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대 벤처산업 붐이 일던 제1차 정보기술(IT) 혁명 때와 달리 페이스북ㆍ트위터 등으로 대변되는 21세기 제2차 IT 혁명(SNS혁명)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에서 상하좌우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이에 대처하는 전문가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베스트셀러 리스트나 흥행영화를 살펴보면 시대정신과 문화 흐름 등을 알 수 있고 선거결과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이전 세대는 이데올로기와 조직이 중요했는데 현재 20~30대는 개인의 가치관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조직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려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I may be wrong)'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자신 있을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오류를 줄이기 위해 항상 공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노력도 필요한데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평생 다시는 넘지 못할 한계를 만든 것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6월 17일, 경기도 제2청사에서 공무원들에게 '급변하는 21세기 전문가의 자세'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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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고 슬프다"

"인생의 마지막 뒷모습을 망쳤다. 악마의 덫에 걸려 빠져 나가기 힘들 듯 하다. 그동안 너무 쫓기고 시달려 힘들고 지쳤다. 더 이상의 수치도 감당할 수 없다" 

"모두 내가 소중하게 이어온 만남에서 비롯됐다. 잘못된 만남과 단순한 만남 주선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금전거래는 없었다"

"나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고통이 심하다"

"얄팍한 나의 자존심과 명예를 조금이나마 지키고 대학의 행정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먼저 떠난다. 지저분한 사건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다들 잊어버리면 고맙겠다"

"모두 내 불찰, 내 탓이다. 가족에게는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동안 나를 믿고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성공적 인터뷰 진행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뭐죠.

"가장 중요한 건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 있어야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겁니다. 잘 듣지 않고는 좋은 질문을 못해요. 핵심은 호기심인데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남달랐습니다."

- 인터뷰하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하나요.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바로 묻는 걸 좋아합니다. CNN에 인터뷰를 도와주는 직원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질문거리를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핵심만 말합니다. 과잉준비가 안 되게 신경 써요."

- 어떤 인터뷰 주제는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있을 텐데요.

"나는 내가 보통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대학에도 못 간 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아요. 의사들은 나보다 의약품에 대해, 변호사는 법에 대해, 관리는 정부에 대해, 호텔 매니저는 호텔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알아요. 나는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 물을 만한 기초적인 질문을 하니까 엄청난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죠."

- 그게 인터뷰를 쉽게 하는 비결입니까.

"인터뷰 대상자를 미리 규정하거나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사전에 조율하지 않아요. 많은 인터뷰 진행자는 초대 손님보다 자신이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인터뷰 대상자를 띄워요. 그래서 인터뷰에서 '나(I)'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나'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중요하지도 않은 내 의견이 들어갑니다."

- '나' 대신에 '우리(we)'를 쓰나요.

"'우리'란 말도 안 씁니다. 그냥 묻지요. 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언제, 어떻게라고 묻기만 하면 돼요."
(중략)

- 사람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느끼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나도 가끔 트위터를 하지만 중요한 일들만 트위터에 올려요. 예를 들어 어제(지난달 27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했을 때 그곳 인상과 같은 거죠. 수퍼마켓에서 무엇을 사고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를 트위터에 올리는 건 멍청하고 정신 나간 짓이지요. 트위터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 비무장지대에서는 어떤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습니까.

"그곳의 초현실주의적인 인상을 올렸어요. 현실의 세계 같지가 않았어요. 긴장이 도도하게 흐르고, 남북한 군인들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내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어요. 북한 군인들이 바로 내 옆에 있었는데 영양실조로 보였어요."
(중략)

- 뉴미디어의 도전에 대응해 신문 등 전통 미디어의 생존 전략은 무엇입니까.

"빠른 보도를 해야 해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술 진보는 놀랍습니다.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이와 함께 인간적인 것도 잊지 말아야죠. 그렇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속보는 좋은 것이나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입니다.

