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판정'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05.27 쥐눈이콩
  2. 2009.04.20 얄궂은 인생사
  3. 2009.04.19 고난의 의미
  4. 2009.04.19 아팠던 말 한마디

'부르르' 저녁식사를 하는데 진동으로 해 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린다.
멀리 지방에서 상경한 회원사 직원들과 업무관련 논의를 하며 저녁식사를 하는데 시골
둘째작은아버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이다. 요란한 주변 사람들 말소리 때문인지 금새
밖에서 식사중이라는 것을 눈치채신다.
"승훈이냐! 밖에서 직원들과 식사를 하는 모양이구나. 오늘 쥐눈이콩을 택배로 보냈는데
잘 도착했는지 확인차 전화했다."
"일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 식사 중입니다. 그냥 집에서 밥에 놓아 드시기 번거롭게 저희
집에까지 보내주셨어요"
"쥐눈이 콩을 보니 쌍둥이엄마와 쌍둥이들 생각이 나더구나. 보내주면 쌍둥이들 잘 먹을 것
같아서 조금 보냈다"
"아직 집에 들어가지를 못했는데요 집에 도착하면 확인해보고 전화드릴께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께요"

지난 2005년 5월, 집사람이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쥐눈이콩이 암 치료에 효험이 많은
항암식품이라는 기사를 보고 시골집으로 쥐눈이콩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5월
하순이면 쥐눈이콩은 이미 수확철이라 그 해에는 쥐눈이콩을 파종하지 못해 결국 마을에서
이집 저집 부탁하여 겨우 구해서 보내주셨다. 이듬해 2006년 시골 우리 논두렁에는 온통
쥐눈이콩으로 삥 둘러쌓이게 심었고 집사람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까지 끊이지 않고
쥐눈이콩을 보내주셨다.

밤 11시 15분에 집에 도착해보니 조그만 박스에 막 수확한 듯 싱싱한 쥐눈이콩이 박스 안에
가득 들어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장모님이 이미 1/4쯤 까서 놓아두셨다. 요즘 몸도 좋지
않으신데 그냥 주면 상해서 버린다고 그 아픔 몸으로 일부러 까신 모양이다. 저녁 6시 30분에
회사 일로 늦는다고 전화를 했을때 서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럴줄 알았으면 양해를 구하고 좀 더 일찍 들어올껄....

대충 씻고 밤 11시 40분부터 콩깍지를 까지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란 탓에 이런
콩까기는 잘 하는데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것들이 많아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조금만 까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장모님이 내일 또 아픈 몸으로 손대실 것 같아
한줌만 더, 이번 한줌만 더...하고 까다보니 어느덧 열줌이 되고 스무줌이 되고....조금만
더 하며 계속 까다보니 나중에는 큰애까지 합류하여 도와주어 결국 밤 1시 45분에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두시간 넘게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콩깍지를 깠더니 눈도 시리고 허리도
아프고 팔다리도 쑤신다. 그래도 나는 젊으니(?) 괜찮지만 장모님은 저만큼을 까시느라
오늘 얼마나 힘드셨을까?

모두 마치고 정리하고 일어서는데 거실에 걸려진 가족사진 속 집사람 얼굴이 오늘따라
나에게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것만 같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추석이 3주 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집사람과 나는 수산시장을 다니며 추석 제수용품을 미리 준비하느라
바빴다. 점심때 잠시 짬을 내어 노량진 수산시장을 함께 다녀오곤 했다. 추석이 닥치면
건어물이 비싸다고 미리 사다가 손질하여 말려두거나 손질하여 냉동시켜 두었다가
아이스박스에 담아 추석때 시골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추석 전날이 할아버지 제사이다보니
장손 며느리인 집사람은 결혼후부터 유방암으로 입원해있던 작년을 빼고는 줄곧 매년
도맡아서 하곤 했다. 매년 추석때 집으로 내려갈 때는 내 차는 제수용품으로 가득 차곤
했으며 덕분에 할아버지 제사상과 추석 차례상은 항상 풍성했다.

이렇듯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하던 집사람은 병이 들고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게 될
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후에는 나를 많이 훈련시켰던 것 같다. 그동안 집사람이 집안
모든 것을 결정하다보니 나는 그저 운전하고 짐을 나르는 역할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시장 가자고 하면 차를 운전하고, 사놓은 물건 나르고, 물건 고르는 것과
가격 흥정하는 것은 모두 집사람 몫이었다. 시장에서도, 할인점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집사람은 가격 흥정을 잘해 가격을 많이 깍아서 나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보내곤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큰 금액을 후려쳐서 결국 서로 양보하는 선에서 가격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나는 아무리해도 부르는 물건값에서 단돈 몇천원도 깎지를 못해 그냥 달라는대로
주거나 겨우 덤이나 하나 얻어오는데 집사람은 예전에 완구가게를 운영해본 경험으로
흥정을 잘했다. 상인들은 흥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장사하세요?" 하고 묻곤 헸는데
그때마다 집사람은 미소를 띄며 "네, 조그만 가게를요..." 말하면 상인들은 "어쩐지..." 라며
다음에는 꼭 자기 가게를 단골로 삼으라고 기분좋게 덤까지 얹어주곤 했다. 이렇게 단골로
삼은 거래처를 회사 직원들이나 친구 등 여러사람에게 소개해 주기도 했다.

