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10訓

좋은글 2009. 10. 1. 10:21

1,일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성공의 대가 입니다.

 

2,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3,운동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끊임없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4,독서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5,친절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6,꿈을 꾸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대망을 품는 것입니다.

 

7,사랑하고 사랑받는데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권입니다.

 

8,주위를 살펴보는데 시간을 내십시오.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너무 짧은 하루입니다.

 

9,웃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입니다.

 

10,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그것은 인생의 영원한 투자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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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인과경(因果經)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지은 업보는 자기가 받고

자신이 뿌린 씨앗은 자신이 거둔다."

 

이 말은 곧 좋은 인연을 지으면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업을 지으면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의

철칙을 두고 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 (烏飛梨落)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천태지자 대사의 해원석결(解寃釋結)

이란 유명한 법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중국 양무제 때 선지식으로 이름을 날리고 법력이

높았던 지자대사가 어느 날 지관 삼매에 들어

계셨는데 이때 산돼지 한 마리가 몸에 화살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며 지나간 후 곧 이어 사냥꾼이

뒤를 쫓아와 하는 말이~

"산돼지 한마리가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묻었다고 합니다.

 

이때 대사가 그를 보고~

"엽사여! 그 활을 던져 버리시오"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을 주셨다고 합니다.

 

오비이락파사두 (烏飛梨落破蛇頭)

사변저위석전치 (蛇變猪爲石轉雉)

치작엽인욕사저 (雉作獵人欲射猪)

도순위설해원결 (導順爲說解怨結)

 

무슨 말씀인가하면...

三生 前에 까마귀가 배나무에서 배를 쪼아 먹고

무심코 날아가자 나무가 흔들리는 바람에 배가

떨어져 그 아래서 빛을 쪼이고 있던 뱀이 머리를

맞아 죽고 말았다.

 

이렇게 죽게 된 뱀은 돼지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뱀을 죽게 한 까마귀는 생을 마치고

꿩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숲속에서 알을 품고

있었다.

 

이때 돼지가 칡뿌리를 캐먹다가 돌을 굴려서

꿩이 맞아 죽었다.

 

이렇게 죽음을 당한 꿩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사냥꾼이 되어 그 산돼지를 활로 쏘아 죽이려는

순간 지자대사가~

 

이들의 지난 삼생 사(三生 事)를 내다보시고

더 큰 원결과 악연으로 번져가지 못하도록

사냥꾼에게 이 같은 해원(解怨)의 법문을 설파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지자대사로부터 삼생 사에 얽힌 이러한 법문을

듣게 된 사냥꾼은 크게 뉘우치며 그 자리에서

활을 꺾어 던져버리면서~

 

"대사님!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지자대사의 이 오비이락의 법문을 보면 고의가

아닌 무심한 실수에서 비롯된 일들이라도 점차

악연으로 번져 끝까지 따라 다니면서 서로 죽고

또 죽임을 거듭하는 무서운 악연과 원한관계를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세인과경(三世因果經)에는~

"중생들이 어리석음으로 인해 악업을 짓고 한량

없는 과보를 받으니 그 고통을 어찌 다 감내하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전생에 지은 복은 금생에 받고 금생에 지은 복은

후손이 받고 내가 받는다."는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또~

"미래와 내생이 죽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손이 나의 미래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이 곧 내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생명일지라도 사랑하고 좋은

인연을 지으면서 선업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교훈이라고 합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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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드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시대 화가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비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처지의 친구와 만나 의논을 했는데

그 친구가 이렇게 제의를 해 왔습니다.

 

"뒤러야!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라.

나는 네가 졸업할 때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며

너의 뒷바라지를 하겠다.

네가 졸업한 후에 다시 나의 뒷바라지를 하면

되지 않겠니?"

 

친구는 뒤러를 위해 열심히 일해 꼬박꼬박 학비를

보내주었습니다.