"심장병이 있어 수술을 해서 장거리 여행은 잘 하지 않습니다. 약을 먹고 명상을 자주 하고 많이 걷습니다. 젊어 보이는 덴 마음이 중요해요.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가족이 최우선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두 번째 가치는 공동체입니다. 자선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한 돕고 싶어요.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과실을 사회에 환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래리 킹은?

래리 킹은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복지수당에 의지해 어렵게 살았다. 고교 졸업 후 가사를 돕기 위해 취업해야 했다. 1957년 마이애미에서 리디오 DJ로 방송에 입문한 뒤 85년부터 25년간 CNN의 간판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를 시작했다. '래리 킹 라이브'는 한 명의 고정 사회자가 최장시간 진행한 방송 프로그램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7명의 부인과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으며, 현재 26살 연하의 여덟 번째 부인과 낳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출처 : 중앙일보 2011.6.6.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야신'이라는 별침을 가지고 있는 SK 김성근 감독.
최근 약한 전력으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야왕'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은 한화 한대화감독. 24일부터 시작된 SK(1위)-한화(7위) 3연전은 '야신'대 '야왕'의 맞대결이라고 언급되고 있을 정도이다. 결과는 야왕의 3:2 승리

김성근 감독이 한대화 감독의 새로운 별명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 감독의 새로운 별명이 '야왕'이라고 들었다. 양준혁 해설위원은 '양신'이고, 친척들이 점점 많아지네"

"(내 별명의) 희귀함이 없어진다. 이제 내 별명을 반납할까 싶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세계에서 최고의 명문 중에 명문인 스텐포드 대학의 졸업식에 초대 받아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대학졸업식에는 처음입니다.
오늘 저는 저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제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이야기는 인생의 전환점들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리드 대학 (Reed College)을 6개월 동안 다니다가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자퇴하고도 18개월 동안 캠퍼스에 남아 있었습니다. 왜 자퇴를 결심하게 되었냐고요? 이야기는 저의 생모가 저를 낳을 때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의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생모는 저를 기를 수 없어서 낳기 전부터 입양을 시킬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낳자마자 남편이 변호사인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요량이어서인지 그들 부부는 딸을 원하고 있었고 제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입양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마음이 급해진 저의 생모는 대기자 명단에 있던 저의 양부모에게 전화를 해서 입양시킬 생각이 있는지를 타진했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들은 기꺼이 저를 입양하고 싶어 했습니다. 문제는 양어머니는 대학문턱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 중퇴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저의 생모가 입양동의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다시 틀어졌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양부모가 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저의 생모에게 해 주는 선에서 마무리 되어 저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양되었습니다.

