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태평성대, 강건성세(康乾盛世)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일컬어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중원을 평정하고 1661년 즉위한 청나라 황제

강희제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130년을 지칭하는 말인 바, 20세기 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뚱까지도 "중국의 미래는 강희,

옹정, 건륭 세 성군이 남긴 선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강건성세'란 말이 지금 중국의

화두인 것 같다고 합니다. 중국의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이 '강건성세' 바람은 이제 학계,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서 불고 있다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중 강희제는

"수신제가", 옹정제는 "치국", 그리고 "평천하"는

건륭제로 대변된다고 합니다.

그 중 현 중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이가 평천하를

이룬 건륭제라고 합니다.

 

건륭제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를 개척하고 결정

지은 황제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음양설의 참뜻을 받아들이고,

다스림에 있어서 관대함은 백으로, 엄격함은

흑으로 보는 등, "흑과 백의 정치"를 절묘하게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관대함과 엄격함의 조화가 곧 정치"

라고 보고, 강함과 부드러움을 잘 아울러

항상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해 은혜와

위엄을 모두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통치철학이었다는 것이죠.

 

현재 중국 정부의 정책, 특히 정치 경제부문에

있어서의 정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바로 이런

건륭제의 "흑과 백의 정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정치적 면에서는 흑에 해당하는 사회주의를

경제적 면에서는 백에 해당하는 자본주의를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흑에 해당하는 보수주의를

국제적으로는 백에 해당하는 개방주의를 택하여

추진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서양이 동양을 앞선 것은 "산업혁명 이후

500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기원전 2000년부터

19세기 초까지 4000년 가까이 세계를 움직인

구동축은 중국 이나 인도였다는 것이죠.

 

1750년까지만 해도 중국인의 생활수준은

유럽에 못지않았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저력을 감안하면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능가해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란 지위를 200년

만에 탈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직 '허장성세' 정도로

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지금 중국의 욕심은 이런 역사적 자부심에 세계

경제의 평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과 유럽의 견제는 더욱 견고해지며

칼을 갈고 있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는 결국 이러한 서방과

중국의 제로섬 게임이 되어가고 있으며 입으로는

원-윈의 상생을 말하고 있지만 서로가 '너 죽고

나 살자'식 또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식의

무서운 뒷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의 중국 지도부가 어떻게

지난 역사속의 찬란했던 '강건성세' 시대의

바람을 다시 불러 일으켜 이 난국을 뚫어나갈

것인지....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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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영국인

토마스 파(Thomas Parr?1438~1589)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52세까지 장수했던 그는 155㎝의 키에 몸무게

53㎏의 단구(短軀)였다고 합니다.

 

80세에 처음 결혼하여 1남1여를 두었고 122세에

재혼까지 했는데 그의 장수에 대한 소문이 나자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찰스 1세가 그를 왕궁으로

초대하여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데 그때의 과식이

원인이 되어 2개월 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당시 왕궁에서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 루벤스에게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이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위스키 '올드 파(Old Parr)'의 브랜드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의 모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가하는 논의는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성경(창세기 6-3)에는 사람의 수명이 120세로

나온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자들도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통계청에서도 현재 65세를 넘은 사람의 평균

수명이 91세라고 발표한 것을 보면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라는 말은 옛말이 되고 인생

백세 시대가 온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요즘은 또 '인생 백년 사계절 설(說)'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25세까지가 '봄',

50세까지가 '여름',

75세까지가 '가을',

100세 까지가 '겨울'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따른다면 70세 노인은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晩秋)쯤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0세 노인은 이제 막 초겨울에 접어든 셈이 되는 셈이고요.

 

동양에서와 같은 회갑(回甲) 개념이 없는 서양

에서는 대체로 노인의 기준을 75세로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65세에서 75세까지를 'young old'

또는 active retirement(활동적 은퇴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아직도 사회 활동을 하기에

충분한 연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연령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젊음이라는 주장들도 많습니다.