뒤러가 졸업할 무렵에는 그의 그림도 하나씩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뒤러가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 식당에

갔을 때 친구는 마침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여! 저의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 이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나이다. 제가 할 몫의 능력을

친구 뒤러에게 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친구가

진실 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가 기도하는 손을 본 순간

뒤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뒤러는 곧 바로 붓을 들고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는데 . . .

이것이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라는

작품으로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rer1471-1528)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

독일이 EU에 가입하기 전 독일화폐에 그려져

있었던 독일이 자랑하는 화가입니다.

 

 

- 뒤러의 기도하는 손-

 

사람의 손이 하는 일 중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일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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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아야꼬'

좋은글 2009. 9. 15. 15:34

그녀는 결혼 한지 2년 뒤 집을 지어 잡화점을 내겠다고 생각하고 가게가 딸린 구조로 집을 짓게 됩니다.  물론, 남편의 수입은 있었으나 작은 구멍가게를 열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그녀는 찾아오는 모든 고객에게 매우 정직하고 친절하였으므로 멀리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고 장사가 매우 잘 되었습니다. 볼품없이 협소한 작은 구멍가게였지만 트럭으로 물건을 구입할 정도로 호황을 누립니다.

 

나의 행복이 남에게 불행이 될 때도 있듯 근처의 다른 가게는 그녀의 가게로 인해 매상이 줄어들어 가게 문을 닫게 될 지경에 이릅니다. 이에 그녀는 근처 가게의 폐업을 염려하며 취급물건의 양과 종류를 줄이고 물건을 찾는 손님이 오면 "우리 집에는 없는 물건이나 건너편 가게에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니 그리로 가시라"고 친절히 안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고운 심성 때문에 점점 그녀의 수입은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님이 줄고 벌이도 적어졌지만 그 대신 그녀는 시간적인 여유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소에 독서를 즐기던 그녀는 시간이 여유롭게 되자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을 탈고하여 이 세상에 내어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기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탐욕과 과욕으로 점철되어 있는 세상, 그리고 사기와 배신 등이 판을 치며 갈수록 염치가 사라져 가는 세상인심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려했던 그녀의 진솔했던 삶.

그녀는 이러한 나눔과 배려의 삶을 실천하면서 그 유명한 소설 빙점을 출산하였던 것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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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임금과 왕비

좋은글 2009. 9. 15. 15:28

고대 중국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요임금이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만백성이 길가에 부복하여 왕의 행렬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고 왕에게 무한한 존경과 복종의 뜻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길가 뽕밭에서 뽕을 따는 처녀가 부복은 고사하고 한 번도 돌아보지도 않고 열심히 뽕만 따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왕의 권위 따윈 알 바 없다는,  당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종의 배반행위였습니다.

 

“어가를 멈춰라”

왕명에 따라  천지를 흔들던 악대도 음악을 중단하고 화려한 행렬이 제자리에 섰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어떤 놈이라고 생각하는가?”

친위대장이~

“예~ 촌구석에서 뽕이나 따는 무식한 처녀인 것 같사옵니다.

소신이 가서 확인을 하고 오겠습니다..”

 

왕의 눈에는, 처녀의 뒤태가 너무나 아름다워 거의 환상적으로 보였습니다. 선녀가 아니고선 어떻게 저리도 곱고 매혹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내 좀 걷고 싶던 차에 잘 됐다.”

왕이 직접 뽕따는 처녀에게로 위풍당당하게 걸어갔습니다.

 

가까이 왕이 왔는데도 처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뽕만 따고 있었습니다. 왕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너는 나의 백성이 아니란 말이냐? 왕이 너를 찾아왔다.”

 

그때서야 이 처녀는, 몸을 돌려 정중히 목례를 했습니다. 그 순간 왕은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아무리 권문세가의 영애라도 왕이 손만 잡으면 왕의 것인데, 이 여인은  통 그러고 싶질 않았습니다. 처녀의 얼굴에, 보기에도 민망한 혹이 달려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슬그머니 객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 만 백성이 짐을 우러러 경의를 표하고, 땅에 부복하여 순종의 뜻을 보이거늘, 너는 어쩐 연고로 부복은 고사하고, 아예 오불관언(吾不關焉) 한단 말이냐?”

