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가 의제를 시해하자, 이를 명분으로 유방도 항우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마침 항우가 팽성을
떠나 제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유방이 56만 대군으로
팽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초한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항우가 3만 정병만 선발해 유방의 예상과 달리 서쪽으로
기습하여 팽성을 탈환한다. 유방은 군사 절반을 잃고
형양으로 물러서야 했다. 이후 유방은 한신을 중용하여
형양과 성고를 잇는 방어선을 쳤다. 그 뒤 항우가 도발해와도
회피하면서 반간계(反間計)로 항우가 범증을 버리게 만들었다.
항우가 전투력은 위였지만 전략은 유방에게 뒤졌다.
이를 범증이 만회하다가 떠나가자 유방이 항우를 해하로
몰아세웠다. 여기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 유방의 장수
한신이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항우군을 궁지에 넣고,
병사들에게 장량의 퉁소 소리에 맞춰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사면초가(四面楚歌)로 고향 생각에
울적해진 항우의 병사들이 대부분 이탈했다. 결국 항우는
소수의 병사만 데리고 포위망을 뚫은 뒤 오강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건만(역발산기개세 力拔山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말도 달리지 않는구나(시불리혜추불서 時不利兮騅不逝)
말조차 달리지 않거늘 어찌해야 하나(추불서혜가내하 騅不 逝兮可奈何)
우야, 우야, 너를 또 어쩌면 좋단 말이냐(우혜우혜내약하 虞兮虞兮奈若何)
- 출처 : 《思想史로 중국왕조사》(이동연 지음, 창해 펴냄, p.200~201)
초한전쟁에서 항우가 유방에게 패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관중을 포기한 것.
둘째, 거듭된 대학살로 민심 이반
셋째, 의제를 시해한 점.
이 세 가지 원인에서 공통점 하나를 꼽으라면 '독선'이다.
김승훈 사내근로복지기금연구소장(제1호 사내근로복지기금박사/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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