유방암판정을 받은 이후  집사람은 나에게 이것저것 주문하며 일을 시키며 결과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은행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면 송금수수료가 적게 든다고 미리 은행에
신청하여 만들어두고 사용하라고 하고 가족과 친척들 생일과 제사날, 은행 입금계좌,
연락처(집, 회사. 핸드폰)을 깨알같이 적어서 알려주었다. 수산시장에 가서는 생선을
고를 때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느 때 가야 싸게 사는지도 알려 주었다. 이마트나
하나로마트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맛있는 과일이나, 신선한 야채 고르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우유나 식품도 유통일자를 보도록 하고 대충 골랐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꼭 깊숙히 속에 있는 것과 비교해보고 하루라도 유통일자가 길고 이왕이면 덤이
붙은 것으로 골라 사도록 했다. 평소 옥션으로 싸게 사먹던 과일농장이나 옥수수집
연락처, 입금계좌도 모두 깨알같이 적어 남겨놓고 갔다.

쌍둥이자식들 옷도 항상 계절이 닥치기 전에 미리 사두곤 했다. 여름옷은 겨울에, 겨울 옷은
여름에 세일할 때 사면 싸다고 집으로 오는 전단지의 세일행사를 꼼꼼히 살피곤 했다.
혼자서 세 자식을 키우며 홀로서기를 했던 지난 10개월을 생각해보니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집사람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곤 했다.

집사람없이 처음 맞이하는 올 추석은 남은 자식 셋을 데리고 시골을 내려가야 한다.
항상 집사람이 타던 조수석은 생전 그토록 예뻐했던 막내 재윤이 자리가 되었다. 그 먼
귀성길 집사람은 과자며 음료, 과일을 미리 준비해서 내가 배고프거나 심심치않게 먹으며
내려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가 내 간식거리를 챙겨줄꺼나?

항상 집사람이 손수 준비해서 차렸던 할아버지 제사상과 추석 차례상인데, 이제는
거꾸로 본인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그 상을 받아야 한다니 인생사가
어찌 이다지도 얄궂은지....

아마도 먼저 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께 많은 이쁨을 받고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고 간 집사람의 부탁대로 나도 위축되지 않고
삶을 열심히 살리라 다짐해 본다. 나의 열정의 이면에는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집사람의
삶의 흔적이 많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김승훈 200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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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어제는 2년전 간이식수술을 받고 힘들게 투병생활을 하는 어느 선배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았다.
" 저는 이 제 몸 하나 간수 하지 못한 과오로 친지, 동료, 선후배 등 여러 님들을 번잡하게 누를 끼쳐온 우를 범한 큰 죄인이기도 합니다. (중략) 생의 막장에 이르러 두려움과 외로움 등 그 절망의 고난을 헤쳐나오던 시절~ 눈물로서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은 오로지 나름대로 이 후락의 정신과 동행하면서 소중한 내 님들, 그리고 연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행복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들과 함께 행복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내 안에 결의를 새겼던 기억들입니다.
시한부라는 삶의 막다른 종착점...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엄습해 오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이란 것도 너무나 컷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수 많았던 지난 삶의 거짓과 탐욕에 대한 회한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하였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하여~ 다시~ 단 한번 만이라도 기회가 주어 진다면...
그래, 제발~ 1년이라도 더 내 가련한 생이 연장될 수만 있다면...
이 죄과만이라도 깨끗이 정리하고 싶었고... 그러한 통한에 가슴 앓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

어제는 집사람이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자식들과 잠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되었다.

집사람 : "명이, 윤이가 엄마 속상하게 하면 엄마는 건강이 나빠져 하늘나라로 가게되고 너희는 팥쥐 엄마랑 살게 된단다. 아빠는 혼자서는 힘들어서 형아랑 명이랑, 윤이 셋이를 못키운단다. 그래서 팥쥐엄마랑 살아야 한단다. 팥쥐엄마가 누군지 알지?"

윤이 : "알아요~"

집사람 : "팥쥐엄마랑 살면 많이 힘들텐데 괜찮겠니?"

명이 : "우리 때리면 그럼 형아한데 이르지 뭐~~"

집사람 : "형아도 너희 편들었다가는 팥쥐엄마에게 혼날텐데~~"

윤이 : "팥쥐엄마는 아빠 안보이는데서는 일도 막 시키고, 밥도 안차려준데~~"

명이 : "그럼, 아빠한테 이르면 되지 뭐~~"

윤이 : "팥쥐엄마는 아빠앞에서는 당연히 잘해주지. 아빠가 안보이는데서는 막 일시켜~~ 명이 형은 책도 안봤어?"