 

그러자 이 뽕녀의 입에서 참으로 아름답고 당당한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 끝까지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습니다. 어지신 왕에겐 동서남북의 어느 백성이고 심복치 않은 자가 없습니다. 만백성의 어버이에게 부복하는 일만이 경의가 아니고 부모의 뜻에 따라 소임에 충실함이 더 충성스러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普天之下莫非王土莫非王臣, 東西南北無思不服)

 

“부모가 뭣이 그리 대단해?”

“은혜가 무한하여, 자손은 영구히 받들어야 하고 효는 만행의 근본이며 모든 선행 중에서 으뜸인데 군왕이 마땅히 그 모범을 보이셔야 하거늘 어찌 이를 탓하려 하시옵니까?(孝卽萬行之本,惠我無疆子孫保之, 百善爲孝先)

 

왕은 감탄하여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요것 봐라. 날 가르치고 있다. 햐! 고것 참 기이하구나! ㅎㅎ~"

왕은 첫 번째 질문에서 크게 감탄하여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넌 헌데, 얼굴에 혹이 달려 창피하지 않으냐?”

 

"신체발부는 하늘이 부모님을 통해 주신 은사이오며 하늘의 뜻은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것이 온데 어버이신 왕께서 어쩐 연고로 소녀의 생김새를 조롱하시옵니까? 인간의 도로써 인간을 다스려야 하고.(以人治人) 외양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존중해야 하는 줄 아옵니다.”

 

왕은 더욱 놀라, 신하 중에 이런 어질고 현명한 신하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그래서, 내친 김에 엉뚱한 질문 한 개를 더 해보았습니다.

“너를 내 왕비로 삼고 싶다. 날 따라가겠느냐?”

 

그러나 뽕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학문보다는 예를 먼저 가르치셔야 하고 재리 보다는 도리를 먼저 가르치시는 것이 군왕의 도라고 생각하옵니다. 대왕께서 그럴 뜻이 있으시면, 나라의 질서를 지키고 예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당연히 먼저 양친의 동의를 구한 다음 혼서를 보내시고 예법이 정한 바에 따라 가장 모범이 되는 절차를 준행함이 마땅한 줄 아는데 어이하여 소녀를 노상납치하려 하시옵니까?”

 

이에 왕은 크게 감탄했습니다. 실로 말씨름에서, 왕이 패한 기분이 들 정도라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누가 감히 왕인 나에게 저렇게 의롭고

유식한 도리를 당당하게 말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인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여인에게 빠져듦이 마치 때 맞춰 내리는 단비처럼 매 마른 대지를 적심 같도다. (心入人也如時雨之潤)"

 

이 노변의 삼문(三問)이야 말로 요임금이 한, 민정시찰의 가장 큰 성과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왕은 예법에 따라 청혼을 하고 혼서를 보냈습니다.

 

만 백성이 우러러 경축하는 결혼 일에 왕비의 가마가 왕궁에 도달하던 날, 수많은 신하들과 궁녀들이 흥분하며 비가 얼마나 대단한 미인일까 궁금증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마 문이 열리자 왕비를 첨 본 궁녀들의 입가에 '하이고야~' 조소의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그 조소의 미소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에서 내린 왕비는 무수한 시종들 앞에서 팔을 둥둥 걷어 올리고는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 모습에 궁녀들이 더욱 비웃으며 말렸습니다. 하지만 새 왕비는~

“난 왕의 아내다. 내 손으로 진지를 해드리는 게 도리이다.

저리 비켜라.”


그래 왕의 수라상을 준비한 다음에 사치스러운
 궁녀들의 복장과

경박한 행동을 지적하여 호령했습니다.

