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큰아들 면회를 다녀왔다. 연천에 있는 5사단 301대대를 가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 사람에게 처음이란 단어는 설레임을 준다. 큰애들(첫째 자식)의 입대 후 첫 면회인데다 두 달 동안 애비 품을 떠나 훈련받는라 고생했을 자식을 만난다니 얼마나 가슴이 설레이는지... 장모님은 일주일 전부터 큰애에게 먹일 과일이며 비타민, 부탁한 비염약(평소 비염이 있었는데 입대후 다시 비염이 도진 모양이다) 등을 챙기셨다. 결혼하면서 줄곧 장모님을 모시고 살다보니 큰애를 낳자마자 큰애는 장모님이 키운지라 장모님과 큰애와의 사이는 부모와 자식간 사이 이상으로 각별하고 정이 돈독하다.

큰애가 자라면서 고민을 아빠나 엄마에게 말하기보다 장모님에게 먼저 말하여 역으로 장모님이 나와 아내에게 "큰애에게 신경좀 쓰라"고 말씀을 하여 우리 부부를 난처하게 하고 한편으로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여튼 논란훈련소에 입소하는 날 집을 떠나면서 눈물의 헤어짐을 가졌던 장모님은 면회를 가기로 결정한 일주일 내내 큰애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들떠 계셨다. 

아침부터 서둘러 밥을 챙겨먹고 떡집에 들러 떡을 사고, 차에 가득 주유를 하고, 네비에 소대장이 일러준 '대광리역'을 찍고 일산에서 서울외곽순환소속도로를 진입하여 두시간 40분만에 301대대 위병소 앞에 도착했다. 1985년 6월 30일에 군 전역을 하고, 예비군훈련을 받느라 군부대를 입소하여 훈련을 받기는 하였지만, 내 분신과도 같은 자식이 근무하는 전방 군부대를 민간인 신분으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ROTC장교로 군생활을 하였으니 병사 신분으로 근무하는 자식의 애환과 고충을 다는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군대가 민주화되고 체벌이 사라지고 보급품이나 시설이 개선된 상황에서 근무를 하니 아마도 내가 근무하던 당시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에서 근복무를 하고 있는 것만은 자명한 일이다.

면회를 신청 후 30분쯤 지났을까 멀리서 선임당직자의 인솔로 걸어오는 두 명의 병사 모습이 보였다. 11개월 전에 25사단에서 군을 제대한 처조카 민규가 장난스레 "군기가 바짝 들어 제식동작을 하고 올 규 모습이 궁금해요"라는 말에 나도 호기심 반, 입대한지 두 달만에 대하는 자식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기대 반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병사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이윽고 가까이 가다오는 병사 모습에서 눈에 익은 큰아들 모습이 확연히 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군복을 입고 절도있게 걸어오는 늠름한 모습은 입대전 매일 늦잠을 자고 아침에 깨워야 겨우 일어나 부시시한 얼굴로 아침 식사를 했던 큰아들의 게을렀던 모습을 어느 곳에서도 찿을 수가 없었다. 

당직사관의 배려로(원래 열쇠회관 이용은 면회신청시 사전에 예약한 경우에 허용이 된다고 한다)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열쇠회관으로 나와 점심식사를 하며, 이후 3시간 30분 동안 장모님과 민규 셋이서 그동안 밀렸던 대화를 실컷 나누도록 해주고 나는 차 안으로 와서 밀린 잠을 보충했다. 열쇠회관 내에서도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건강한 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고 두 발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모님처럼 나도 큰자식의 건강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큰애가 "선임병이 논산훈련소 출신이 우리 부대에 온 것을 이제껏 딱 세번 봤다. 너도 참 지지리도 복쪼가리가 없는 놈이구나"라고 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마치 논산훈련소 출신 병사는 다들 후방으로 빠지는데 너는 누가 손을 써주지 않아 최전방으로 배치받았구나!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일순간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정말 우리 아들이 최전방으로 배치받지 않았을텐데 하는 자괴감이 든다.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이루겠다고 발표했다. 군 훈련병의 부대배치가 공정하게 이루어졌으리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아내 생전에는 아내는 처갓집의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처갓집 제사도 모셨고,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살았고 처갓쪽 가족모임은 모두 우리집에서 했다. 명절이면 처남이나 처형, 처 이모와 이모부, 심지어는 처의 이종언니부부(처 큰이모 큰딸)도 우리 집으로 모여 명절을 보내곤 했다.

자연히 우리집 행사에도 다들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이사때면 처남이나 동서와 처형도 우리집에 와서 짐도 날라주고 전기배선이나 현관보조키 달기 등을 해주곤 했다. 특히 손위 동서는 엘리베이터 회사에도 근무하였고 지금도 엘리베이터 관련 벤처기업에서 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전기나 전기배선 쪽은 기술과 경험이 많아 우리집 전기관련 문제의 해결사였다.

그러다보니 아내는 집안에 수리할 사항이나 고칠 사항이 생기면 나보다는 형부(나에게는 손위동서)를 찿았고 내 차지까지는 기회가 오지를 않았다. 아니 나에게 전기나 배선 일은 아예 미덥다고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하며 살아온지 23년째... 이래뵈도 내 어릴 적에는 내가 손재주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집안의 손이 가는 잔일이나 수리는 내게 부탁하여 내가 곧잘 해결해주곤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내 손재주는 바느질만 빼고는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그렇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집에 이사 등 큰 일이 있을때마다 다들 와서 도움을 주는 편한 생활이 익숙하고 이를 즐기고 살았는지 모른다.