17살이 되자 저는 약속대로 대학에 보내졌습니다. 문제는 제가 집안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학비가 스탠포드 못지 않은 리드대학으로 지원한 것에서 다시 불거졌습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양부모님들의 벌이로는 제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었지요. 설상가상으로 6개월의 대학생활을 보내고 나니 대학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뭐가 될 수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고 또한 대학이 이것에 대해서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학 등록금은 저의 양부모가 일생을 거쳐서 모아 논 돈을 순식간에 축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상황을 잘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두렵고 위험한 결정이었으나 지금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그간 내린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퇴를 결심하는 순간에도 내가 관심이 없던 필수과목을 안 들어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이 안도감을 빌미로 그간 들어보고 싶었던 선택과목을 청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청강하며 지내는 생활은 대학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기숙사에서 밀려나서 친구들 방 마루에서 하루하루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5센트 하는 콜라 캔을 모아서 점심값을 마련하곤 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 저녁에는 해어 크리쉬나 사원에서 제공하는 저녁으로 영양보충하기 위해서 7마일을 걸어 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의 먹던 맛있는 저녁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대학 자퇴 후 호기심과 직관의 선택에 의해서 스스로 익힌 경험들은 내 인생의 후기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교훈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당시 리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체에 대한 강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어디를 가도 심지어는 개인 서랍의 문에도 손으로 쓴 아름다운 서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전공과목을 들을 의무가 없었던 저는 이 서체 강의를 참관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당시에 그 유명한 서리프체를 익힐 수 있었고 글자간 공간을 조정함으로써 예술적인 글씨체들이 다시 탄생된다는 점을 배웠고 이미 훌륭한 서체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더 뛰어난 서체로 변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기법들을 익혔습니다. 과학으로는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서체 예술에 잠재해 있었습니다.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와 같은 서체 강의가 내 인생에 어떤 실질적 도움이 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는 이 서체를 최초의 맥캔토시에서 구현하게 됩니다. 맥캔토시는 이 서체로 무장한 첫 세대 컴퓨터입니다. 내가 이 서체 강의를 듣지 못했다면 맥캔토시 컴퓨터에서 지금 쓰고 있는 다중 글씨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윈도우 체계가 이 서체를 다시 배워 자신의 프로그램에 구현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지금 쓰시는 개인 컴퓨터에 아름다운 글씨체를 체험하시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미래를 내다봐가며 자신 인생의 전환점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 중요한 전환점들은 명료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미래를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과거를 뒤 돌이켜 보면 과거의 전환점들이 명료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이해할겁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지금 만들고 있는 전환점들이 과거와 미래의 전환점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열정을 불러다 주는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상시 항상 느끼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배짱, 삶, 인생의 업보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지금까지 나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의 반전을 가져다 준 것들은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한 탐구와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운 좋게도 일찍 발견했습니다. 워즈와 함께 20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이 10년 만에 4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0억불짜리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가장 좋은 컴퓨터라고 자부하고 있는 맥캔토시를 출시했을 때 제 나이는 30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에 저는 해고당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멍청하게도 제가 세운 제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수모를 여러분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 회사를 잘 운영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을 고용했지만 일의 발단은 여기서 부터였습니다. 그와 일 년간은 죽이 맞아 잘 지냈으나 그 후 회사의 비전에 대해서 의견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결국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지요. 이런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오자 우리 이사진들은 결국 그의 손을 들어 준 것이지요. 30의 나이에 내가 세운 애플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히. 인생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려 너무 황당했고 결국 몇 달간 무의도식하며 방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리콘 벨리에 타오르고 있는 봉화의 불꽃을 살리기 위해 달리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제가 달리던 중에 바턴을 떨어뜨렸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데이빗 팩커드 (HP설립자)와 밥 노이스 (인텔설립자)를 만나서 저 때문에 망쳐진 실리콘 벨리의 마라톤에 대해서 사과하고 모든 일에서 발을 빼고 싶었습니다. 저는 공인된 실패자의 낙인을 받았고 실리콘 벨리에서 가능하면 멀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무엇인가 내면에서 다시 저를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이 해고가 저를 제가 좋아하는 일에서까지 해고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플에서 쫓겨난 것이 제 인생을 완성하게 되는 가장 큰 행운의 사건이었습니다. 회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기약은 없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습니다. 애플에서의 해고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저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사에 이어, ‘픽사’ 사를 세웠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일류 최초로 컴퓨터 에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를 세상에 선보였고 지금 픽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영화제작 스튜디오라고 자부합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저에게는 필요한 약이었습니다. 누가 뒤에서 벽돌로 당신을 내리쳐기절시키더라도, 결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마십쇼.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 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구애하듯이 여러분의 일에 대한 사랑도 비슷합니다. ‘일’은 인생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인생자체입니다.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되는 순간부터입니다. 일을 통해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일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도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진심을 다한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것에 대한 연은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서 이 일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지 마세요.