“오늘부턴 백성들보다 사치하는 자는 그냥 두지 않겠다. 농어촌의 선량한 부인들보다 잘 먹거나 더 게으른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들의 어버이신 왕을 섬기는 자들이 백성들보다 예와 도리가 모자라면 어떻게 왕께서 바른 정치를 하실 수 있단 말이냐?”

왕비의 엄숙하고 단호한 질책을 받은 궁녀들의 비웃던 입이, 모조리 놀란 조개의 입처럼 굳게 다물어졌습니다.

그날부터, 나라의 질서와 도덕이 하루가 다르게 바로 서고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궁중이 달라지고 대신들이 달라졌습니다. 공직자가 달라지니 백성도 금새 달라져 나라엔 도둑이 없어지고 세상인심이 어딜 가나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여인이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창조하는 불가사의의 기적을 낳았습니다.

 

왕으로부터 촌부까지 백성은 하나같이 바른 사고와 예의를 지켜, 온 천지가 높은 수준의 도덕사회를 이루었습니다. 먼 훗날 왕비가 돌아가시자 온 나라의 백성들과 왕은 크게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호호백발의 노인들까지 높은 신하에서부터 저 눈먼 땅의 무지한 노동자까지 모든 백성이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왕비의 은덕을 높이 기리고 사모하는 백성들 중엔 그 서거 소식에 너무 충격을 받아 쓸어 지거나 식음을 폐하고 애도하는 자가 부지기 수였다고 합니다.

(회사의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남자를 바꾸는 부인의 내조의 힘과 사람을 평가거나 인재를 구할 때 외모보다는 내면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으로 옮긴 요임금의 훌륭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좋은 글을 받아 제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조훈부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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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망향초 이야기

좋은글 2009. 9. 14. 14:26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를 무찌르고 통일을 성취했습니다. 그런데 우쭐해진 유방은 이판에 북방의 흉노까지 정복하려고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극구 말렸지만, 이제는 전쟁에 자신이 생긴 유방은 충언을 무시하고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흉노의 게릴라에게 기습을 당하여 대패하고 [백등]이라는 조그마한 성으로 도피해 들어갔습니다. 오랜 포위 상황에서 식량과 물이 떨어지고 큰 위기에 처하였는데, [진평]이라는 모사의 계략이

성공하여 양군이 휴전회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담에서 앞으로 중국은 흉노에게 매년 식량과 옷감을 보내고, 또 왕의 딸 공주를 선우(흉노의 추장)에게 출가(出嫁)시키기로 합의하고 겨우 목숨을 구하여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속대로 공주를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진짜 공주를 호지(胡地)에 보내기는 아깝고 해서 음모를 꾸몄습니다. 즉 궁녀 하나를 뽑아서 호적을 고쳐 공주로 바꿔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보낼 궁녀 선택이 문제였습니다. 왕이 모든 궁녀를 다 만나볼 수는 없는 것이고 해서 궁중 화가에게 모든 궁녀의 초상화를 그려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궁녀들이 야단났습니다. 화가가 잘 그려주면 임금의 눈에 뜨일 것이요, 잘 못 그리면 그들이 [오랑캐]라고 천대하는 흉노로 시집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궁녀들은 허겁지겁 연줄을 찾아 뇌물을 마련해서 궁중화가에게 상납하였습니다.


궁녀 중에 이름은 왕장(王嬙)이요 호가 소군
(昭君)인 그 유명한 [왕소군] 있었습니다. 그녀는 빼어난 미녀였고, 시와 춤에도

능했습니다. 그런 그녀는 화가에게 뇌물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화가가 몇 번이나 눈치를 주어도 모른

체 하며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어쭈구리~ 요것 봐라...' 오기가 발동한 화가는 그녀를 그릴 때 얼굴에 엉뚱한 사마귀를 하나 찍어 넣었습니다.

 

드디어 왕이 하나하나 점검을 시작했고, 점박이 미녀를 발견하자 “에라 이 여자로 하자.”며 그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형식상 왕의 딸로 호적이 고쳐지고 얼마 후 흉노의 선우 [호한야]가 중국의 궁전을 방문했을 때 왕소군은 형식상의 부친인 임금에게 고별의 인사를 드리고 선우를 따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녀를 본 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저런 미녀를...!”