 

유대계 미국 시인인 사무엘 울만은 일찍이 그의

유명한 시 '청춘 (Youth)'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 it is a state

of mind)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노년

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재작년 96세로 타계한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타계 직전까지 강연과 집필을 계속

했는데~ 페루의 민속사를 읽고 있으면서 아직도

공부하시냐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 늙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1973년에 96세로 타계한 금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3세 때 UN에서 조국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를 연주하고 평화에

대한 연설을 하여 세계인들을 감격케 했습니다.

 

이들보다 나이는 적지만 금년도 70세인 세계

제일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최근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쉬면 늙는다 (If I rest, I rust)'라며 바쁜 마음

(busy mind) 이야말로 건강한 마음 (healthy

mind)이라며 젊음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 결 같이 젊은이보다 더 젊은 꿈과

열정을 가지고 살았거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된다."

"이 나이에 무슨… 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노령에도 뇌세포는 증식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

 

확실히 '늙음'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생사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 수 있다면 감사한 인생이라 믿습니다.

 

항상 젊은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바쁘게 사는 것이 젊음과 장수의

비결임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요즘처럼 '세월이 살 같다'는 말씀이 피부로

느껴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이면 금방 저녁이 되고, 월요일이면 금 새

주말을 맞습니다.

새해 신년인사의 목소리들이 아직도 귓가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계절은 이미 11월 중순, 겨울의 초입에서 첫눈을

맞았습니다.

 

'인생 백년 사계절 설(說)'에 의하면 50대는

이제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녹색의 활력들이 형형색색의 고운

빛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이치는 우리 모두의 형상을 끊임

없이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몸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하여도...

마음만은 더욱 청춘의 푸르름으로 달려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나이 값도 못 한다'의 통념 정도는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어쩜 '토마스 파'의 152세 삶보다

더 장수하는 비결을 가져다 주리라 믿습니다.

 

(회사 조훈 부장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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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미국의 정치가이자 발명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평생 동안 자신이

만든 인생지침을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프랭클린은 어려서부터 겪은 체험의 값진

교훈을 인생지침으로 삼았는데, 20세 무렵

부터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며 철저하게

실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던 프랭클린은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마침 친구가 가격이 비싼 맛있는 식사와

합께 맥주를 시켜서 마셨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돈이 없어 고작 냉수에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여보게 친구!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맥주나 한 잔 같이 하지 그래.. 자네도 맥주

한 잔 시키게. 냉수만 마셔서야 되겠는가."

 

친구가 이렇게 핀잔을 주자, 프랭클린은

빙그레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네 맥주를 무엇으로 만드는 줄 아는가.

99프로는 물로 되어 있다네. 자네는 지금

가공품을 마시고 있고, 나는 그 원료를

마시고 있는 거라네."

 

이처럼 프랭크린은 냉수를 마시며 '절약'을

배웠고 '절약'은 그의 인생지침 중의 하나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어느 날인가 프랭클린은 한 선배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선배도 역시 가난해서 다락방에 살고 있는

신세였습니다. 프랭클린은 다락방으로 들어

서다가 문이 너무 작아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어이쿠!"

프랭클린은 아파서 순간적으로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이때 그집에 사는 선배가

프랭클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지? 자넨 지금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운

거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여라!' 이것이 자네가 오늘 내 다락방에

들어오면서 배우게 된 인생지침이라네."

 

프랭클린의 수첩에 '겸손'이라는 인생지침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인생지침은 가난했던 프랭클린을 나중에

피뢰침의 발명가로, 위대한 정치가로 변신

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 주머니에서 나온 낡은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인생지침 13가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절약, 근면, 성실, 정의, 침묵, 규율, 중용,

청결, 겸손, 평정, 순결, 결단, 건강,

 

 

어떻습니까?

주옥같은 단어들이지요?!

 

하지만 저 단어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라 할 것입니다.