명이 : "......"

집사람 : "그러니까 명이 윤이가 엄마 말을 잘 듣고, 엄마가 신경쓰지 않도록 많이 도와줘야 해! 알았지?"

명이윤이 : "네, 엄마!"


등을 돌리고 있던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진다. 짐사람은 점점 몸의 상태가 악화되어 감을 감지하는지 애들에게 자신의 빈자리에 대한 준비를 하나하나 시키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나라라는 표현도 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참다운 행복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칸트'의 말처럼 이제는 최소한 가족에게라도 주려고 해도 줄수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고 있음인지 마음은 조급해져 가는 것 같다.

3개월전 갑자기 사진을 찍겠다고 했을때만해도,
그것이 영정사진을 찍겠다는 소리인지는 모르고 조금이라도 밝은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것이 세상 여자들의 똑같은 마음이려니 생각하고,
괜한 걱정 하지 말라고 나무래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집사람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아야 하니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하나님! 저에게 주어질 이 고통, 이 고난의 끝은 과연 어디입니까?
어리하여 저에게, 제 자식에게 애비가 겪었던 애미없는 설움과 시련을 그대로 넘겨주려 하십니까?

이제는 좌절하기에 앞서 과연 이 고난의 끝은 과연 어디인지 한번 끝까지 싸워 이겨내리라는 오기가 생겨난다.

선배가 보내준 채근담이 떠오른다.
"인생에는 괴로울 때가 있고 즐거울 때가 있다. 고락이 서로 접하고 교대하는 가운제 심신이 연마되어 간다. 아직 깊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깊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은 고락이 서로 접해 흐르는 물 속에서 떠내려가는 한 조각의 나무는 아니다. 고락이 교대하여 흘러가는 동안에 숭고한 정신을 얻게 되는 것이 인생의 참모습이다."

2006.7.11.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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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큰 애가 고3이다.
요즘 애들답게 인터넷에 푹 빠져 있다.
꿈은 제2의 안철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3년전 고등학교 진학건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나와 집사람은 인문계를 진학했으면 하였지만, 큰애는 실업고를 우겼고 학과까지도 인터넷정보학과로 일찌감치 점찍어 두고 있었다. 세상을 보다 많이 살어온 부모의 경험상으로는 실업계 고등학교는 취업위주 교육을 시키므로 대학진학 수업은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게 된다. 지금 세상이 학력위주로 움직이는데 그래도 대학을 진학했으면 했고, 대학을 진학하려면 정상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설득을 했는데 막무가내로 우기니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승낙을 해 주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큰애가 후회를 많이 하는듯 보였다.
실업계 고교이다보니 진학하려는 학생과 취업하려는 학생으로 나뉘고, 그러다보니 수업분위기도 엉망이고, 학교에 가도 정상적인 수업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학원도 다니다 중도에 때쳐 치운 적도 몇번 있었지만 본인이 대학을 갈 수 있다고 큰소리 치기에 그동안 믿고 기다렸다.

그 와중에 집사람이 작년 5월에 암판정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심해졌다.
1년에 5,000만원도 더 드는 암 치료비에 가슴을 쥐어짜며 초등학교 3학년인 쌍둥이들 학원까지 끊었다.

큰애도 올해 3월, 그 아끼던 컴까지 팔아서 엄마 병원비에 보태라고 38만원을 내 놓을때만해도 '가족의 고통을 겪으며 큰애가 성숙해 졌구나!' 우리 부부 서로 부등켜 안고 논물을 흘리며, 집사람은 꼭 병마를 이겨내리라 마음을 더욱 강하게 다졌었다.

지난 토요일 저녁때,
내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집사람과 큰애가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큰에는 이제 시험이 4개월도 채 남지 않다보니 학원을 다녔으면 했는데 형편상 말은 하지 못하고 있는데 빈둥빈둥 자고 있는 큰애 모습을 보고 답답하여 한마디 하였더니 두눈을 부릅뜨고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엄마아빠가 저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자식교육 잘 시키고, 뒷바라지 잘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고3인 자식, 초등학생 쌍둥이들 학원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더 찢기고, 가슴이 아프거늘, 당장 지 어미의 삶의 마지막이 내일이 될지, 한달 후가 될지 모르는데, 그런 철없는 말을 내 뱉다니...

큰애를 불러다 야단을 쳤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만으로도 너는 평생 네 엄마를 업고 다녀도 부족하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네 엄마에게 꼭 그런 말을 해야만 네 속이 후련하겠느냐?
그렇다면 반대로 너는 엄마아빠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부모는 살아있는 그 자체로도 커다란 그늘이란다."

큰애는 금새 잘못을 뉘우치고 손이 발이 되도록 엄마에게 빌고 겨우 수습을 시켰지만,
휑하니 뚫린 나와 집사람의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2006.7.10.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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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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