아~ 말은 할 수 없고 속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린 화가는 때려 죽였습니다.)

 

흉노의 선우는 그냥 웬만하면 고맙다고 영접하려 했는데 아니 중국 왕이 너무나 고맙기도 하지...  "세상에나 저렇게 선녀 같은 여인을 주다니..." 너무 기뻐 입이 귀에 걸린 선우는 백배 인사를 하고 그녀를 흉노로 데려가서 제2왕후로 삼고 극진히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왕소군은 오직 고향만 그리워 하다가 일찍이 마음의 병을 얻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남편인 선우에게 부탁

하였습니다.

"제가 죽으면 남쪽나라에 가장 가까운 접경지에 묻어주세요."

선우는 그녀의 유언대로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애 그 무덤에서 꽃이 하나 피어났는데 고개를 남쪽으로 향해 숙이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 애절한 사연이 얽힌 그 꽃을 [망향초]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당(唐)의 시인 [이태백]이 왕소군의 애절한 전설을 기억하며 시를 지었으니...

 

王昭君 (李白)

 

胡地無花草(호지에 무화초하니)

春來不似春(춘래 불사춘이로고)

自然衣帶緩(자연 의대완하니)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이로다.)

 

왕소군(이백)

 

오랑캐의 땅에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내 몸의 허리띠가 느슨하지만

몸매를 위해 멋 낸 것이 아니로다. 

(회사의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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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카네기 이야기

좋은글 2009. 9. 9. 14:05

세계 제일의 경영자이자 엄청난 부호로 이름을 날린 철강 왕 카네기의 일화입니다.

 

카네기의 사무실 한 쪽 화장실 벽에는 어울리지 않게 볼품없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 솜씨가 뛰어난 작품도 아니며 그냥 그림에는 한 척의 나룻배에 노 하나가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카네기는 이 그림을 보물처럼 아꼈다고 합니다.

 

카네기가 춥고 배고팠던 청년시절에 이 그림과 맺었던 특별한 인연 때문이라고 하는데~ 특히 그림 속, 나룻배 밑에 화가가 적어 놓은

글귀에서 꿈과 희망을 키웠다고 합니다.

 

"밀물은 반드시 밀려오리라. 그 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카네기는 이 글귀를 읽으며 '밀물'이 밀려올 그 날을 기다리며 인내의 시간으로 자신을 단련해 왔다고 합니다.

 

비록 춥고 배고픈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그 글귀는 카네기가 시련을 극복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적인 부호가 된 카네기는 자신에게 용기를 심어 준 그 나룻배 그림을 화장실 벽에 걸어 놓고 늘 방심하기 쉬운

자신을 향해 자계(自戒)하는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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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1

조선 선조시대 때~
'홍순언'이라는 중국어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 혼순언이 북경에 가는 길에 통주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홍순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호방한 사나이였는데 고향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어 객고가 심했습니다. 초저녁에 한잔하고 하룻밤을 즐기고자 청루에 들어가서 여자를 불렀습니다.


들어온 여자가 16세로 어린 나이였으나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좋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범해서는 안 될 듯 했습니다.


까닭을 물어보니 자기는 남쪽 지방인 절강 사람인데 부모가 모두 염병에 걸려 죽었다며 눈물 흘리며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야 되는데 장사 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기위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홍순언은 공금에서 거금 300금을 내어 손목도 한번 안 잡아보고 청루에서 그녀를 풀어 주었습니다. 여자가 이름만이라도 꼭 가르쳐 달라고 애원해서 그냥 조선에서 들어온 홍역관이라고만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공금에서 거금을 유용해 버리고 나니 다른 역관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귀국해서 홍순언은 이 일(공금횡령) 혐의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살이를 하는 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임금의 宗系가

착오됨을 해명함)라는 명나라와 200년 가까이 끌어온 국제문제가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의 네 왕을 죽이고 구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정통성이 없는 변방의 소국이라고 명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되어 있어 조선에서는 여간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이인임은 고려 말의 역적으로 이성계에게 처형당한 인물인데 이성계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으니 가당치도 않은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명나라는 이런 잘못된 기록을 이런 저런 핑계로 여간해서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왜곡된 역사의 기록을 고치기는 어려운 일인 모양입니다.


