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시절.
우연히 어느 관리의 환송 잔치에 참석한 정철(鄭澈)과 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심희수(沈喜壽) 그리고 이정구(李廷龜) 등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다섯 대신들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를 가지고 시 한 구절씩 읊어 흥을 돋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정철이 먼저 운을 뗐다.
- ………………鄭 澈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沈喜壽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홍수 풍전원수성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柳成龍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
………………李廷龜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간초당 재자영시성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李恒福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유성룡은 옆 자리에 앉은 두주불사의 임자 정철의 약이라도 올리려고 아내의 술 거르는 소리라고 했는가 아니면 장난삼아 정철의 눈빛을 한번 살피려고 이렇게 노래 불렀는가?
물론 그날 저녁 그 자리에 함께한 다섯 사람이야 말로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문장에서, 풍류에서 또 기지와 해학에서 그리고 한 순배씩 돌리는 술을 마시며 읊는 시가에서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인물들이었으니 유성룡이라고 한 잔술로 어찌 그의 주량을 채울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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