 

제 경우만 돌아 봐도 저 소중한 단어들을

제 삶의 그 어느 순간에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던 것 같아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절약은커녕 늘 퍼 먹고 막 쓰기를 좋아했고,

근면은커녕 게으르기가 나무늘보와 같았고,

성실은커녕 대충, 건성 늘 흘리고 다녔으며,

 

정의는커녕 불의가 춤을 춰도 용기가 없었고,

침묵은커녕 나이 먹을수록 수다는 많아졌고,

규율은커녕 줄서는 것조차 피하기 빈번했고,

 

중용은커녕 이편저편을 왔다리 갔다리했고,

청결은커녕 제 책상 하나 훔치기도 늘 미뤘고,

겸손은커녕 나서다 욕을 쳐 먹는 게 다수였고,

 

평정은커녕 불같은 성깔로 주변을 놀라게 했고,

순결은커녕 나보다 상대의 순결을 더 바랐고,

결단은커녕 차일피일 미루는 게 버릇이었고,

 

건강은커녕 남의 간을 빌어 연명하고 있으니...

그저... 참으로 부끄러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 삶조차 잘 지키지 못하는 삶의

연명이긴 하지만, 이 칙칙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저 '벤자민

프랭클린'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이 땅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년 1월 17일 ~ 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특별한 공식적 지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군(軍)과의 동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미국 독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의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등을 발명하였는데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과

이 벤저민 프랭클린(100$) 두 명 뿐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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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중국 4대 미인은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이다.

중국인들 스스로 이렇게 규정했다.


침어낙안 (沈漁落雁),

기러기는 땅 밑으로 떨어지며,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폐월수화 (閉月羞花),

달은 구름 뒤로 얼굴 가리고,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네


물고기로 하여금 부끄러워 물밑으로 숨게 만들었다는....

월나라 미인 서시의 미모는 沈魚(침어)이다

       


거문고 타는 모습에 반한 기러기가 날갯짓을 멈춰 떨어졌다는.....

왕소군의 미모는落雁(낙안)이다.


고개 들어 달을 보자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의 미모는 閉月(폐월)이다.


꽃을 건드리자 꽃도 잎으로 가리며 부끄러워했다는......

양귀비의 미모는 羞花(수화)이다.



한(漢)나라 원제(元帝)가  자꾸만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흉노 왕에게 반반한 궁녀 하나를 주는 미인계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원제도 남자인지라,

그 많은 궁녀 중 하나라도 남 주기는 아까웠던지,

궁녀들을 그린 초상화 그림책을 가져오게 해서 쭉 훑어보다가

그 중에서 가장 못나게 생긴 왕소군을 찍었던 것이다.


원제가 궁녀가 너무 많다보니 제풀에 복이 겨워 양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그 마차가 닿는 곳에 있는 궁녀를 찍기도 하고 별에 별 짓을 다 하였는데


몇 번 해보니 그것도 귀찮은지라  궁녀의 초상화 그림책을 만들어놓고는

생각날 때마다 그 리스트를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픽업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요즘처럼 카메라와 디카가 없었다는 데서 왕소군의 비극은 시작된다.

대박인생을 꿈꾸는 황실 궁녀들이 궁정화가 모연수에게 앞 다투어  찾아가

뇌물을 바쳐가며 포또샵을 해줄 것을 졸라대니,


기고만장하고 목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모연수에게

단 한사람......왕소군만이 모연수를 찾지 않았다.

자신의 미모에 자신만만했기 때문이었던가,
아님 야심이 없었던가
어쨌든,
왕소군은 괘씸죄에 걸려 그림책에서 가장 못나게 그려지고 말았다.


원제란 넘이 꼴에 남자라고....

제일 못생긴 왕소군을 찍어서 흉노왕 앞에 불러 놓았는데....

      


아뿔싸~~~ 한 궁녀가 불려왔는데 천하의 절색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흉노왕은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모르고,
그렇다고 황제 체면에 도로 물릴 수도 없고...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왕소군을 보낸 원제는

바로 모연수를 불러 목을 쳐버린다.


왕의 명령 때문에 가족과 친지를 두고 오랑캐나라로 떠나는
왕소군의 슬픈 사연을 담은 이태백의 시조가 있다.


<昭君怨(소군원)> - 이백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소군이 옥 안장 추어올려

上馬涕紅頰 (상마체홍협)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네.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 첩이 되겠지.