태조에서 선조 간 12대에 걸쳐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간이나 끌어 오면서도 명은 묵묵부답으로 이를 고치지 않았습니다.(지금 같으면 까짓 신경 끄면 그만일 텐데.. 말이죠)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중 선조 때 명에서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을 다시 편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 조정은 이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번에도 명의 허락을 받아 오지 못한다면 이것은 '통역의 죄'라며 수석 역관의 목을 베야한다고 들고 났습니다. 이에 선조가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 수석 역관의 목을 베겠다고 공언을 해버립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중국어 역관들이 상의에 나섰습니다.

"홍순언은 어차피 살아서 감옥 밖으로 나오기 어려우니 우리가 빚진 공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북경으로 보내자."

역관들이 이렇게 합의 하여 여러 해 동안 감옥에 있던 홍순언의 공금을 갚아주고 그를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중국어 역관들을 대표해서 죽어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순언으로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명나라 길에 오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담당관들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최선을 다 할 결심이었습니다. 선조 17년(1584년) 정사 황정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겪은 후였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북경의 입구인 조양문 밖에 도착하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 기병이 말을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역관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을 한 필 내놓으며 홍순언을 장막으로 정중히 모시고 갔습니다. 조금 후에 여자종 10여명을 거느리고 점잖은 부부가 와서 큰절을 올립니다.


홍순언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그 귀부인은 꿇어 앉아,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은혜를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옆의 남편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장인어른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푸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장인어른께서는 참으로 천하의 대인이십니다."


아~ 그때서야 홍순언은 몇 년 전 통주 청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 뒤 그 여인은 청루에서 나와 부모의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인의 부모도 벼슬하던 집안이라 친척의 주선으로 석성(石星)이라는 사람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점점 출세하여 예부상서(예의, 제향, 조회, 교빙, 과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장관)가

되었습니다. 석성은 조선에서 사신이 오기만 하면 홍역관이 있는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홍순언은 상좌에 앉아 보은연이 열리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명나라의 거물들이 다 모였습니다. 술자리가 어울려갈 때 석성이 홍순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장인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홍순언은 좋은 기회다 싶어 완곡하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석성은 웃으며 그것은 자기 소관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고 자기 집에서 푹 쉬다 가시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부인도 이날을 위해 손수 짰다는 비단 100필과 후한 선물을 압록강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그 비단 끝에는 '報恩'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보은단(報恩緞 비단:단)이라고 했습니다.


홍순언이 귀국하자 사람들이 비단을 사러 그의 집에 모여드니 그가 살던 동네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현재의 강남구 청담동 롯데호텔 일대입니다.)


여하튼 소식을 접한 임금이 몸소 모화관까지 나아가 사신 일행을 마중하고 이 성과를 종묘에 나가 조상에게 고한 뒤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습니다.


홍순언은 정철, 이산해, 기대승, 유성룡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거목들과 같이 나라를 빛낸 광국공신에 포함되어 당릉군(정2품)에 봉해지고 자손대대로 양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조선시대 역관이란 양반 축에 들지 못하고 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역관이 임금으로부터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국은 거의 왜놈들 수중에 들어가 국운이 위태로운데 임란 초기부터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지만 장꽤넘들은 시간만 끌고 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 하는 사신을 보냅니다. 정사 정곤수이 명나라 조정으로 가서 울며 통 사정을 할 때 막후에서 홍순언이 활약합니다.