내 바느질 솜씨는 여자인 아내도 인정을 했다. 하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학을 마칠때까지 자취생활과 군생활(비록 장교였지만)을 합하면 13년 6개월을 객지생활을 하고 살았으니 바느질이며 취사, 반찬을 만드는 일, 요리, 집안 수리나 전기기구의 간단한 수리 등 어지간한 문제는 스스로 자급자족을 해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내도 이 세상에 없고 지금도 장모님은 내가 모시고 있지만 처갓집 가장 역할은 막내처남이 수년전부터 제사를 모시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넘어갔고 명절에도 모임은 처남집에서 하고 있다. 이번 집 이사를 하면서 현관입구 번호키를 기존에 달려있던 키를 그대로 쓰려고 했더니 장모님이 글씨가 작고 눈에 익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석을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기능이 없어 불편하다고 반대하시며 이전 아파트에서 쓰던 키로 바꾸어달라고 하신다. 손윗동서가 달아보려고 저녁 늦게 와서 2시간이나 시도를 했지만 장비도 부족하고(특히 현관 철문에 구멍을 뚫어 번호키 본체를 고정시키는 일) 시간에 쫓겨 금요일 밤 11시에 미완성의 상태로 두고 월요일에 와서 고쳐주겠다고 하고 가버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홀로서기를 해야겠구나!' 마음을 먹고 있던 차였던지라 철물점에 들러 구멍을 뚫는 드릴 바이트날을 구입해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30분만에 조립을 완료했더니 장모님이나 쌍둥이자식들이 놀라는 표정이다. "자네도 이런 일을 다 할 줄 아는가? 고맙네", "아빠! 아빠가 이걸 하셨다. 와~ 우리 아빠 대단하시다" 내친 김에 거실에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못을 박아 시계도 달고, 가족사진 액자도 달고, 내 공부하는 식탁 위 전등도 이전 전등으로 교체하고... 그동안 숨겨놓은 내 실력을 발휘했더나 가족들이 모두 놀란다.

'짜식들~ 이 아빠를 뭘로 보고.... 아빠도 한번 하면 한다는 사람이란다~~'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한소망교회 4부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밖에 눈이 소복히 쌓였다. 하늘을 보니 당분간 그칠 눈이 아니다. 일단 차 시동을 걸어놓고 앞면 유리와 좌우측 유리, 뒷면 유리에 쌓인 눈을 치운다.

눈을 보니 젊은이와 나이먹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 눈에 대한 것이 있다.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설레이고 들떠서 기분이 좋아하면 젊은 사람이고 미끄러져서 다치면 어떡하나를 걱정하면 나이먹은 축에 끼인다고 한다. 나는 마음이 설레이면서도 당장 내일 출근길이 걱정되니 그럼 중간세대인가?

대충 눈을 치우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킨다. 평소에는 씽씽 달리던 길인데 오늘은 눈길이 미끄러워 다들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한다. 이미 도로 위에도 눈이 상당히 쌓여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경비원 아저씨들이 부산하다. 쌓인 눈을 치우고, 아파트 계단입구와 주차장 입구에 영화칼슘을 뿌리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얼마만에 내리는 눈인가? 어릴적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렸고 지독히도 추웠는데 이제는 갈수록 눈도 내리지 않고 춥지도 않는다. 이렇게 눈이 내려야 염화칼슘을 만드는 회사도 장사가 되고 날씨가 추워야 옷을 반드는 의류회사도 장사가 되고 해충도 죽어 농사가 잘된다는데....

이러한 추위에도 내가 들어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며칠전 출근길에 통근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에 버려진 피자케이스가 있었다. 지나가던 노숙자가 그 피자막스를 열더니 먹다 남긴 차가운 피자 쪼가리를 찿아서 입에 넣고 허기를 채우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에게도 가정이 있을텐데,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텐데...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들이 사는 둥지를 보면 어린 새끼들을 위해 어미새들은 부지런히 먹을 것을 구해 가져온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들은 어미새가 가까이 오는 인기척만 느껴도 서로 먹을 것을 달라고 입을 벌리고 짖어댄다. 밤이 되면 어미는 새끼들이 춥지 않도록 둥지에서 새끼들을 품에 안고 따뜻한 체온으로 키운다. 어쩌다 외부에서 새끼를 공격하는 다른 새들이 오면 목숨을 걸고 둥지를 지킨다.

우리 집에는 대학에 다니는 큰애와 초등학교 6학년짜리 쌍둥이자식 아들 셋이 있다. 그리고 애들을 돌봐주는 연로하신 장모님이 계신다. 모두 개성이 강하여 한 성질 한다. 아들 셋을 양육하며 장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니 정말 열심히 살게 된다. 단 하루라도 그냥 대충대충 살 수는 없다.


너무 힘들 때는 어릴적 우리집 처마 둥지에서 새끼를 키우던 제비를 생각한다. 봄이 되면 제비 한쌍이 와서 처마 밑에 집을 짖고, 새끼를 낳고 번갈아가며 둥지를 지키고 먹이를 구해와 새끼들을 기르고, 새끼들이 깃털이 나고 날개가 생기고 스스로 날게 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키우는 모습을... 비가 오는 날에도 어미 제비는 둥지에 머무르지 않고 비를 맞으며 들판에 나가 먹이를 구해온다. 가을이 되어 그렇게 키운 새끼들이 커서 자유롭게 날게되고 추워지기 전에 제비는 강남으로 떠난다.

언젠가는 자식들도 크면 내 곁을 떠나 독립을 하겠지. 내 힘들어도 자식들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는 이 애비가 뒷바라지를 해주어야겠지. 때로는 삶에 버겁고, 자식들이 내 속을 긁고, 내 말에 반항을 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다 커가는 과정이려니 이해하며 받아들여야지...

싱글대디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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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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