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부끄러운 일이란 명실이 일치하지 않은 게 제일 크다. 그렇지만 또한 명성이 먼저 있고 나중에 실질을 요구하는 것을 고명사의(顧名思義)라고 한다. 가령 영주(瀛洲, 제주도) 서쪽 고을의 청룡재라는 곳 또한 고명사의할 수 있는 경우이다. 무릇 이제 용이라는 것은 하늘을 날다가도 못에 잠기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며 건원의 기운을 체득하여 성인의 쓰임을 얻은 동물이다. 그런데 외진 마을의 말학에게 이름을 생각하고 실질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난쟁이에게 천균의 무게를 들라고 하는 경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용의 종잡을 수 없는 신령한 변화는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지만, 용이라고 말한 것은 양(陽)에 순수하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람이 선에 순수하여 악이 없어지면 또한 사람 중의 용이지 않겠습니까. 순선무악(純善無惡)은 덕을 이룬 자의 일이니, 본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공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집에 지내는 사람은 닭이 울 때 일어나 부지런히 선행을 하여 한 생각의 선이라도 곡식을 키우듯 하고 한 생각의 악이라도 덤불을 자르듯이 합니다. 독서할 때는 대의를 먼저 구하고 글을 지을 때는 이치에 합당함을 요체로 삼으며,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고 나와서는 어른을 섬기면서 사물을 응접하거나 먹고 쉬고 움직이고 가만히 지낼 때도 오로지 선(善)을 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기 마음에 부끄럽지 않기를 기약한다면, 악은 날로 사라지고 선은 날로 쌓여서 넉넉하게 순(舜) 임금의 무리가 될 수 있을 테고 비록 하루아침에 용이 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용의 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그저 자기가 표절(標竊)할 바탕으로 삼고 시짓는 기예로 남들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며 자잘한 18운(韻)의 과체시(科體詩)를 자기가 잘하는 일로 삼고 심신을 도외시(度外視)하여, 사람들과 하루 종일 지내면서 의리를 언급하지 않고 세속에서 좋아하는 것만 따라 유학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지낸다면, 거기가 바로 미꾸라지와 두렁허리 같은 소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청룡(靑龍)이라는 편액(扁額)을 한번 본다면,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영엽(丁永燁)이 이 재(齋)에서 독서하는 자인데, 나를 찾아와 재의 기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대체로 재실의 편액은 언덕의 이름을 따르지만 삼가 용이라는 이름에 느낀 점이 있어 우선 이 말로 써서 부치노라.
“天下之恥, 莫大於名浮其實. 然亦有先有其名而後責其實者, 所謂顧名思義者是已. 若瀛洲西鄕之靑龍齋者, 亦可以顧名而思義者耶? 今夫龍之爲物, 飛潛天淵, 興雲降雨, 軆乾元之氣而得聖人之用者也, 而欲使窮鄕末學顧其名而責其實, 則不幾於强僬僥以千鈞之重哉?” 曰: “不然. 龍之靈變不測, 若未可以擬議, 然語其所以爲龍, 則不過曰純乎陽而已, 人能純乎善而無惡則不亦人中之龍乎? 純善無惡, 成德者之事也, 固非一朝一夕之功, 然使居是齋者, 雞鳴而起, 孜孜爲善, 一念之善, 培之如嘉穀, 一念之惡, 剪之如荊棘. 讀書則先求大義, 作文則要在理勝, 入而事父兄, 出而事長上, 以至於應事接物動靜食息之際, 莫不惟善之是求, 而期於不愧乎吾心, 則將見惡日祛而善日積, 優可以爲舜之徒矣, 縱不能一朝而成龍, 其亦可謂龍之種也. 苟其不出於此, 聖謨賢訓, 徒資吾之剽竊, 蟲雕蛩吟, 務悅人之耳目, 區區十八韻, 自以爲能事, 而置身心於度外, 羣居終日, 言不及義, 循世俗之好尙, 安遐風之僻陋, 則是乃鰌鱓蝦蟆之所萃, 試瞻靑龍之扁, 能不赧然而發赬哉?” 丁生永燁讀書於齋中者也, 謁余文以記其齋, 蓋曰齋之扁, 因岡號也, 然竊有感於龍之名, 聊爲此語以付之. <양원유집(陽園遺集) 권9 청룡재기(靑龍齋記) 임진(壬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