그때 석성은 병부상서(국방부장관)가 되어 있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압록강만 지키면 된다고 조선의 원군 요청에 모두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만은 조선이 정복되면 요동까지 쳐들어 올 염려가 있으니 원조해야 된다고 황제를 설득해서 원군을 보내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명은 막대한 군비조달로 국운이 쇠하자 황제 신종은 그 책임을 물어 석성을 투옥시킵니다. 그렇게 석성은 부인의 보은을 다하다가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석성은 유언으로 부인과 아들을 조선으로 망명하도록 하여 해주에 정착하게 됩니다. 조선에서는 해주 수양산 아래의 땅을 하사하고 아들 담을 수양군으로 봉했습니다. 이 아들 담이 해주 석씨의 시조이며 자손들은 고위관리를 역임하고 가문을 빛냈습니다.

집성촌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영서면 일원이라고 합니다.



# 2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장왕이 어느 날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촛불이 꺼져 암흑세계가 되었습니다.이 때 어느 신하가 왕의 애첩의 귀를 잡고 입을 맞추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애첩은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뗀 후

무례한 짓을 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에 장왕이~

"오늘밤, 이 자리에 갓끈을 떼지 않은 사람에겐 벌을 내리겠다."고 명한 후, 불을 켜게 하였습니다. 실수한 신하를 용서해 주기 위한 왕의 관용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초나라가 진 나라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적군을 물리치고 위기를 구한 이가 바로 옛날 장왕의 애첩을 희롱한 그 신하였습니다.


그는 장왕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동되어 어느 때고 그 은혜를 갚고자 따로 용병을 길러 전장으로 나가 싸워 위기에 처해 있던 장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보은은 이렇게 감동이고 기쁨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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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이판사판'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판(승)은 출가하여 부처님 말씀만 궁구하고 수행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스님을 일컫고, 사판(승)은 절에서 재물이나 일반 행정(산림)을 담당하는 스님들을 일컫는 말씀이라 합니다.

 

물론 이판승은 사판승이 해 주는 아침밥을 먹고 면벽참선으로 하루를 보내고, 사판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지으랴, 땔감 준비하랴, 산림(절의 재산)을 관리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이판승과 사판승"의 얘기를 화두로 삼아 시작해 보겠습니다.

 

옛날 어느 절에 일 년 내내 나무하랴, 밥하랴, 바쁘기만 하던 젊은 사판승 한분이 자기 일에 불만이 쌓여, 친구 스님과 함께 꾀를 냈다고 합니다.

 

"야,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왜 우리만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 거지? 저 이판승 놈들은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 매일 우리가 해주는 밥이나 쳐 먹고 면벽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

 

"우리는 대체 뭐냐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는 바에야, 우리가 지네들 종이야 뭐야! 우린 죽도록 고생만 하고 말이야!

에이! 더러워서 우리도 이판승이나 하자."

 

생각할수록 분한 마음에 사로잡힌 두 사판승은 의기가 투합하여 주지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판승의 이야기를 다 들은 주지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래~? 그러면 너희들도 내일부터 이판승 해라. 그 대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딴소리라뇨. 스님.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은 두 사판승은 이제 꿈에 그리던 이판승이 되었음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지방을 나섰습니다.

 

"야! 우리도 이젠 이 지긋지긋한 산림 관리의 일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방! 앗싸~!"

 

다음 날, 두 스님은 다른 사판승들의 부러움을 사며 면벽참선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신선놀음이라며 즐거워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자신들이 참선을 하는지 여자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 오만 생각에 빠져 즐겁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시원한 바람은 열어 놓은 창을 타고 장삼자락을 스쳐가고, 그야말로 꿈인지 생신지, 너무도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면벽참선도 어디 하루 이틀이지, 열흘이 가고 스무날이 가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니까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좀이 쑤시고 이제는 시간마저 자신들을 붙들고 가지를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이 되면 어서 빨리 저녁이 되기를 바라게 되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결리고... 아! 이젠 정말 지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별 생각 없이 밥 하고, 나무하고, 청소하고... 등등 몸으로 하던 일들을 한 순간에 접고 그냥 앉아서 면벽수행을 한답시고 빈둥대며 앉아 있으니 얼마나 큰 고역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이젠 정말 더 이상 참선방에 들어가는 것이 겁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산으로, 들로 다니며 뙤약볕을 쪼여도 좋으니 맘껏 돌아다니고 싶었습니다. 오히려 옛날 밥 짓고, 빨래 하고, 장작을 패고, 물 깃는 일이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아! 옛날이여!!

