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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지난해 초에는 유가 때문에 어려웠고, 하반기에는 환율과 금융위기로 어려웠습니다.
올해도 어려운 건 분명하죠. 사실 저희는 2007년부터 미국 경제를 보면서 세계 경제가 나빠질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그룹은 지난해부터 미리 유동성을 확보해 뒀습니다.
2007년 에쓰-오일의 지분(28.41%)을 인수한 것도 이런 상황변화에 대처한 것입니다. 유가가
급속히 오를 것으로 보고 항공유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해외에 나가 공부했기 때문에 배낭여행을 많이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컸는데 외국에서는 한글의 존재가 없더라고요. 하루는
바티칸에 갔었는데 당시 일본 기업이 바티칸 성당 개·보수에 몇 억 달러를 기부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야, 우리는 언제쯤 국제적인 문화재를 보존하는 데 스폰서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루브르에서 관람객 음성안내 기계를
현대화하겠다면서 우리에게 스폰서 할 수 있냐고 물어왔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넣어주는
조건으로 스폰서 하겠다고 다시 제의했습니다. 물론 돈은 좀 더 들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죠.
최소한 우리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갔을 때 ‘어, 여기에도 한국어가 있구나!’ 하면서 내가
젊었을 때 갖지 못했던 자신감을 갖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데 기여해 우리 대한항공과 한진은 물론 한국의 위상도 올리고 싶었고요.
그래서 시작한 일입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관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이 떴느냐, 몇 개
노선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많이 태우느냐가 경영에 중요한 점이었죠. 요새는 수익이 날 수
있느냐, 서비스 질이 일관되게 유지되느냐 이런 것들에 중심을 둡니다.  관점만 바뀐 게 아니라
경영하는 방법도 많이 발전했어요. 이제는 제가 혼자 결정하는 것이 별로 없어요. 부서장,
본부장들이 알아서 판단해 줍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이 ‘trust but verify’입니다.  믿고 맡기되
확인하라는 거죠. 이게 요즘은 정착돼 있어서 제가 사진 찍을 시간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게 글로벌입니다. 한국적인 것도 좋지만 항공이나 물류산업은 근본적으로
글로벌 비즈니스입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한국 손님이 40%를 넘는데 더 성장하려면 한국
손님만으로는 안 됩니다. 외국 손님을 더 끌어 와야죠. 한국 손님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면 글로벌
항공사가 못 됩니다. 한국 옆에 일본(2억 명), 중국(13억 명) 등 거대한 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고객으로 모셔야 살길이 생기는 거죠.”


“구조조정이란 건 내실을 기하는 거고, 인력 차원에서는 제가 인사부에 오히려 사람 더 뽑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취직하기 힘들 때 유능한 사람이 더 많잖아요. 제 경험으로도 힘들 때
채용한 사람 중 유능한 사람이 많아요. 회사의 엘리트들도 그 층에 제일 많습니다. 이번에도
유능한 지원자가 더 많이 있다면 목표에 구애 받지 말고 더 뽑으라고 했습니다.”

“선친 때부터 ‘모르는 사업은 하지 마라’는 게 좌우명이기 때문에 물류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과 (주)한진이 주력이죠. 여기서 좀 확장하면 항공기 지상조업회사인
(주)한국공항과 한진해운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다 이 회사들을 지원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들은 늘렸다, 줄였다, 합쳤다 할 수 있죠. 항공은 이미 어느 정도 와 있고, 육상은
아직 한국 위주지만 이제 세계 각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육상운송 분야를 좀 더
키워야죠. 민간 항공기 부품 제조업도 하고 있고, 이것도 이미 보잉, 에어버스와 공동개발할
정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몸집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분야로 확장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GM을 보세요. 항상 포춘 500대 기업에서 1, 2등 하던 기업이 지금은 없어지게
생겼잖아요? 서열이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잘하는 곳에서 깊이를 추구할
겁니다.”

“경제는 사이클입니다. 사업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요. 내려왔으니까
올라갈 때가 있다는 걸 보고 해야지 내려온 것만 보고 하면 안 돼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지금 저렇게 된 것도 월스트리트 중심의 단기주의 때문이라고 나는
봐요. 그에 비해 한국은 과감한 투자, 장기적 투자가 많이 있어서 미국과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가 미국과 똑같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은 월급쟁이 CEO들이 주인보다
더 주인 행세를 하지만 우리나라 CEO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몇 천억원씩 연봉 받는 사람도
없고, 자가용 비행기 타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저만 해도 회사 주식이 오르면 뿌듯하고
좋지만 그거 뭐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람들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봐요. 어려운
한 해가 되겠지만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 이코노미스트 969호(2009.1.6) 중앙일보사,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의 신년특집 인터뷰가 이코노미스트 969호에 실렸다. 글로벌 마인드,
사업은 단순한 몸집 늘리기가 아닌 핵심역량을 가진 부분에 집중한다, 힘들때 채용한 사람
중에 인재가 더 많다, 경영은 단기 실적에 매이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구구절절 놓치고 싶지 않은 대목들이다.