오랑캐 땅인 변방에 끌려가 외로움에 떨며
다시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는
애끓는
왕소군의 모습을 묘사한 시는

시인 동방규의 昭君怨(소군원)이라는 제목의 시로 남아 있다. 

<昭君怨(소군원)> - 동방규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자연히 옷 띠가 헐렁해지니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이는 허리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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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중국 9인의 지혜

좋은글 2009. 11. 10. 09:14

1.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 년 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 단 한 번의 기회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

 

 

2. 용모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 때 보잘 것 없는 외모 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증’의 천거를 번번이 거부하며 십 년 간이나

말단 벼슬아치 ‘집극랑’ 자리를 맴돌게 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 때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 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 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천하 통일을 이룩한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 한나라 회음 후 한신(韓信) -

 

 

3. 한때 자존심과 명예를 짓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 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

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을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 

 

 

4.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 딸로 태어나

갓 14살 때 최 말단 후궁 재인이 되어 당태종

이세민을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 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비구니로

물러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으로 돌아와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가 된 후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의’를 처형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살..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고 나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女帝 聖神皇帝가

되어 15년간 천하를 다스렸다.

 

 

- 중국유일 여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

 

 

5. 집안배경이 나빠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 말기 안휘성의 빈농

한족 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뭄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 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 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 사대부 집안의 멸시와 견제 속에서

시달려야했다.

 

나는 송곳하나 꽂을 땅이 없었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 때조차 부모를 원망

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

(漢族)천하를 회복한 명나라의 태조황제가 되었다.

 

-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

 

 

6. 나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 때 황제가 되었고 13살 때 결혼을 했으며

14살 때부터 스스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의

삼번난(三藩亂)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 채 군주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

 

 

7. 돈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도 못 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마루를 닦으며 잔 신부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다시 빈털이 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 푼도 가진 게 없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 주는 인재를

대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욱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 청대 말 거상 호설암(胡雪巖) -

 

 

8. 만년 2인자라고 보스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 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

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 초기 탑 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 옆에

꿇어 앉아야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 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

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 속에서도

美日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 놓인

국가경제 재건, 등소평을 재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 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 주은래(周恩來) -

 

 

9. 잘 나가다 넘어지고 재기했다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문화대혁명 때 반모주자파로 몰려 홍위병으로

부터 공개비판을 당했고, 잠시 일어났지만 다시

쫓겨나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4년간을 육체노동자로

버텨야했다.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로

재기했다가 4인방의 농간에 또 다시 실각하고

가택연금까지 당해야했지만 모택동 사후 정국수습용

으로 재기용된 후 화국봉과의 5년 권력투쟁 끝에

최고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난 역전의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

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처럼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가 되었다.

 

- 등소평 -

 

(회사 조훈 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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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웃음을 아는 회사

좋은글 2009. 11. 4. 14:29

"음료나 커피는 4달러, 와인은 3달러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밖으로 뛰어
내리시기 비랍니다.


출구는 앞쪽에 2개, 날개 쪽에 2개, 뒤쪽에 2개가

있습니다. 천장 위의 전등이 디스코장의 불빛처럼

여러분을 출구까지 안내 할 것입니다."


"비행 중 담배를 피우고 싶은 분도 비상구를 열고 나가

지상이 훤히 보이는 날개 위에서 피워 주시길 바랍니다."


어느 개그방송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 상황입니다.

승무원이 승객들에게 비상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요한

시간인데 모두들 깔깔 거리느라 정신을 못 차립니다.


펀경영으로 유명한 '사우스웨스트 항공' 기내에서는

이렇게 모든 일이 웃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미국 내 초저가 항공사라는

이름을 걸고 출발 했다고 합니다.


티켓가격을 낮추기 위해 비싼 기내식과 고급

서비스를 없애고 물과 탄산음료만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객이 어쩔 수 없이 싸구려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렴한 요금과 더불어 '재미있고 친절한 서비스'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객들이 비행기를 탈

때부터 비행을 마치고 공항을 나갈 때까지 사우스

웨스트 항공의 웃음 서비스는 계속된다고 합니다.