우리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우린 사판승 체질인가 봐~!

 

그래도 주지 스님한테 딴소리 안 하겠다고 단단히 약조를 해놓았던 참이어서, 속만 끓였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날도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풀 죽은 모습을 하며 천근만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참선방을 향했습니다.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얼떨결에 이판승이 된 친구가 더 고역이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친구를 한 대 패 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고, 이제 와서 친구를 탓해 봐야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벽을 쳐다보고 있자니 좀은 쑤시고, 잠은 오고...

아~, 그래도 잠을 자면 안 됩니다. 만약 잠을 자다가 돌아다니는 주지 스님에게 들키는 날이면 죽비로 두들겨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 한 대 잘 못 맞으면 머리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잘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정말... 고문도 이런 상 고문이 따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 친구가 자기를 꾄 친구

옆구리를 쿡쿡 찔렀습니다.

 

"야! 이거 우리 그만 하자. 이건 사는 게 아니라 차라리 죽음보다 못하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주지 스님과 굳은 약속을 했으니..."

 

"뭐! 그렇다고 설마 죽이시기야 하겠어?"

 

이렇게 결심한 두 스님은 그 날 끝장의 심정으로 주지 스님을 찾았고, 스님방을 물러나올 때는 이마에 커다란 혹을 두 개씩 달고 나왔습니다.

 

이마에 달린 혹 두 개로 그 지긋 지긋한 이판승 생활을 청산 할 수 있다는 데 두 스님은 아주 천만다행이라며 만족해 했습니다.
 
(회사 조훈 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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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한자에 '슬(蝨)'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보통 이 또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서캐를 말하지만

빈대와 벼룩을 이를 때도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요즘 20여 년 만에 '빈대'가 서울에 출현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니, 오늘 소개하는 우화의 주인공으로

'이'나 '서캐' 대신 '빈대'를 등장시켜 보겠습니다.

 

세 마리 '빈대'가 있습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에게서 피를 빨아 먹던

빈대 셋이 싸움을 벌입니다.

서로 여리고 살찐 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낯 선 빈대가 지나치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한 마디 합니다.

"너희들 뭘 가지고서 그렇게 다투느냐"고 묻습니다.

 

싸움에 열중이던 빈대 세 마리는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다보니 싸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 낯 선 빈대가 정색을 하며 다시 묻습니다.

"조만간에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계절이 닥치고

있음을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세 마리 빈대는 그 물음의 진의를 의아해 하며

이 낯선 빈대의 이어지는 발언을 경청합니다.

이에 그 빈대가 다시 말을 잇습니다.

 

"제사가 닥치면 살찐 돼지는 곧 장작에 구워질

것이다.

이럴 경우 너희들의 편안한 먹잇감은 제물로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살찐 돼지만 없어지겠느냐?

그 위에 더불어 기생하던 너희 빈대 또한 사람이

놓는 불에 함께 태워질 운명이 될 것이다.

 

돌연하면서도 상황의 정곡을 찌르는 이 빈대의 말에

세 마리 빈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광이라는 빈대의 충고대로 서로 다투지

않고 적당히 자리를 나누어 제 자리에서만 돼지의

피를 빨아 먹습니다.

 

따라서 빈대에게 피를 많이 빨려 수척해진 이 돼지는

제사의 희생물을 고르는 사람들의 눈을 비켜갈 수

있었으니 빈대 좋고 돼지 좋은 결과의 해피엔딩을

맞게 됩니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세 마리 빈대가 돼지를 먹다(三蝨食體-삼슬식체)'라는

내용의 우화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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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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