세 번째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글에 감명 받은 저는 지난 33년간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 라는 답이 계속 나와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제 길을 걸어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지름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마음이 진실로 이끄는 본질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년 전쯤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해줄 수 있는 것을 단 몇 달 안에 다 해치워야 된단 말이었고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 몇 십 년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해보니, 머리로만 알고 있던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점을 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변화를 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죽기 전에 지금까지의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고 보람된 것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대망을 품고 세상에 첫발을 내 딛는 떠오르는 세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 줘야 할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주연배우로써의 우리 생은 낭비해도 될 만큼 길지 않습니다. 낭비하지 마십쇼.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에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낭비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정녕 자신의 삶을 가꾸지 못하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서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타인들이 내는 소음에서 벗어나서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여러분이 이것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나서는 것 이외의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여행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시적 영감을 더해가며 혼신을 다해서 만든 책이었지요.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 등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거쳐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무전여행이라도 해보고 싶게 만드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무슨 일이든 항상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임하고, 처세술에 밝은 사람들에겐 차라리 미련하게까지 보이는 끈질긴 정신을 견지할 것",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저는 새로운 인생의 항로에 들어선 여러분에게 스튜어드의 이 말을 다시 해주고 싶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감사합니다.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3월 25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2011년도 고위공직자 정기 재산변동사항'에서 총 재산 약 332억원으로 재산 총액 및 재산총액 증가금액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힌 농촌진흥청 전혜경 국립식량과학원장(국장급)

"귀향길과 같이 어렵고 남들이 기피하는 길을 가려면 힘이 들지만, 그 과정을 극복해내면 반드시 꽃길이 나타난다. 현재는 비주류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 만의 분야에서 목표를 가지고 그 분야를 개척해나간다면 꽃길은 나타난다"

"인생에 있어서는 '양손에 떡은 없다'. 한가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포기해야 할 때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일을 할 때는 즐거워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나지, 억지로 끌려가듯 일을 하면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즐겁게 일을 할 거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버크셔 해서웨이 워런 버핏 회장이 3월 21일 오후 서울 롯데호텔에서 조선일보 기자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 국민들이 보다 나은 생활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항상 전쟁이나 대공황으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인류는 어떻게든 앞으로 발전했다. 한국은 지난 50년동안 세계 각국으로부터 식량원조를 받으면서 지금의 고도성장을 구가한 좋은 본보기이다"

"경제란 가끔은 딸꾹질을 하겠지만 문제가 생겨도 성장 엔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후발국인 한국의 성공요인에 대해)"한국 사람들, 교육,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한국 국민의 욕망(desire), 특히 후대에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길 바라는 욕망이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데 대해) "내가 갖고 싶은 거, 필요한 것은 모두 풍족하게 갖고 있다.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준다"

(조선일보 2011.3.22 기사 중에서 발췌)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다. 그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를 정도로 대중적인 책은 아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의와 결핍이 된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 때문에 1위에 올랐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증폭이 되고 심상치 않게 보인다.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놔두다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엄청난 갈등이 어디선가 표출될 것이다"

"기득권이 과보호될 때 그것은 치명적인 독이 된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안주하게 되면 스스로 경쟁력이 떨어져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안정적이지 못하게 된다"

'MBC 스페셜'의 '신년특집 안철수와 박경철' 중(2011년 1월 28일 방송)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 지난 1월 13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19일 귀국한 이건희 회장에게 일본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느냐는 질문에
"사업가와 교수들, 옛날 학교 동창 등 이런 사람 주로 만났다"

- 이들과 논의한 내용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세상이 하도 빨리 바뀌어 앞으로 어떻게 바뀌느냐에 대해 얘기했지만, 5년 뒤, 10년 뒤는 그 사람들도 상상을 못한다. 억측은 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생각은 못한다"

- 이건희 회장은 평소에 '향후 10년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는데 어떤 사업이 유망하느냐는 질문에
"어떤 사업도 미래는 다 희망이 있다. 어떤 사업으로 가느냐가 문제다. 섬유 산업도 사양길이라고 했지만 다시 올라온다. 다 희망이 있다"

카페지기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2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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