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며칠 후면 어린이날인데 선물 없어요?"
"떼끼! 너희가 어린이냐?"
"그래도, 어린이를 졸업한지 딱 2개월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억울해요"
"그럼 너희는 어린이로 다시 돌아갈래?"
"그건 싫어요. 그럼 학생의날에는 쉬나요?"
"학생의날은 공휴일이 아닌데?"
"학생의날에는 왜 안쉬나요? 그런 선물은 주실거죠?"
"학생의날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광주에서 우리나라 여고생들이 일본 중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일본 학생 입에서 '조센징'이라는 말에 흥분하여 일본학생과 우리나라 학생들이 집단 패싸움을 벌이게 되고 우리나라 곡물수탈,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으로 민족감정으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으로 승화된 날이란다. 이런 숭고한 날에 우리 쌍둥이들은 선물 타령을 하고 싶을까? "
쌍둥이들은 괜히 말했다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아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학생의날이 발생한 진원지 고등학교라서 그런지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이번 기회에 학생의날에 대한 유래를 정리해 설명해 주었다.
- 1929.10.30. : 오후 5시, 나주역에서 후쿠다(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가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광주여자보통학교)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가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인 주제에 뭐라고 까불어” ‘센징’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날라갔고, 역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패싸움으로 발전하였다. 마침 그 곳을 순찰 중이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는 조선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조선학생만 탄압하였다. 이에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자. 모리다는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 1929.10.31. : 아침, 광주로 가는 통학 열차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떼를 지어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어옴. 이후 한일학생간의 패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됨
- 1929.11.3. : 이 날은 일본 최대 명절인 명치절(일본 천황의 탄생일)이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개천절이었다. 오전 11시경 광주중학교(일본인학교)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이 날(일요일) 우리나라 학생들은 강제로 등교하여 일본 신사에 고개를 조아리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신사참배에서 기미가요를 부를 때 침묵으로 저항하였고, 신사참배가 끝나고 굴욕스런 심정으로 집에 가는 길에 조선학생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얼굴을 찔리는 사태가 벌어짐. 일부 조선 학생들은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 어용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 사건은 전 호남 일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로 발전하였으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지원하였다. 경찰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와 광주 농업 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맞서 광주의 신간회 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등은 하나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 장재성,강석원 등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광주투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에 힘썼다.
- 1929.11.7. : 11월 3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 및 보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남 각 공립 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 자금 조달 등으로 업무를 분담하였다.
- 1929.11.12 : 구속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2차’ 투쟁이 전개됨. 등교한 각 학교 학생들은 9시 30분을 기하여 일제히 전날까지 인쇄한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에 몰입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전국으로 확대 되었다. 학생들이 뿌린 격문 내용은
1.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2.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하자.
3.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4.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5. 직원회에 학생 대표를 참여시키자.
6.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자.
7. 식민지적 노예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8.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9.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 11월 12일 시위를 시작으로 다음해 1930년 2월초순까지 전국적으로 동맹휴학과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참가한 학교는 총149개교(초등 54, 중등91, 전문 4), 참가학생수는 5만 4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번 학생시위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이582명, 무기청학 2천330명, 피검자 1천642명에 이르러 3·1운동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했다.
- 1953년 국회의원 김종신의 제기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으나 1974년 유신을 맞이해서 학생들의 시위를 우려한 박정희정권은 “학생의 날”을 폐지하였고, 이후 1984년 신군부가 “학생의 날”을 다시 살리게 됨.
단순히 쌍둥이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한 섭섭함을 넘어 학생의날에 대한 유래와 민족정기, 자부심을 느끼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중학생이 된 녀석들에게 선물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한 마음도 일조를 더해서.
쌍둥이아빠 김승훈
"떼끼! 너희가 어린이냐?"
"그래도, 어린이를 졸업한지 딱 2개월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억울해요"
"그럼 너희는 어린이로 다시 돌아갈래?"
"그건 싫어요. 그럼 학생의날에는 쉬나요?"
"학생의날은 공휴일이 아닌데?"
