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조선 선조시대 때~ '홍순언'이라는 중국어 통역관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 혼순언이 북경에 가는 길에 통주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홍순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호방한 사나이였는데 고향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어 객고가 심했습니다. 초저녁에 한잔하고 하룻밤을 즐기고자 청루에 들어가서 여자를 불렀습니다.
들어온 여자가 16세로 어린 나이였으나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수심이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좋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범해서는 안 될 듯 했습니다.
까닭을 물어보니 자기는 남쪽 지방인 절강 사람인데 부모가 모두 염병에 걸려 죽었다며 눈물 흘리며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야 되는데 장사 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기위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홍순언은 공금에서 거금 300금을 내어 손목도 한번 안 잡아보고 청루에서 그녀를 풀어 주었습니다. 여자가 이름만이라도 꼭 가르쳐 달라고 애원해서 그냥 조선에서 들어온 홍역관이라고만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공금에서 거금을 유용해 버리고 나니 다른 역관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귀국해서 홍순언은 이 일(공금횡령) 혐의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살이를 하는 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임금의 宗系가
착오됨을 해명함)라는 명나라와 200년 가까이 끌어온 국제문제가 있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의 네 왕을 죽이고 구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정통성이 없는 변방의 소국이라고 명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되어 있어 조선에서는 여간 수치가 아니었습니다.
이인임은 고려 말의 역적으로 이성계에게 처형당한 인물인데 이성계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으니 가당치도 않은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명나라는 이런 잘못된 기록을 이런 저런 핑계로 여간해서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왜곡된 역사의 기록을 고치기는 어려운 일인 모양입니다.
태조에서 선조 간 12대에 걸쳐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간이나 끌어 오면서도 명은 묵묵부답으로 이를 고치지 않았습니다.(지금 같으면 까짓 신경 끄면 그만일 텐데.. 말이죠)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중 선조 때 명에서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을 다시 편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 조정은 이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이번에도 명의 허락을 받아 오지 못한다면 이것은 '통역의 죄'라며 수석 역관의 목을 베야한다고 들고 났습니다. 이에 선조가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 수석 역관의 목을 베겠다고 공언을 해버립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중국어 역관들이 상의에 나섰습니다.
"홍순언은 어차피 살아서 감옥 밖으로 나오기 어려우니 우리가 빚진 공금을 갚아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북경으로 보내자."
역관들이 이렇게 합의 하여 여러 해 동안 감옥에 있던 홍순언의 공금을 갚아주고 그를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중국어 역관들을 대표해서 죽어 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순언으로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명나라 길에 오르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담당관들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최선을 다 할 결심이었습니다. 선조 17년(1584년) 정사 황정욱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겪은 후였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북경의 입구인 조양문 밖에 도착하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 기병이 말을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역관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을 한 필 내놓으며 홍순언을 장막으로 정중히 모시고 갔습니다. 조금 후에 여자종 10여명을 거느리고 점잖은 부부가 와서 큰절을 올립니다.
홍순언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그 귀부인은 꿇어 앉아,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은혜를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옆의 남편도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장인어른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푸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내의 말을 들으니 장인어른께서는 참으로 천하의 대인이십니다."
아~ 그때서야 홍순언은 몇 년 전 통주 청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 뒤 그 여인은 청루에서 나와 부모의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인의 부모도 벼슬하던 집안이라 친척의 주선으로 석성(石星)이라는 사람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남편이 점점 출세하여 예부상서(예의, 제향, 조회, 교빙, 과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장관)가
되었습니다. 석성은 조선에서 사신이 오기만 하면 홍역관이 있는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홍순언은 상좌에 앉아 보은연이 열리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명나라의 거물들이 다 모였습니다. 술자리가 어울려갈 때 석성이 홍순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장인께서는 이번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홍순언은 좋은 기회다 싶어 완곡하게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석성은 웃으며 그것은 자기 소관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 염려하지 말고 자기 집에서 푹 쉬다 가시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부인도 이날을 위해 손수 짰다는 비단 100필과 후한 선물을 압록강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그 비단 끝에는 '報恩'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보은단(報恩緞 비단:단)이라고 했습니다.
홍순언이 귀국하자 사람들이 비단을 사러 그의 집에 모여드니 그가 살던 동네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현재의 강남구 청담동 롯데호텔 일대입니다.)
여하튼 소식을 접한 임금이 몸소 모화관까지 나아가 사신 일행을 마중하고 이 성과를 종묘에 나가 조상에게 고한 뒤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습니다.
홍순언은 정철, 이산해, 기대승, 유성룡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거목들과 같이 나라를 빛낸 광국공신에 포함되어 당릉군(정2품)에 봉해지고 자손대대로 양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조선시대 역관이란 양반 축에 들지 못하고 중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역관이 임금으로부터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국은 거의 왜놈들 수중에 들어가 국운이 위태로운데 임란 초기부터 명나라에 원군을 청했지만 장꽤넘들은 시간만 끌고 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신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 하는 사신을 보냅니다. 정사 정곤수이 명나라 조정으로 가서 울며 통 사정을 할 때 막후에서 홍순언이 활약합니다.
그때 석성은 병부상서(국방부장관)가 되어 있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압록강만 지키면 된다고 조선의 원군 요청에 모두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만은 조선이 정복되면 요동까지 쳐들어 올 염려가 있으니 원조해야 된다고 황제를 설득해서 원군을 보내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명은 막대한 군비조달로 국운이 쇠하자 황제 신종은 그 책임을 물어 석성을 투옥시킵니다. 그렇게 석성은 부인의 보은을 다하다가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석성은 유언으로 부인과 아들을 조선으로 망명하도록 하여 해주에 정착하게 됩니다. 조선에서는 해주 수양산 아래의 땅을 하사하고 아들 담을 수양군으로 봉했습니다. 이 아들 담이 해주 석씨의 시조이며 자손들은 고위관리를 역임하고 가문을 빛냈습니다.
집성촌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영서면 일원이라고 합니다.
# 2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장왕이 어느 날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촛불이 꺼져 암흑세계가 되었습니다.이 때 어느 신하가 왕의 애첩의 귀를 잡고 입을 맞추는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애첩은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뗀 후
무례한 짓을 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에 장왕이~
"오늘밤, 이 자리에 갓끈을 떼지 않은 사람에겐 벌을 내리겠다."고 명한 후, 불을 켜게 하였습니다. 실수한 신하를 용서해 주기 위한 왕의 관용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초나라가 진 나라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적군을 물리치고 위기를 구한 이가 바로 옛날 장왕의 애첩을 희롱한 그 신하였습니다.
그는 장왕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동되어 어느 때고 그 은혜를 갚고자 따로 용병을 길러 전장으로 나가 싸워 위기에 처해 있던 장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보은은 이렇게 감동이고 기쁨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