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전, 지난 8월 15일이 광복절이었다. 한때는 해방일이라고 불렀으나 식민
사관이라고 광복절로 바꾸었다. 일부는 외세에 의해 광복이 되었으니 진정한 광복이 아니라고 하지만 광복을 이루기 위해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 무장
활동을 꾸준히 해 온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어느 분은 가진 전재산 수백억을 독립운동에 사용했는가 하면 어느 사람은 일본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도와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고문에 목숨까지도 빼앗았다. 프랑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정권에 협조한 사람들을 가려내 철저히 응징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
라는 이를 하지 못했다.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3대에 걸쳐 피폐하게 살아야
한다면 또 다시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었을 때 누가 조국을 위해
싸울 것인가?
십수년전 윤봉길의사 후손을 만났는데 일제의 감시로 학교도 다니지 못해 그 후손중의 한명이 중소기업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기름때 묻은 손을 부끄럽
게 내밀던 모습이 생각나 오늘은 너무 서론이 길었나보다. 1945년 광복절이
우리나라 민주화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국민들이 신분 차별이 없는 자유
민주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왕권국가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뉜 신분계급 국가에서 죽을 때까지 신분이 고착되고 자식들에게
신분이 대물림되는 불평등 사회였다면 광복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국민 누구나 신분 차별없이 각자 일한만큼 노동의 댓가를 받을 수 있는
편등사회가 되었다. 열심히 일한만큼 얼마든지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수있는 주식회사가 생기고 사용자와 노동자가 계약을
맺고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받게 되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일자리의 질
이 달라지고 보수액도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이다보니 원재료를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여 여기에 노동력을 더해 부가가치
를 창출해 수출하는 수출의존형 경제구조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기술이 없
었기에 저렴하게 제품을 만드려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인건비였다. 60년대
에서 80년대후반까지는 노동자들은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기 힘든 구조였
다. 80년대 초반 낮은 노동의 댓가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사내
근로복지기금제도였다.
사내근로복지기금제도를 연구하면서 기금제도의 탄생배경 부분에서 큰 아쉬
움을 느낀다. 정부에서 근로자들을 위해 혜택을 주려고 한 마당에 이왕 받으
려면 쎄게 법정복지로 주장했더라면, 그리고 관철시켰더라면 우리나라 기업
복지제도가 훨 나았을텐데. 60년대와 70년대 부모세대의 노력으로 지금 자식세대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듯이 기업에서 선배들이 만들어 혜택을
보고 후배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는 기업복지제도가 사내근로복지기금제
도이다. 지금 내가 맡는 사내근로복지기금업무를 10년, 20년 뒤에 후배들이
평가한다고 하면 과연 대충대충 처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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