2009년이 밝았다. 경기가 어렵고, 구조조정의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요즘,
경제는 사이클이고,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 내려갈 날이 있으면 반드시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 배낭여행을 하면서 국제적인 문화재에 기부를 하겠다는 것을
꿈꾸었는데 그 꿈을 이루었다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님의 말에 희망을 걸어 본다.

2009년은 위기를 기회로 반전하는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그런 해를 내 스스로 만들기
위해 꿈을 잃지 않고 이전보다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 본다.
2009.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힘들지만 아직까지 밥은
굶지 않고 잘 견뎌왔어요.”

남들은 손으로 글을 쓰지만, 황원교(49) 시인은 입으로 쓴다. 마우스 스틱을 입에
물고 컴퓨터 자판을 톡톡 건드려 한자 한자 쳐넣는다. 20년 전 교통사고로  경추
4, 5번 사이의 척수가 끊어졌다.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됐다. 목숨만 붙어있을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 단 5분간, 한 손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지체없이
목에 칼을 꽂고 싶었단다. 그러나 1996년 등단한 데 이어 시집을 두 권 냈다.
이번엔 산문집 『굼벵이의 노래』(바움)를 펴냈다. 58편의 이야기로 270쪽을
채우기까지 그는 몇 번이나 고갯짓을 했을까.

죽는 게 낫겠다며 곡기를 끊었다가 병세가 악화돼 공연히 가족들만 고생시키기도
했다. 아들의 수족 노릇을 하던 어머님이 병수발 7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인생관이 달라졌다.
“세상도 싫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며 자포자기하듯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정신이 들더군요. 이러다가 나도 정말 풀잎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가겠구나….”

컴퓨터를 들여놓고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을 입에 물었다. 어머님을 여읜 이듬해인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2000년엔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머님 무덤에 시집을 놓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관절염을 앓는 칠십대 중반의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에게 밥을 떠먹인다. “목구멍에서 ‘아버지, 차라리 제게
밥을 주지마세요.’란 말이 곧장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145쪽)


그에겐 아내가 있다. 10여 년 전 자원봉사자로 찾아와 그가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줬던 유승선씨. 그녀는 7년의 봉사 끝에 수녀가 되겠다던 꿈을 접고 그에게 왔다.
공교롭게도 아내는 결혼 후 유방암 판정을 받아 병마와 싸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한다.
아버지는 그런 며느리를 위해 유방암에 좋다는 방울토마토를 손수 기른다. 제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와 아내이건만, 그를 위해 자다가도 두세 번은 일어나 자세를 바꿔준다.
욕창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다.

내년쯤엔 소설을 한 편 내어 놓을 요량이다. 산문집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또 기나긴 시간, 그의 입은 자판을 콕콕 누르고 있겠다.


- 중앙일보 2008.12.24.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그래서 내 몸, 내 안위부터 챙긴다.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 불편은 2차적인 문제이다. 자신의 불편과 아픔이 더 크고
더 아파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둘러보면 분명 자신보다 더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삶에 대한 진지함과 경건함이 느껴지고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을 이용하여 산문집 270쪽을 채우기 위해 10년이 걸렸으며,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저는 아직 밥은 굶지 않았으니..."라는
장애를 뛰어넘어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주변을 더 걱정하는 황원교 시인의
기사를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당신은 당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닻을 올려 안전한 포구를 떠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안고
출발하여 탐험하라. 꿈꾸라. 그리고 발견하라" - 마크 트웨인

황원교 시인이 이를 악물고 장애인용 마우스 스틱으로 산문집 270쪽을 채우고
있었던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어떻게 지냈고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키지 못하고, 방황하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당장의 편안함과 즐거움에 익숙하여 도전과 변화를
거부하고 살았던 삶을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보다
진지하게 임하자.