승무원들은 칵테일을 주문한 중년의 승객에게 너무

어려 보인다며 신분증을 보자고 하는가 하면 땅콩을

주문한 승객에게 오히려 맥주는 휴대하셨냐고 묻기도

한다고 합니다.


할로윈 데이에 승객은 가방을 싣는 머리 위 짐칸을

조심해서 열어야 한다고 합니다. 분장을 한 승무원이

누워 있다가 소리를 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항공사 비행기에는 다 있는 모니터가 없는데도

승객들은 불평 한마디 없는데 영화보다 기내 웃음

서비스가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항 검색대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승객들은

불만을 토로하게 되지만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이용

하는 승객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연착 되거나 공항 사정으로 출발이 지연

되면 탑승구 앞에서 '게이트 게임'을 진행하여 상품을  

주는 등, 불만이 쌓일 여유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승객들에게 웃음 서비스를 전하는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지난 18년 동안 고객 불만이 가장 적은

회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형 항공사가 선호하지 않는 중소 도시를

잇는 노선을 계속 개발하며 저렴한 가격에 유머

넘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내 재미있는 직장 1순위 사우스 웨스트는

매출 면에서는 1위가 아니지만 그 가치 면에서는

독보적인 1위를 고수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2년에는 주식의 시가 총액이 다른 항공사들의

시가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았다고 합니다.


9.11테러 이후 항공사 대부분이 감원 할 때 사우스

웨스트항공은 조종사를 추가로 고용할 정도로 테러

이후에도 그 가치를 발휘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창업 후 30년간 한 명도 정리 해고 한 적이

없는 등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는 타사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운명을 바꿔주는 신발상(新發想)~

우스갯소리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매사에 머리를 잘 쓰며 살라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머리를 잘 쓰면 팔자가 바뀐다는 얘기죠.

발상 하나로 세계적인 갑부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클립(clip)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철사를 주고 서류를 묶는 클립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누구든지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은 특허권을

얻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소 떠오르는 발상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무언가로 묶어 낼 수 있는 가에 대해서 늘상 관심을

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회를 잘 만들면 그 발상이 나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 테니까요.

 

 

포스트 잍 또한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쩜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포스트 잍을 상징하는 '붙였다 떼었다'

하는 접착제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3M사의 경영진은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어쩌다 이런 게 다 나왔을까."

새로운 접착제를 연구하던 3M은 오랜 실험 끝에

'접착성 중화제'를 대량으로 개발하는 데는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제품이 접착제 특유의 밀착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버릴 수도, 판매할 수도 없어 고민하던 3M은 그대로

5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 후 1974년 , 3M에 근무하던 '아서 프라이'는

"완전하게 붙지 않는다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접착제라면.......,

그래, 아예 붙였다 떼었다를 할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들면 되지!" 라는 역발상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 밑받침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도중, 그는 성가 책에 꽃아

두었던 메모들이 바닥에 쏟아지는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것들을 주우면서 그는 '잠깐만이라도 쉽게 붙어

있는 메모지가 있었으면...' 이라는 우연한 생각을

했고, 그것이 결국 포스트 잍의 탄생을 만들었습니다.

 

자칫 '쓰레기'가 될 뻔 했던 접착제를 작은 생각의

전환 하나로 한 기업의 '효자 브랜드'로 탈바꿈 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발상은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머리를 어떻게 쓰며 사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쁜 머리를 마구 돌리는 경우에는 머릿털이

다 빠진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농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리 될 줄 알았어)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영국 더블린에서 출생한 유명한 독설가며 극작가인

버나드 쇼(1856. 7. 26 ∼ 1950. 11. 2)가

시골집에서 숨을 거두기 전 스스로 남긴 묘비명의

내용입니다.

 

무슨 말씀(뜻)인가 금방 아셨죠~

죽을 때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하고 싶은 일을

오늘 당장 시작하라는 얘기라고 저는 느낍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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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1998년 5월 멕시코시티~

프로 레슬링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한 늙은

레슬러의 은퇴식을 지켜보면서 깊은 감동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1975년 프로 레슬링에 입문해 항상 황금색 가면을 쓰고

경기를 해 온 그는 '마법사의 폭풍'으로 불렸습니다.