"학생의날에는 왜 안쉬나요? 그런 선물은 주실거죠?"
"학생의날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광주에서 우리나라 여고생들이 일본 중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일본 학생 입에서 '조센징'이라는 말에 흥분하여 일본학생과 우리나라 학생들이 집단 패싸움을 벌이게 되고 우리나라 곡물수탈,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으로 민족감정으로 연결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으로 승화된 날이란다. 이런 숭고한 날에 우리 쌍둥이들은 선물 타령을 하고 싶을까? "
쌍둥이들은 괜히 말했다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아는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학생의날이 발생한 진원지 고등학교라서 그런지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이번 기회에 학생의날에 대한 유래를 정리해 설명해 주었다.
- 1929.10.30. : 오후 5시, 나주역에서 후쿠다(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가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광주여자보통학교)의 댕기머리를 잡아 당기며 희롱하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가 “후쿠다!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인 주제에 뭐라고 까불어” ‘센징’이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날라갔고, 역광장에 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패싸움으로 발전하였다. 마침 그 곳을 순찰 중이었던 일본인 순사 모리다는 조선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조선학생만 탄압하였다. 이에 광주고보(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자. 모리다는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 1929.10.31. : 아침, 광주로 가는 통학 열차안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떼를 지어 박준채를 둘러싸고 시비를 걸어옴. 이후 한일학생간의 패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됨
- 1929.11.3. : 이 날은 일본 최대 명절인 명치절(일본 천황의 탄생일)이었고, 우리나라에게는 개천절이었다. 오전 11시경 광주중학교(일본인학교)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한국인 학생 간에 또 충돌이 일어났다. 이 날(일요일) 우리나라 학생들은 강제로 등교하여 일본 신사에 고개를 조아리고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신사참배에서 기미가요를 부를 때 침묵으로 저항하였고, 신사참배가 끝나고 굴욕스런 심정으로 집에 가는 길에 조선학생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얼굴을 찔리는 사태가 벌어짐. 일부 조선 학생들은 일본 학생을 편들어 보도한 일본 어용신문인 광주일보 본사를 습격하여 그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었다. 이 사건은 전 호남 일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로 발전하였으다. 광주의 학생들은 서슴없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서회 지도자들은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지원하였다. 경찰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와 광주 농업 학교의 학생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맞서 광주의 신간회 지부, 청년단체, 사회단체등은 하나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주 청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장석천, 장재성,강석원 등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고 광주투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에 힘썼다.
- 1929.11.7. : 11월 3일 이후 회합을 거듭한 끝에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학생의 행동지도, 국채진은 전남 각 지방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 및 보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남 각 공립 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 동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 자금 조달 등으로 업무를 분담하였다.
- 1929.11.12 : 구속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2차’ 투쟁이 전개됨. 등교한 각 학교 학생들은 9시 30분을 기하여 일제히 전날까지 인쇄한 격문을 뿌리면서 시위에 몰입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 전국으로 확대 되었다. 학생들이 뿌린 격문 내용은
1. 검거된 학생들을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2. 경찰의 교내 침입을 절대 반대하자.
3.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4.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5. 직원회에 학생 대표를 참여시키자.
6. 한국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자.
7. 식민지적 노예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8.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9.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 11월 12일 시위를 시작으로 다음해 1930년 2월초순까지 전국적으로 동맹휴학과 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참가한 학교는 총149개교(초등 54, 중등91, 전문 4), 참가학생수는 5만 4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번 학생시위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이582명, 무기청학 2천330명, 피검자 1천642명에 이르러 3·1운동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을 기록했다.
- 1953년 국회의원 김종신의 제기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하였으나 1974년 유신을 맞이해서 학생들의 시위를 우려한 박정희정권은 “학생의 날”을 폐지하였고, 이후 1984년 신군부가 “학생의 날”을 다시 살리게 됨.
단순히 쌍둥이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한 섭섭함을 넘어 학생의날에 대한 유래와 민족정기, 자부심을 느끼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중학생이 된 녀석들에게 선물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한 마음도 일조를 더해서.
쌍둥이아빠 김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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