고 다시 진도읍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도 남진님의 '가슴아프게' 노래를 들으면 당시 200미터 건너 마을을 지척에 두고 힘없이 터덜터덜 진도읍으로 돌아가던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자연은 많은 것을 제공해 주었다. 집에서 100미터만 나가면 염전이 있었고, 300미터만 나가면 당섬과 청구제라는 넓은 개펄이 있었다. 개펄에 나가면 망둥이며 바지락, 꼬막, 굴, 낙지, 게들이 많았다. 창단(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배수구가 있는 곳)에는 고기들이 많이 모여 있어 낚시에 제격이었다. 게들도 많았다. 똘짱게라고 바다 바위나 돌 밑에는 딱딱한 게들이 많아 개펄에 사는 짱뚱어(가장 좋은 미끼였으나 잡기가 어려웠다)나 논이나 들에서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로 미끼 삼아 줄에 묶어 바위틈에 내리면 10초안에 똘짱게들이 대여섯마리가 다닥다닥 붙어서 올라오곤 했다.
밀물시간에 1시간만 이렇게 해도 두 되들이 주전자가 금새 절반이상 찼다. 이렇게 잡은 똘짱게는 간장에 쫄이고 볶아서 껍질째 씹어먹으면 고소했다. 개펄에는 이름모를 게들이 많았는데 잡아서 절구통에 넣어 가늘게 갈아 게젓을 담구어 놓고 여름철에는 보리밥에 유채기름과 게젓을 비비면 밥 한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금새 뚝딱 먹어치우곤 했다. 개펄 물길이 흐르는 골('게홍'이라고 불렀다)에 있는 구멍을 쑤시다보면 운 좋은 날에는 낙지며 갯장어를 잡는 행운도 있었다. 고향에서 나는 낙지는 크면서 질기지 않고 맛이 좋았다.
소 풀을 먹이며 늦은 봄에는 보리를 베어 불에 구워먹고, 여름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고구마나 무우를 캐어먹기도 하고 밤에는 배가 고파 친구들과 깜깜한 밤을 이용해 바로 옆에 공동묘지가 있는데도 무서움도 모르고 지금 군사교육시간에 배우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낮은 포복, 높은 포복을 스스로 터득해가며 서리를 하곤 했다.
여름철에는 떫은 감도 허기를 채우는 좋은 재료였다. 장마철에는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이른 꼭두새벽에 일어나 옆집의 감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밑으로 떨어진 조그만 감들을 남들보다 먼저 줍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주운 감을 씻어서 물독에 넣어두면 며칠 뒤 우려져서 떫은 맛이 감쪽같이 없어져 맛있게 먹곤 했다. 가을에는 고구마를 캐어 집으로 가는 마을 어르신(주로 여자분) 뒤를 따라가며 고구마좀 주세요 하면 지고 가던 광주리(집으로 엮어서 '메꼬리'라고 불렀다)에서 손에 잡히는 것으로 서너개씩 던져주곤 했다. 그런 옷이나 풀에 쓱쓱 문질러 이빨로 껍질을 벗겨 그냥 먹었다. 겨울에는 집마다 안방이나 작은방에 수숫대로 엮어 이어서 만든 고구마 저장소가 있었다.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서 먹고, 밤에는 논에 심겨진 배추를 가져와 보리밥에 된장으로 쌈을 싸먹었다.
내가 가진 열정과 도전, 참고 기다림은 어릴 때부터 푸근한 자연에서 배우고 체득한 것들이 많다. 지금은 마을에서 어릴적 개펄을 막아 논을 만들어 농사짓는 땅을 다시 헐어 개펄로 활용하지는 역간척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은 보상문제로 주춤해 있지만 어릴적 추억이 서린 개펄을 다시 살리는 논의가 진행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인다. 마을에는 전통문화체험관이 세워져 있고 주말이면 걸군농악과 강강수월래, 상여꾼소리, 북춤 등 어릴적 보고 듣고 자랐던 소리가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논 보다는 어릴적 개펄이 나에게 가져다 준 추억이 훨씬 많았다는 것, 이런 마음은 나 뿐만이 아니고 함께 자랐던 마을 사람들이나 친구들도 똑같이 느끼는 아련한 향수이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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