화려한 분장뿐 아니라 그의 현란한 개인기는 많은

관중을 열광시켰으며, '마법사의 폭풍'은 위기의

순간마다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상대 선수를 제압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3년 동안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

'마법사의 폭풍'은 어느새 53세의 중년이 되어 끝까지

자신을 아껴 준 팬들을 위해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법사의 폭풍'이 링 위에 오르자 관중은 모두 기립

박수로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관중의 갈채를 한 몸에 받으며 링 중앙에 섰습니다.

관중의 박수가 잦아들 즈음 '마법사의 폭풍'은 천천히

황금가면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관중들은 그가 준비한 선물에 놀라 모두 숨을 죽였습니다.

황금가면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팬들에게 처음 드러내는

그 또한 감격에 차 있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시골의 작은 가톨릭 교회의

'세르지오 구티에레스'라는 이름의 신부입니다.

프로 레슬링을 하는 동안 저는 고아원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울 수 있었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서 행복

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관중의 정적이 이어지더니 더욱

뜨거운 기립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세르지오' 신부는 23년 동안 '신부'라는 신분을 감춘 채

프로 레슬링을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3천여 명의 고아들을

돌봐 온 것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예전에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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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는 우리가 알기로는 양사언의 모든 일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 조의 詩(시)로
알고 있었는데...

그 깊은 내력을 살펴보니 처절하게 살다간 어머니를 그리는

시라는 해석이 kbs역사이야기를 통해 재해석 되었습니다.


'楊士彦(양사언)과 그의 어머니...'

우리 선조들로부터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恩功(은공)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恩功(은공)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탄생 되어 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익히 알고 있는 栗谷(율곡)과 신사임당이

그러하고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두 분 다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들 이십니다.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양사언의 출생과 그의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자, 그럼 갑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민'이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게 됐는데 전날 축하연으로 술에 절어

아침도 거른 체 부임길에 오르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임길에 올라 한참을 가던 '양민'이 익산의

'함열'이라는 고을을 지나갈 즈음 배가 무척 고파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때는 꽃 피는 삼월~

그러나 한창 농번기라 농촌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 집 저 집 둘러보는 중에 어느 집에서 한 소녀가

나와 공손하게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룁니다.

그러면서 사또가 길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는 없다며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부지런히 진지를 지어 올립니다.


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가

바른지 사또(양민)는 참으로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조반을 잘 얻어먹은 젊은 사또 '양 민'은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소매 안에 가지고 다니던 부채 靑扇(청성)과

紅扇(홍선) 두 자루를 꺼내 그 소녀에게 주면서

농담을 섞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그런데 ‘채단’이라 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깜짝 놀란 소녀가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靑扇(청선),

紅扇(홍선)을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어리둥절한 양민이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그 소녀도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 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 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을 흘렀습니다.

사또 '양민'이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관아로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사또에게 안내된 그 노인이 물었습니다.


"몇 년 전 부임할 때 한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한 후 어느 소녀에게 부채 靑扇(청선)과

紅扇(홍선) 두 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으십니까?"


이에 사또 ‘양민’이 조금 생각하더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고 말하며 아직도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노인이 이제 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을 잇습니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해서 자세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또(양민)가 말합니다.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이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겠소이다."


식사 한 끼 얻어먹고 그 대가로 부채 두 자루를

선물했으면 밥값으로 충분할 텐데, 졸지에 아내로

까지 맞게 나섰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라고 하며 이 소녀가 바로 후에 양사언

(楊士彦)의 어머니가 됩니다.


자~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니

긴 글이지만 드라마 보듯 끝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또(양민)에게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이 된 이 소녀와의 사이에

士彦(사언)과 사기, 두 아들이 탄생합니다.


