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 호조 서리를 지낸 김수팽은
'전설의 아전'이었습니다.
청렴하고 강직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는 가록들이
있습니다.
호조판서가 바둑을 두느라고 공문서 결재를 미루자
김수팽이 대청에 올라가 판서의 바둑판을 확 쓸어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마당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졌으나 결재부터 해달라" 하니 판서도 죄를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수팽이 숙직하던 밤, 대전 내관이 왕명이라며
10만금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끌다가 날이 밝고서야 돈을
내주었습니다.
야간에는 호조의 돈을 출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관이 사형에 처할 일이라고 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김수팽을 기특히 여겼다고 합니다.
(이수광, 『조선의 방외지사』).
김수팽의 동생 역시 아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아우의 집에 들렀는데 마당 여기
저기에 염료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내가 염색업을 부업으로 한다"는 동생의 말에
김수팽은 염료통을 모두 엎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나라의 녹을 받고 있는데 부업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으로 먹고살라는 것이냐?"
김수팽의 일갈에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청빈한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사불삼거(四不三拒)'를 불문율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 관료들이 지키려 했던
'사불삼거(四不三拒)'란 무엇일까요.
사불(四不)은~
재임 중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四不)로
▶ 부업을 하지 않고
▶ 땅을 사지 않고
▶ 집을 늘리지 않고
▶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풍기 군수 윤석보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산 것을 알고는
스스로 사표를 냈다는 기록이 있고~
대제학 김유는 지붕 처마 몇 치도 못 늘리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거(三拒)는~
공무 중에 반드시 거절해야 할 세 가지를 이르는데
▶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 청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 경조사의 과도한 부조를 말한다고 합니다.
청송 부사 정붕은 영의정이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다'고 답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우의정 김수항은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 무명
한 필을 보낸 지방관을 벌주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습니다. (이규태, 『한국인의 생활문화 2』)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청빈한 공무 자세에서
청백리가 나왔고 그 정신문화에서 우리 후손들은
자랑과 긍지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지금 우리
공직사회에는 과연 사불삼거의 전통이 남아
있기나 한 것인지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오히려 사불은 사라지고 '사필(四必)'이 자리하여
그 사필과 함께 하지 못한 관료는 팔불출이라도
된 듯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럼 '사필(四必)'이 뭐냐고요? 뭐긴 뭐겠어요.
▶ 위장전입
▶ 세금탈루
▶ 병역면제(기피)
▶ 논문표절의 네 가지를 말함인데 이 네 가지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면 마치 고위 공직의 후보자가
되기 어려운 것인 것처럼 거론되는 대상마다 이
사필에서 자유로운 관료가 별로 없더란 얘기입니다.
(회사 조훈부장님이 보내주신 글 중 일부입니다)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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