2008.12.26.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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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값어치를 따지지 않고 찾아서 하는 성실함, 고객뿐 아니라 주변 직원에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친화력이 고비마다 빛을 발한 것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기회라도 그게 내 앞에 왔을 때 어떻게 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적성 운운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나도 어떤 때는 '이런 걸 하라고 엄마가 공부시키지는 않았는데'라는 자괴감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외부 고객 못지않게 내부 직원과의 융화가 중요하더라”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누가 뭘 시키더라도 ‘4년제 대학까지 나와놓고는 내가 고작 이런
아르바이트나 해서야 되겠어’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항상 성심성의껏 일하는 자세가 오늘을 있게 한 것 같다”

최근 경제위기로 취업길이 막혀 고통받는 후배들에게
"‘힘들다’고 말하기에 앞서 ‘너 스스로 그만큼 노력했는가’를 먼저 질책하라"
“후배들은 물론 나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낄 때 항상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며
“아무리 어려워도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는 결국 길이 열리게 돼 있다”고 조언한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하나은행 월곡지점에 번듯한 서울의 4년제 여자대학
전산통계학과 졸업반이었지만 경기침체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일단 비정규직
대학 출신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이서원(33·당시 23세)씨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8년 하나은행 본점 차세대 인수지원부 과장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한파로
공채 출신 정규직 은행원들조차 속속 사표를 쓰고 쫓겨나가던 시절에 들어온 아
르바이트생이 계약직·정규직을 거쳐 책임자급(과장)까지 오른 것이다.

아르바이트 신분일때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종일 서서 차 심부름하고
설거지하면서 한 달에 쥔 돈은 50만~60만원이 전부. 훨씬 나이가 어린 여상 출신 정규직
행원들 월급의 반의반도 안 되는 적은 돈이었만 그저 묵묵히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항상 누구한테나 웃었다. 실적은 물론 고객들로부터 평판도 좋아 비슷한 또래의
4년제 대학 졸업 공채들보다 승진이 더 빨랐다. 고객 만족을 인정받아 받는
‘이달의 우수 행원상’인 별도 아홉 번이나 받았다. 하나은행 6800여 명의 행원 중 별 9개를
받은 사람은 100명도 안 된다.
 .
이 과장은 98년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초과근무를 밥 먹듯이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시급이 나왔지만 늦게까지 일했다. 돈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선배들이
퇴근할 때까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남이 알아주는 일은 더욱
아니었지만 “아무리 아파도 은행에 와서 아팠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99년 4월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금융회사 경력이 최소 2년 이상
필요했지만 지점장이 강력하게 추천해 준 덕분에 이례적으로 1년도 안 돼 기회를 잡았다.
당시 하나은행에선 보람은행과의 합병으로 많은 사람이 명퇴했다. 하지만 이 과장에겐
거꾸로 새롭게 기회가 열린 셈이다.

계약직 창구직원으로 일할 때 이 과장은 ‘푼돈’을 가져오는 고객도 다 기억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고객을 기억하니 예금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를 찾았다.
특별히 상담 기술이 좋지 않아도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밝은 성격과 친화력은 조직생활에서 항상 큰 경쟁력이었다. 그는 계약직 채용
이후 정식 업무교육이나 연수 없이 곧바로 창구에 앉다 보니 적응이 쉽지 않았다.
은행업무가 끝나고 정산을 하면 늘 계산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 언니들이 그를
위해 항상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노하우를 알려줬다.
 
<중앙일보 2008년 12월 11일>

흘린 땀은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장애도,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던
일들도 하고자 하는 열정과 도전 앞에서는 길이 열리고 일이 풀리게 된다.
혹독한 IMF구제금융하에서 은행 아르바이트로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참으며 오직
자신의 성실함과 노력, 친화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행원보다 더 일찍 과장
직위에 오른 이서원과장의 입지전적인 성공사례를 보며 아직도 세상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열심히 일한만큼 대우받는 공정한 곳임을 느끼게 한다.

지난 IMF금융위기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는 요즘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공존하며,
어려울수록 위축되지 말고 나도 어려우면 남들도 똑같이 힘들다는 마음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가까운 내부 동료들을 감동시키며 그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그녀의 생존전략과
성실함, 땀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2008.12.11

김승훈
Posted by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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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박사(대한민국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제1호) KBS사내근로복지기금 21년, 30년째 사내근로복지기금 한 우물을 판 최고 전문가!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4회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를 통해 기금실무자교육, 도서집필, 사내근로복지기금컨설팅 및 연간자문을 수행하고 있다. 사내근로복지기금과 기업복지의 허브를 만들어간다!!! 기금설립 10만개, 기금박물관, 연구소 사옥마련, 기금제도 수출을 꿈꾼다.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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