사준, 사언, 사기~ 이 삼형제는 자라며 매우 총명

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풍체도 좋아 주변의 칭송이

늘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도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실부인이 죽자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어머니가 도맡아 하면서 세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하지만 '사준'을 빼고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랴... 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실부인의 한과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습니다.


남편 '양민'이 죽고 장례 날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소실부인이 눈물 흘리며 말합니다.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재주 있고 총명하며 풍체도 좋거늘 첩이 낳았다하여

나라 풍습은 아들들에게 서자의 너울을 씌어 놓고
벗겨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합니다.


"첩이 또한 이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
이리되면 그때 가서도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입니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오리까마는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를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단검을 꺼내 자결을 하고 맙니다.
아들들이 그녀를
부둥켜안았을 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양사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씌워진 서자의 멍에를 벗겨주어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어했던 여인이며

죽음으로써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어 했던 선구자적인 新女性(신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이 어머니의 죽음이 楊士彦(양사언)으로

하여금 더욱 훌륭한 文人(문인)이 되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楊士彦은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후에

장원급제하여 높은 관직에도 오르고 조선의 3대 문인으로
칭송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양사언'도 '양사언'이지만 아버지 '양민'도 백성을
차별하지 않는 훌륭한 목민관이었음을
느끼게 하며
어머니 또한 차별의 시대를 지혜와
용기로 뚫어간
선구적 신여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만드는 차별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죽음도 불사하는 어머니의 끝없는
자식사랑 앞에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고요.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아침에 이글을
읽으니 숙연해지고 지금 내가 이러한 위치에 있게 되고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어머님의 은혜임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에 어미없는 자식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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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조선 영조 때 호조 서리를 지낸 김수팽은

'전설의 아전'이었습니다.

청렴하고 강직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는 가록들이

있습니다.

 

호조판서가 바둑을 두느라고 공문서 결재를 미루자

김수팽이 대청에 올라가 판서의 바둑판을 확 쓸어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마당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졌으나 결재부터 해달라" 하니 판서도 죄를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수팽이 숙직하던 밤, 대전 내관이 왕명이라며

10만금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끌다가 날이 밝고서야 돈을

내주었습니다.

야간에는 호조의 돈을 출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관이 사형에 처할 일이라고 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김수팽을 기특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수광, 『조선의 방외지사』).

 

김수팽의 동생 역시 아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아우의 집에 들렀는데 마당 여기

저기에 염료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내가 염색업을 부업으로 한다"는 동생의 말에

김수팽은 염료통을 모두 엎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나라의 녹을 받고 있는데 부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먹고살라는 것이냐?"

 

김수팽의 일갈에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청빈한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를 불문율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 관료들이 지키려 했던

'사불삼거(四不三拒)'란 무엇일까요.

 

사불(四不)은~

재임 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四不)로

▶ 부업을 하지 않고

▶ 땅을 사지 않고

▶ 집을 늘리지 않고

▶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풍기 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스스로 사표를 냈다는 기록이 있고~

대제학 김유는 지붕 처마 몇 치도 못 늘리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거(三拒)는~

공무 중에 반드시 거절해야 할 세 가지를 이르는데

▶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 경조사의 과도한 부조를 말한다고 합니다.

 

청송 부사 정붕은 영의정이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다'고 답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우의정 김수항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명

한 필을 보낸 지방관을 벌주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 2』)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청빈한 공무 자세에서

청백리가 나왔고 그 정신문화에서 우리 후손들은

자랑과 긍지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지금 우리

공직사회에는 과연 사불삼거의 전통이 남아

있기나 한 것인지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오히려 사불은 사라지고 '사필(四必)'이 자리하여

그 사필과 함께 하지 못한 관료는 팔불출이라도

된 듯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럼 '사필(四必)'이 뭐냐고요? 뭐긴 뭐겠어요.

▶ 위장전입

▶ 세금탈루

▶ 병역면제(기피)

▶ 논문표절의 네 가지를 말함인데 이 네 가지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면 마치 고위 공직의 후보자가
되기 어려운 것인 것처럼 거론되는 대상
마다 이
사필에서 자유로운 관료가 별로 없더란
얘기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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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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